Trieste_대륙의 전쟁 - 2장. Hunch. 눈치
| 21.02.03 12:00 | 조회수: 2,967


아이언 테라클이 내려친 경비병의 머리가 허무하게 땅을 구를 때, 데카론의 수많은 영웅들도 땅을 굴렀다. 발로 차고 뛰었다. 먼지 자욱한 피톤 성에서는 피 먼지가 요동쳤다. 그곳에는 가리온도 있었다

“가리온. 저기 사람들이 몰려 있는데?”

캄비라 바투가 가리킨 곳에는 데카론들이 우르르 뭉쳐 있었다.

“왜 저렇게 몰려 있지?”

“설마 저기에?”

가리온은 벌써 듀스 마블과 슈마트라 초이를 발견하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모르는 일이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일행은 달려갔다. 그러나 막상 다가갔을 때, 듀스 마블도 슈마트라 초이도 없었다.

“왜 저러지?”

사람들은 일제히 석상 하나를 때려 부수고 있었다. 흙먼지가 누렇게 붙은 어딘가 낡아 보이는 회색 석상은 그리 사악해 보이지 않는데도 몰매를 맞았다.

“카론의 여섯 신.”

타마라는 석상을 보며 말했는데 그 표정이 그렇게 섬뜩할 수가 없었다.

“카론의 여섯 신?”

“카론에게 협력한 신들을 말하는 거예요.”

캄비라 바투의 질문에 시에나가 재빠르게 답해주었다.

“저 석상이 그 신들이라고?”

룸바르트는 석상을 가리키며 물었다. 석상은 도저히 신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뭉툭한 석상일 뿐이었다.

“상징이에요. 의식을 위한 준비죠.”

“…. 의식이요?”

시에나였다. 타마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카론을 불러내는 데는 두 명의 중간자가 필요했죠. 그러나 둘이라는 존재는 작고 미약해요. 때문에 중간자를 도운 신들이 있죠.”

“중간자를 돕다니? 그들은 누구지? 트리에스테 대륙에 아직 그 신들이 존재하는가? 어째서 도운 거지?”

누구보다 놀란 가리온은 소리치듯 물었다.

“눈바이스, 반저, 파르카, 테라, 아크, 세라피. 이들을 직접 본 자는 아무도 없죠.”

또박또박 말하는 타마라의 말에 시에나는 적잖이 놀랐다.

“인카르의 주신들이에요!”

그리고 또 한 명, 에바도 소스라치게 놀랐다.

“파르카?”

“역시. 시에나 잘 알고 있군요. 에바, 당신이 생각하는 그 파르카가 맞아요. 파르카 신전의 이름은 얼음의 마녀, 파르카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죠.”

“말도 안돼! …!”

에바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네오스를 떠나 고향처럼 지낸 곳이 파르카 신전이었다. 트리에스테 대륙에서 가장 추운 지역이라지만 에바에게는 그 어느 곳보다 따스한 안식처였다.

“파르카 신전은 악의 소굴이 아니야!”

에바는 소리쳤다. 사실 소리칠 필요는 없었다. 에바가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파르카 신전이 악의 소굴이 아니라는 것은 모두 잘 알고 있었다.

“에바. 상징적인 것일 뿐이에요.”

시에나가 달래려는 듯 말했지만 전혀 위로되는 말이 아니었다. 그런 시에나를 누군가 밀쳤다.

“석상을 부수려는 게 아니면 뒤로 좀 가시오.”

그 사람은 석상을 부수는 데카론들 틈을 이리저리 밀치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석상 가까이 가려는 움직임이었다.

“도대체 왜 석상을 부수는 거요?”

캄비라 바투가 대뜸 물었다. 그 사람은 바기족을 보고 잠시 황당해 하더니 대답해 주었다.

“석상 여섯을 부수어야 하오. 듀스 마블이 석상에다 주술을 걸어 놔서 부수지 않으면 검성이 있는 곳을 알아낼 수 없소.”

“그렇다면….”

타마라가 중얼거렸다. 석상 여섯 개. 카론을 도운 여섯 신. 우연의 일치가 아니었다.

‘이곳에서 벌어지는 건가.’

타마라는 주위를 둘러 보았다.

‘절망이 오기에 나쁘지는 않은 곳이야. 그랜드 폴 당시 대륙을 지키겠다고 일어났던 인간들은, 지금의 데카론들이다. 카론을 도운 여섯 신을 여섯 개의 석상으로 대체한 것인가. 피비린내가 흥건한 것도 그날과 같아. 그리고….’

타마라는 문득 시선을 느꼈다. 고개를 들어보니 역시 가리온이었다. 가리온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세상의 종말이 오는 날을 당신은 피할 수 없으리!’

타마라는 생각을 감추며 가리온에게 미소 지어 보였다. 가리온은 시선을 돌리더니 말했다.

“우리도 석상을 부순다.”

가타부타 의견이나 동의를 구할 새도 없었다. 가리온이 먼저 뛰었고, 다른 일행들도 데카론들 틈으로 뛰어 들었다.

“석상이 얼마나 남았지?”

“글쎄. 별로 남지 않은 것 같은데.”

“사람들이 줄고 있어.”

정말로 석상을 부수러 우르르 몰려 다니던 사람들이 점차 줄고 있었다. 데카론들과 똑같이 생긴, 듀스 마블이 소환한 시체들이 끊임없이 달려들었기 때문이었다. 피톤은 전쟁터라기 보다는 난장판에 가까웠다. 그나마 이제는 누가 적인지 구별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타마라의 말대로 적들에게서는 냄새가 났다. 에바와 캄비라 바투는 그것을 가장 잘 실감할 수 있었다.

