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ellow Yesterday - 역사의 시간 - 3장. Scar. 검은 흉터
| 21.01.06 12:00 | 조회수: 1,018


시에나의 마법으로 흐릿해졌던 가리온의 시력은 어느새 밝게 돌아와 있었다.

가리온은 더할 나위 없이 또렷한 눈으로 시에나를 바라보았다. 과거의 일들이 차례차례 거꾸로 돌아갔다.

아레스 숲에서 치료를 받고 그리폰을 타고 날아오르는 장면에까지 이르자 가리온의 확고했던 두 눈은 흔들렸다.

시에나가 틀림없었다.

“어떻게 시에나가….”

가리온은 지금 이렇게 시에나를 만나게 된 상황을 기뻐해야 하는 것인지 슬퍼해야 하는 것인지 금방 판단할 수가 없었다.

다크 홀에서 쿤다와 싸우다 쓰러지고, 파르카 신전에서 정신을 차렸을 때까지 가리온에게는 너무 많은 일이 벌어졌다. 때문에 가리온은 정신없이 앞으로만 달려야 했다. 그래도 가슴 한 편에는 생사를 알 수 없었던 시에나에 대한 걱정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런 시에나를 루앙 광장에서, 아버지가 사죄의식을 당하게 된 현장에서 다시 만났다.

어쩌면 예상할 수도 있었던 일이었다. 시에나는 인카르의 전령, 인카르의 사제였으니 듀스 마블이 있는 곳에 그림자처럼 붙어 있는 게 당연했다.

가리온은 그저 한숨을 쉴 수 있을 뿐이었다.

“시에나….”

그 순간 광풍에서도 움직이고 있었던 가리온의 검이 시에나의 목을 스쳤다. 선홍색 피가 하얀 목을 타고 흘러내리자 그리폰의 울음소리가 고통스럽게 찢어졌다.

“캬아아악!”

가리온은 얼른 검을 틀었다. 손목이 아릿해져 오면서 아슬아슬하게 시에나의 검보라빛 머리칼을 잘라냈다. 가리온이 검을 틀지 않았다면 시에나의 목이 머리칼 대신 잘려나갈 뻔한 순간이었다.

‘…시에나를 죽일 수는…… 없어!’

하지만 광풍의 바람 속에서 흔들리는 가리온과 달리 시에나는 주술을 멈출 마음이 없었다. 시에나는 자기 목에 칼이 들어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을 수 있을 정도로 마법에 깊이 빠져 있었고, 뒤늦게 시에나를 알아 본 가리온 덕분에 주문을 외울 시간도 충분히 벌어 놓은 상태였다.

그리고 시에나는 한 치의 망설임이나 주저함 없이 마법을 완성해냈다.

“세라피 윈드!”

시에나를 감쌌던 노란빛은 바람이 되어 휘몰아쳐 올라갔다. 그것은 그리폰에게서 뿜어져 나왔던 광풍보다 몇 갑절이나 더 굉장한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흡사 태풍이 몰아치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으윽!”

가리온은 바람에 휘둘리지 않으려고 애써보았지만, 그리폰의 바람과 시에나의 바람이 위아래로 맞물리면서 몸이 비틀렸다. 덕분에 가리온이 들고 있던 크루어는 바람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기류에 쓸려 회전하기 시작했다.

“크윽!”

크루어는 가리온의 의지와는 다르게 파도처럼 선을 그리며 비틀리고 또 비틀리더니 시에나의 어깨를 스쳐 그었다.

“헛!”

“꺄아아악!”

크루어가 스친 검 끝이 시에나의 아물지 않는 흉터를 벌렸고, 검은 핏방울들이 하늘로 튀어 긴 머리칼과 함께 춤추듯 바람에 휩쓸렸다.

“시에나!”

“으아아악!”

시에나의 고통스러운 비명이 대답으로 들려왔다.

“아아아아악!”

헬리시타의 광장이 큰 비명에 휩싸였다.

