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Norak - 이교도의 유물 - 8장. Golden. 황금 전투
| 20.12.16 12:00 | 조회수: 1,179


발단은 아이언 테라클이 발견한 카시미르 산맥의 자덴이었다. 대륙의 중앙을 가로지르는 카시미르 산맥은 트리에스테의 북쪽과 남쪽을 확실히 구분하여 주었다.

강추위와 불타는 열기가 공존하는 북쪽은 기사들의 땅으로, 도시 제노아가 위세를 떨치고 있었고, 남쪽에는 카시미르 산맥 가운데서 뻗어 나온 크로오 산맥 안쪽의 헬리시타가 인카르 교단의 진원지로서 명성을 날렸다.

두 도시 사이에서 아이언 테라클은 카시미르 산맥을 따라 서쪽으로 서쪽으로 떠돌다가 거대한 금광맥을 발견하게 되었고, 그것을 고스란히 인카르 교단에 넘겼다. 인카르 교단에서는 아이언 테라클이 금광맥을 넘겨준 대가로 그 곳에 도시를 건설하여 총책을 맡도록 하였다. 아이언 테라클이 어영부영 떠맡은 그 도시가 바로 자덴이었다.

그러나 아이언 테라클은 자덴의 총책임자에 만족하지 않고, 조디악의 자리를 탐냈다. 당연한 일이었다. 조디악은 인카르에서도 최고의 위치였다. 그 명예스러운 자리를 탐내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인카르에서 아이언 테라클을 받아들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이제야 인카르가 조금씩 기반이 잡혀가는 단계였다. 그런데 소중한 금광맥을 놓쳐 버린다는 것은 세 종족이 서로 견제하고 있는 상황에서 트리에스테의 중심으로 자리잡아 왔던 인카르를 단번에 허물어뜨릴 수도 있는 일이었다. 결국 인카르에서는 아이언 테라클을 기사계를 대표하는 조디악의 자리에 앉혔다.

우선 금광맥에 대해서는 비밀에 붙인 후, 이것을 기회로 보고 아이언 테라클에게 비운의 후예라는 명분을 달아 기사계까지 인카르에 흡수시키려 했다. 결과는 대 실패였지만.

어쨌거나 자덴은 그러한 비밀 위에 새워진 도시였고, 아이언 테라클이 제노아로 옮아가면서 그 자리는 공석으로 남게 되었고 인카르에서는 냉철한 이성을 갖춘 궁사계가 그 곳을 관리하도록 맡겼다.

궁사계로서는 나쁠 것도 없었다. 금의 이용가치는 무궁무진했다. 게다가 인카르와 기사계를 믿을 수도 없었다. 궁사계 전체의 성향은 은둔자적인 것이었지만, 비나엘르 파라이와 특별한 친분관계를 유지하던 아이리스 비노쉬는 흔쾌히 제안을 받아 들였다.

상황이 그렇게 되자 기사계에서는 큰 반발이 일어났다. 아이리스 비노쉬와 비나엘르 파라이가 절친한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그 둘이 손을 잡는 것은 기사계로서는 그리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비나엘르 파라이는 이런 갈등을 혼사라는 묘책으로 풀어냈다. 아이리스 비노쉬의 제자 디에네 비노쉬와 기사계의 영웅 슈마트라 초이가 결혼하게 된 것은 이런 상황의 결과였다. 가리온의 공식적인 부모는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궁사계의 아이리스 비노쉬는 네오스와 자덴을 장악하게 되면서 트리에스테 대륙의 남서쪽을 전부 흡수하기에 이르렀다. 궁사계는 어마어마하게 비대해지며 나날이 성장했다. 이 모든 것은 인카르의 조디악들만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런 궁사계에 새로운 문제점으로 불거진 것이 있었으니, 크로오 산맥 서쪽에서부터 시작되는 미로의 숲에 가려 그 동안 존재조차 미미했던 종족, 바기족이 들고 일어난 것이다.

사실 궁사계가 네오스에 자리를 잡고 자덴마저 장악하면서 제일 피해가 컸던 것은 바기족이었다. 그들은 아이언 테라클이 금광맥을 발견하기 훨씬 이전부터 광맥에 대해 알고 있었고, 거기에서 나오는 금을 가지고 헬리시타 같은 도시에서 생산되는 것들을 은밀하게 손에 넣었다.

아이언 테라클이 자덴을 맡은 기간 동안에는 그것이 더 쉬워졌다. 금광에서 캔 것을 아이언 테라클에게 바치기만 하면 그는 바기족에게 필요한 물품을 구해다 주었던 것이다.

이런 식으로 아이언 테라클은 바기족의 노동력을 이용하여 몇 배의 부를 쌓아나갔고, 바기족은 생필품이나 무기를 공급 받을 수 있었다. 때문에 궁사계가 자덴에 나타난 것은 바기족에게는 치명적인 손실이었다.