“이런 힘 빠지게 하는 냄새는 도저히 참아줄 수 없군.”

냄새 고약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바기족, 캄비라 바투는 적들의 냄새를 이렇게 평했다.

“아무리 죽었던 인간이라 하지만, 어떻게 이런 냄새가 날 수 있지?”

타마라는 웃었다.

“얼른 석상이나 부수죠. 이번에는 파르카 석상이에요.”

“…!”

“잘 부탁해요.”

에바는 우두커니 서서 타마라의 말을 참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했다. 화를 내지 못한다면 입단속이라도 하고 싶었다.

‘어째서 나를 자극하는 거지.’

타마라는 에바를 아랑곳하지 않고, 가리온과 시에나 옆에 섰다. 에바는 더욱 불쾌해졌다.

‘시에나.’

모든 것이 시에나 때문인 것 같았다. 시에나로 인해서 가리온을 빼앗긴 것 같았다. 가리온, 그리고 룸바르트까지.

‘내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에바는 자신에게 흠칫 놀랐다. 룸바르트까지 생각하고 있는 자신이 이상했다.

‘가리온만 생각하자. 그래. 가리온만. 놓치지 않아. 절대.’

룸바르트는 에바를 한번 뒤돌아 보았다. 타마라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무슨 이야기를 한 거지?”

“알고 싶어요?”

“괴롭히지 말아줘.”

“에바를 미워해야 하지 않아요?”

“다들 죽게 되어 있어. 어떻게든.”

“여기 돌아다니는 시체들처럼 죽어서 다시 살아날 수도 있죠.”

“그렇다면, 어디 말해봐. 내가 어떻게 죽는지.”

“진심으로 말해주기를 바래요?”

타마라의 황금 눈동자가 룸바르트를 응시했다. 룸바르트는 입을 열지 않았지만, 고개는 자기도 모르게 가로로 젓고 있었다.

“훗. 어리석어.”

두 사람은 죽음에 관해 이야기 한 것이었다. 타마라는 룸바르트가 에바 때문에 죽게 될 것이라고 했었다. 그 말이 자극이 되어서 룸바르트는 계속 에바 곁에 남게 되었다.

“휴….”

룸바르트가 타마라에게 괜한 이야기를 했다는 생각을 하는 찰나,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타마라는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났다. 아니, 마치 원래 예정되어 있던 것처럼 나타났다. 떠나려는 룸바르트를 타마라가 잡았다. 그리고 시에나를 만났다. 시에나는 캄비라 바투와 함께 왔다. 그들은 타마라와 이미 알고 있었다.

“설마.”

눈 앞에 일행들이 보였다. 가리온, 시에나, 타마라, 캄비라 바투, 에바, 그리고 자신까지. 룸바르트는 한 명, 또 한 명 숫자를 세었다.

“우리…. 여섯 명이야.”

룸바르트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손가락 여섯 개가 저절로 구부러졌다.

“설마. 타마라가. 우리를 모은…. 건가?”

머리 속이 꽉 찬 것 같았다. 어떤 실타래가 있고 천천히 그것을 풀어야 할 것 같은 책임감까지 느껴졌다.

“처음에.”

룸바르트는 일행이 떠나던 날을 떠올렸다. 그 때는 제노아에서 온 기사와 그리고 자신과 헤이치 페드론, 시리엘 그리고 가리온과 에바가 전부였다.

“처음에 여덟.”

헬리시타를 떠나 북으로 가는 산맥을 넘을 때 타마라가 나타났다.

“아홉.”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복수의 빙곡에서 시에나와 캄비라 바투, 그리고 쿠리오가 가세했다.

“셋까지 더하면, 열 둘!”

룸바르트는 불현듯 시에나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것은 룸바르트도 잘 아는 것이었다. 어린 시절을 헬리시타에서 보낸 사람이라면, 아니 인카르 교단의 교리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아는 것이었다.

“인카르의 주신!”

어떤 실마리를 잡은 것 같았다. 실마리가 잡히자, 줄타기를 하듯 또 하나가 잡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타마라가 석상을 보고 했던 말이었다.

“카론의 여섯 신.”

타마라는 석상을 보며 말했었다. 룸바르트는 그 말을 하는 타마라의 표정이 섬뜩했던 것을 기억했다.

“카론의 여섯 신?”

“카론에게 협력한 신들을 말하는 거예요.”

“저 석상이 그 신들이라고?”

“상징이에요. 의식을 위한 준비죠.”

룸바르트는 석상을 가리키며 물었었다. 타마라는 마치 상관없는 것처럼 대답했다.

“아니야. 상관이 있어. 그래. 분명히 상관이 있어. 여기, 우리 여섯 명과!”

룸바르트는 답을 찾은 듯한 기분이었다. 또 다른 동아줄을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더 이상 집중할 수가 없었다.

“룸바르트. 마지막 석상을 부수었네. 가세!”

“응?”

가리온은 룸바르트의 어깨를 밀었다.

“드디어 듀스 마블이네.”

“뭐?”

다시 눈 앞에는 회색 석상에서 떨어진 목이 뒹굴고 있었다. 데카론들은 환호했다. 지금 부수어진 석상이 카론의 여섯 신들 중 하나임을 아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룸바르트는 어쩐지 움직이기가 싫었다. 가장 어려운 상황마저 냉소로 즐겼던 룸바르트였지만, 이번만큼은 느낌이 달랐다. 지옥문을 여는 열쇠라도 된 기분이었다.

‘가리온이 이런 기분으로 살고 있는 건가.’

두려움에 몸을 떨며 룸바르트는 가리온과 일행을 뒤따라 듀스 마블의 방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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