곧 검보라빛 긴 머리칼은 고통스러워하는 시에나의 얼굴을 완전히 덮었다. 그와 함께 아무런 색도 없던 것 같았던 바람은 시에나의 머리와 같은 색으로 짙어졌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캬아아악!”

시에나에게 날아왔던 그리폰은 앙칼지게 울어대다 바람이 검게 변하자 당황한 듯 날갯짓이 자꾸 엇나갔다. 그리폰은 더 이상의 날갯짓을 그만두고 하늘로 붕 떠올라 원을 그리며 시에나를 맴돌았다.

가리온은 정확히 말할 수는 없지만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지려 함을 직감했다.

그리폰이 쏘아 내리던 거센 바람은 멈추었지만, 광풍은 더욱 거세지고 있었다. 그것은 온전히 시에나가 만들어내던 바람이었다.

“시에나!”

검은 광풍의 소용돌이 사이로 가리온은 시에나를 불러댔다. 그러나 시에나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오직 휘몰아치는 칼날 같은 소리뿐이었다.

몸을 겨누기도 힘든 상태에서 가리온이 한 발을 떼어 움직여보려 하자 광풍이 세차게 가리온을 내동댕이쳤다.

“큭.”

가리온은 크루어와 함께 다시 일어섰다.

“이대로는 안 되겠어.”

가리온은 시에나를 부르는 것을 그만두고 슈마트라 초이를 향해 돌아섰다. 바람의 기세가 점점 더 격해지는 와중에 시에나보다는 아버지가 우선이었다.

그러나 가리온은 멈칫하고 말았다.

“아버지!”

혹시 검은 바람에 가려 보이지 않을지도 모르는 것이라는 생각에 가리온은 힘겹게 바람을 뚫고 주위를 돌아다녀 보았지만 아버지의 모습은 찾을 수가 없었다.

아버지를 매달았던 나무를 발견했지만 슈마트라 초이는 그곳에 없었다. 듀스 마블 역시 찾을 수가 없었다.

“아버지! 컥! 컥!”

마치 수만 개의 고무가 한꺼번에 타는 듯한 냄새에 가리온은 숨이 탁 막히고 아찔해졌다.

“검은 바람 때문인가?”

가리온은 조금이라도 신선한 공기를 마셔보려고 고개를 하늘로 들어보았다. 그러자 더욱 놀라운 일이 벌어져 있었다.

저 멀리 아득한 하늘까지 온통 검은 바람이 가득했다. 아니 그것은 검은색 알갱이들이었다. 검은 알갱이들은 촘촘히 짜인 실처럼 길게 줄을 서 단상에서 하늘까지 이어져 올라가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지? ….”

가리온은 문득 파르카 신전에서 꾸었던 꿈이 떠올랐다. 알 수 없는 울음소리 뒤로 가리온 주위를 회오리가 빙빙 돌던, 그 꿈처럼 가리온의 갈색 머리칼이 날리며 자꾸만 가리온의 얼굴을 때렸다.

가리온은 섬뜩한 연기에 투구를 바로 썼다. 동시에 검은 광풍은 주위의 것들을 끌어들이며 꼬이기 시작했다.

“으윽! 빨려 들겠어!”

가리온이 크루어를 단상에 찍어 몸을 지탱했지만, 단상의 이음새가 심하게 덜컹거렸다. 아래위로 요동치던 널빤지가 덜컥거리며 투둑 뜯어지더니 크루어, 그리고 가리온의 몸과 함께 공중을 날아 바람 속으로 으드득 갈려 들어갔다. 가리온은 같이 빨려 들어가지 않게 검을 빼려 했으나 힘을 지탱할 받침이 없어 빼낼 수가 없었다. 가리온이 다른 한 손을 아직 갈리지 않은 널빤지에 내려치려 하자, 광검이 쑤욱 튀어나왔다.

“또!”

가리온은 광검이 두려웠지만 검은 돌풍은 가리온을 놓치려 하지 않았다. “난….”

가리온은 두 검을 꼬옥 쥐었다. 어느덧 크루어에서도 오묘한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가리온이 양 손에 든 검은 충만한 기운을 빛으로 발했다.