아이언 테라클이 인카르의 신관이 되어 제노아로 떠나고 아이리스 비노쉬가 자덴을 맡게 되자 누트 샤인은 대담하게 조세를 바치겠노라고 5년 동안 꼬박꼬박 아이리스 비노쉬를 찾아 갔다. 그러나 아이리스 비노쉬는 꿈쩍도 하지 않았을 뿐더러, 종당에는 바기족이 자덴을 출입하는 것을 금해 버렸다.

바기족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아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궁사계가 네오스를 비롯하여 자덴까지 흡수하게 되어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다.

바기족에게는 숨겨둔 금은 많았지만, 철이나 기타 금속은 물론 당장 필요한 소금 같은 것들도 점점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대로 가면 물 없는 우물 안에 갇힌 개구리처럼 말라 죽을 것이 뻔했다.

이렇게 해서 바기족은 죽기살기로 싸울 결심을 하게 되었고, 누트 샤인은 마지막 희망을 위해 노라크 동굴로 출발한 것이다.

누트 샤인은 촌락을 출발하면서, 자신을 대신해 바기족을 이끌어 줄 인물로 치아크라 쿠메르를 뽑았다. 치아크라 쿠메르는 누트 샤인과 달리 거대한 몸집을 가진 사람으로 기사계에 버금가는, 아니 그 이상이 될 정도의 훈련을 받은 터였다.

사실 누트 샤인을 제외하고 바기족 구성원 대부분은 이러한 전사들이었다. 누트 샤인은 이런 날이 올 것을 예상하고 치아크라 쿠메르 같은 전사들을 키워왔던 것이다.

"이것은 모두 예정되어 있던 일이었다. 그러니 두려워 말고 맞서거라."

"두렵지 않습니다. 저희는 족장님만을 믿고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쉬운 일은 아닐 테지만, 나와 너희들을 위하여 반드시 이곳을 지켜야 할 것이다."

누트 샤인과 치아크라 쿠메르는 말없이 뱀으로 빚은 독주를 나누어 마셨다. 바기족 촌락에서 결코 흔치 않은 약속의 술이었다. 촛불이 강하게 흔들리자 누트 샤인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반드시 이것을 기억해라. 절대로 어둠과 남서풍을 믿지 말거라."

"네."

"나는 반드시 이곳으로 돌아 올 것이다."

다음날 아침 일찍 바기족의 1대 족장 누트 샤인은 2대 족장 치아크라 쿠메르를 남기고 노라크 동굴로 떠났다.

누트 샤인이 조심스럽고 잔꾀가 많은 늙은이라면, 치아크라 쿠메르는 바기족의 특성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 우둔하면서도 대담한 젊은이였다. 또 수련만 쌓아왔을 뿐, 실제적인 전투 경험이 거의 없었다. 궁사들이 활쏘기에 능하다는 것 이외에 그들의 특성에 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어쨌든 치아크라 쿠메르는 처음에는 누트 샤인의 말을 되새기며 낮 동안에만 공격하고, 밤에는 절대 꿈적하지 않았다. 또, 남서풍이 부는 날에는 낮에도 이동하지 않았다.

그러나 삼 개월 넘게 대치상태가 지속되자 이러한 전투가 슬슬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낮 동안에 공격을 개시하면 궁사들의 화살은 즉각 날렵하게 날아와 바기족의 전사들의 가슴을 꿰뚫었다. 속수무책이었다. 한 달 또 한 달, 시간이 흐르면서 바기족의 전사의 수는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다. 남아있는 전사들의 사기도 문제였다. 미적지근한 공격에 전사들의 정신력은 풀어질 대로 풀어져 있었다. 이제 그들은 싸워야 할 명분조차 잊은 듯 했다.

치아크라 쿠메르는 초조해졌다. 이대로 바기족이 공중분해 되는 것은 아닌가 걱정이 앞섰다. 확실하게 끝내줄 한 방의 묘책이 필요했다. 그는 우둔한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밤에 공격을 한다고 가정해보자.’

치아크라 쿠메르의 생각에 바기족이 밤에 공격을 한다면 움직임이 잘 보이지 않아 확실히 유리할 것으로 판단되었다. 게다가 궁사들이 바기족과 대치하고 있는 방향은 남서쪽이었다. 남서풍이 불어준다면 풍력으로 화살의 위력이 약해질 것이었다.

‘그래. 그거야!’

노련한 누트 샤인이 어둠을 꿰뚫는 궁사들의 시력과 바람마저도 가르는 화살을 바기족이 피할 수 있도록 미리 일러주었건만, 그것을 까맣게 잊어버린 우둔한 족장 치아크라 쿠메르는 남서풍이 부는 밤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누트 샤인이 떠난 지 반 년 만에 드디어 기회가 찾아왔다. 별빛조차 보이지 않는 칠흑같이 어두운 밤, 소슬한 남서풍이 불기 시작한 것이다.