“아직은!”

크루어가 가리온의 의지대로 우직하게 바람을 수직으로 갈라 내렸다. 가리온은 이번에도 광검을 뒤로 감추었다.

자신이 알로켄족의 후손임을 가리온은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위잉.

흐름이 끊긴 바람 사이로 언뜻 어떤 물체 같은 것이 비쳤다. 가리온은 검기를 더 부려 틈을 더 벌리려 애썼다.

“아버지? 시에나?”

가리온의 검이 다시 한 번 바람을 파고들었다. 갈라진 틈 사이로 조각을 맞추듯 검은 얼굴이 문득문득 지나갔다.

“이대로는 알 수 없어!”

가리온은 검은 광풍의 흐름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번쩍, 가리온의 눈이 뜨였다.

“이… 이건 회오리바람이 아니야!”

주위의 것들을 빨아들인다고만 생각했던 바람은 차차 방향을 바꾸고 있었다. 매캐하고 지독한 알갱이들이 점차 연기처럼 밖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무언가, 위험해…!”

사방이 어둑한 가운데서 가리온은 드디어 광풍 속으로 뛰어들 결심을 했다.

바람만 빼면 너무나 어둡고 적막한, 위기감만이 가득 찬 상황이었지만, 어떻게 보면 가리온은 항상 혼자서 그런 상황을 헤쳐 왔다. 아레스 숲에서 스파이더 퀸과 싸울 때나 다크 홀에서 예언자들을 만났을 때도 다른 누구는 없었다.

‘내가 가는 길은……. 피가 가득한….’

가리온은 예언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니.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것 밖에 없어.”

가리온은 유일하게 잡은 단서인 광풍 속에 얼핏 비치는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크루어를 크고 빠르게 휘둘렀다.

가리온은 흐름을 가르고 광풍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러나 생각했던 것처럼 금방 얼굴을 볼 수는 없었다. 검은 연기는 계속해서 가리온의 눈앞을 가리며 덧씌워지고 있었다.

가리온은 검은 알갱이들이 몸에 들러붙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소름 돋는 그 기분은 죽음을 떠오르게 만들었다. 그 느낌을 그대로 간직한 채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앞으로 발을 뻗어 들어갔다. 두려움과 호기심이 발걸음을 멈추지 않게 도왔다.

휘익.

가리온의 호흡이 더욱 조심스러워졌다. 하늘거리는 얇은 천을 걷어내듯 한발을 더 떼자 검은 연기는 더 이상 가리온을 쫓지 않았다.

그렇다고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다. 바로 앞에서 빨간 눈알이 온 몸에 둘러붙은 검고 길쭉한 생물이 꿈틀거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생물과 바람의 막은 가늘고 끈적해 보이는 다리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것은 마치 영양분을 공급해주는 숙주 같은 느낌이었다. 그렇다면 생물은 곧 마법을 생성한 시에나여야 했다.

하지만 시에나의 여린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빨간 눈알이 온 몸에 둘러붙은 검고 길쭉한 괴생물이 연신 꿈틀거릴 뿐이었다.

눈알들과 검은 물체는 원래 한 몸이 아니었던 듯 했다. 검은 물체는 위쪽 어딘가에서 계속 뿜어져 부피를 늘리고 있었고, 눈알은 그 물체를 타고 스르르 구르다가 자리를 잡는 곳에서 멈추어 눈알을 이리저리 굴렸다.

“아버지는? 시에나는? 어디 있지?”

어느 정도 각오했던 일이기는 했지만 가리온은 기대했던 결과에 어긋나 실망하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하나의 생각이 스쳤다. 아레스 숲에서 만났던 스파이더 퀸과 노라크 동굴에서 만났던 스켈리톤, 우코바치, 쿤다, 예언자, 그리고 이곳에 오면서 부딪혔던 수많은 괴물들이 머리 속에 스쳐 지나갔다.

‘이계의 생명체인가?’

가리온의 생각을 읽으려는 듯 빨간 눈알이 한꺼번에 가리온을 쏘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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