치아크라 쿠메르는 주요 병력을 이끌고 미로의 숲을 지나 자덴에 기습 공격을 시작했다. 갑작스런 공격에 궁사들은 당황하는 듯 했다. 특히 궁사들은 바기족의 독한 냄새에 주춤거렸다. 그 때를 놓치지 않고 바기족은 괴물 같은 힘으로 궁사들을 밀어붙였다. 좌충우돌 휘두르는 칼날 아래 상대편 군사의 시체는 낙엽처럼 흩날려 쌓여갔다. 그들의 몸에 사정없이 칼을 꽂아 넣는 순간, 괴물같이 일그러진 인간의 모습으로 숨어 살아야 했던 지난 세월을 보상 받는 듯한 쾌감을 느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사태를 추스르고 반격에 나선 궁사들은 전열을 재정비하여 일제히 활시위를 당기기 시작했다. 치아크라 쿠메르와 전사들은 다섯 겹의 나무로 만든 방패를 들고 이에 대항했다.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새까맣게 날아온 화살은 후드득 소리를 내며 방패에 꽂혔다.

특별히 야간공격에 대비하여 긴급하게 미로의 숲의 나무를 잘라 새로 방패와 무기를 마련한 것이었다. 치아크라 쿠메르는 이러한 노력이 반드시 보상되리라고 믿었다.

화살이 날아 올 방향을 가늠하기 힘들었으므로 병력을 한 군데 집결시켜 반원 모양으로 나무 방패를 둘러 세운 치아크라 쿠메르는 곧 손에 잡힐 듯 눈 앞에 다가온 승리에 한껏 도취되었다.

이제 남은 일은, 궁사들이 활을 쏘기 시작하는 순간을 잡아채는 일이었다. 결정적인 순간에 바기족의 전사들이 원형을 그리며 물밀 듯 달려 나가 궁사들을 잡아서 낚아 챈 뒤 허리를 꺾으면 되는 것이었다.

예상대로 궁사들의 화살이 나무 방패를 향하여 일제히 날아왔다. 치아크라 쿠메르는 자신만만했다. 괴력을 가진 바기족이 시험 삼아 화살을 쏘았을 때도, 다섯 겹의 방패는 뚫지 못했었다. 궁사들이 인간인 이상, 이 방패를 뚫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자! 마지막이다! 우리 바기족은 더 이상 하등 한 변형체가 아니다! 이제부터는 바기족의 시대가 될 것이다!"

"우와!!!!!!!!!!!"

치아크라 쿠메르의 선동에 바기족 병사들은 천둥 같은 함성을 질렀다. 그리고 다가오는 화살을 향하여 방패를 내밀었다. 치아크라 쿠메르는 방패 무리 한가운데에서 칼을 뽑으며 병사들을 독려하는 소리를 질러댔다. "우우우!! ……. 윽!"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이 치아크라 쿠메르의 등 뒤에서 달려 나가던 병사의 다섯 겹짜리 나무 방패를 반으로 가르더니, 똑바로 병사의 몸을 뚫고 지나 치아크라 쿠메르의 등에 꽂혔다.

등 뒤쪽에서만이 아니었다. 오른쪽, 왼쪽, 앞쪽 할 것 없이 같은 일이 벌어졌다. 순식간에 고슴도치가 되어버린 몸뚱이는 푹 하고 땅바닥에 고꾸라졌다.

궁사들의 화살은 바기족보다도 더 괴물 같은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화살이 잔뜩 꽂혀진 치아크라 쿠메르의 시신이 바기족 촌락의 입구에 버려진 것은 다음날 아침의 일이었다. 칠십 세의 치아크라 쿠메르가 지켜 온 지난 반 년 간의 노력이 하룻밤 사이에 물거품처럼 꺼져버린 것이다. 치아크라 쿠메르의 아들 캄비라 바투는 엄청나게 놀라기도 했지만, 더 큰 분노로 온 몸을 떨었다. 이제 바기족의 시대가 올 것이라고 당당하게 외치며 나섰던 아버지였다. 누트 샤인을 이어 바기족을 이끌 아버지였다.

그러나 바기족에게 이러한 슬픔은 사치였다. 그들은 궁사계가 앞을 가로 막고 있는 현실을 피할 수 없었다. 바기족이 먼저 습격을 시작한 이상, 궁사들이 어떤 태도로 나올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바기족에게는 반년 전에 길을 떠난 누트 샤인이나 갑작스레 목숨을 잃은 치아크라 쿠메르를 대신할 새로운 지도자가 절실히 필요했다. 가장 유력하게 떠오른 인물은 그의 아들 캄비라 바투였다.

"그는 아직 어리지 않소?"

"하지만, 이 상황에서 가장 적합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아니요. 저는 아직 어립니다."

캄비라 바투는 지도자의 자리를 겸손하게 사양했다. 누트 샤인이 워낙 오랫동안 족장으로서 바기족을 통치했기 때문에, 바기족에는 노인이 많았다. 아버지가 족장의 자리에 올랐던 나이도 칠십이었다. 서른셋의 자신이 족장이 되는 것은 아무래도 부끄러운 일이었다.

"지금은 족장의 자리를 채우기 보다는, 눈앞의 적에 신경을 써야 할 때 입니다. 승기를 잡은 후에 의식을 치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소. 캄비라 바투는 벌써 우리 바기족의 참모요. 일단 캄비라 바투의 전술로 바기족을 끌어갈 수 있는 사람인지를 검증해 본 뒤 정해도 늦지 않을 것이오."

부족 중에서 영리한 축에 속했던 캄비라 바투는 곧 참모로서 전열을 다시 다듬기 시작했다. 그리고 궁사계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누트 샤인이 남긴 기록들을 훑어보았다. 누트 샤인은 외부세계로 나간 일이 별반 없었으나, 어떻게 해서인지 세상 돌아가는 이치는 두루 꿰뚫고 있었다.

'방주 아르카나에서 나온 마법종족과 기사종족, 그리고 궁사종족은 뿔뿔이 흩어졌다. 무력한 인간인 그들에게 단결이란 미덕은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마법종족은 문명의 땅이던 곳에 새로운 도시 헬리시타를 세웠다. 기사종족은 과거 파괴의 땅에 제노아라는 도시를 지어 살기 시작했고 궁사종족은 과거 비옥의 땅에 네오스라는 도시를 탄생시켜 뿌리를 내렸다. ……. 마법을 부리는 인간들은 신에 가까운 힘을 얻기 위해 부단히 그들의 정신력을 키우는 노력을 해야 했다. 칼을 쓰는 인간들은 파괴의 땅에서 뿜어져 나오는 진기를 흡수하여 보다 튼튼한 육체를 키우기 위해 끊임없는 수련을 했다. 활을 쏘는 인간들은 위대한 자연을 뛰어넘기 위해 인간다움마저 버리고 동물적 본능을 갈구했다.'

캄비라 바투는 누트 샤인이 남긴 기록을 자세히 살피며 생각에 잠겼다.

'……. 활을 쏘는 인간들은 위대한 자연을 뛰어넘기 위해 인간다움마저 버리고 동물적 본능을 갈구했다…….'

치아크라 쿠메르가 캄비라 바투에게 족장님이 들려 주신 말씀이라며 자랑스럽게 이야기해주었던 것이 떠올랐다.

'반드시 이것을 기억해라. 절대로 밤에는 습격하지 말거라. 그리고 남서풍이 불 때를 믿지 말거라……. 그래! 그거였어!'

캄비라 바투는 곧 창고에 처박혀 있던 금을 이용해 무기와 갑옷에 광택이 나도록 도금을 했다. 어차피 금은 지금은 전혀 쓸모가 없는 것이었다.

또 악취가 심하게 나는 구더기들을 골라 추출하는 작업을 했다. 그동안 전사들에게는 곳곳에 함정을 파는 동시에 아홉 그루의 거목을 베어오도록 지시했다.

모든 준비가 끝나기 일 주일 전, 동이 터 오는 새벽녘에 캄비라 바투는 전사들을 불러 모았다. 체격이 단단한 전사를 앞쪽에, 날렵한 전사들은 양 옆에, 그리고 괴력을 지닌 전사들을 뒤쪽 중앙에 배열시킨 다음 갑옷과 무기를 들도록 하였다.

아직 준비가 끝나지 않은 상태라, 바기족 전사들은 캄비라 바투의 갑작스러운 소집에 놀란 눈치였지만, 잠자코 그가 지시하는 대로 따랐다.

"이제부터 두 눈을 똑바로 뜨시오. 두 번 이상 눈을 감는 자가 있다면, 그 자를 포함해 일가족을 모두 몰살할 것이오."

캄비라 바투는 매섭게 외쳤다. 전사들은 그 단호함에 움찔했지만,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눈을 부릅떴다.

서서히 아침 해가 올라왔다. 땅이 밝아지면서 사물을 환하게 비추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아도 반짝이는 금에 광택을 더하니 바기족의 갑옷과 무기들은 햇빛처럼 찬란하게 빛났다.

정열하고 있던 전사들은 모두 자기도 모르게 한번씩 눈을 질끈 감았다. 사방에 금빛이 빛나면서 전사들의 눈을 사정없이 파고든 것이었다. 따끔거리고 눈물이 흘러내려 도저히 눈을 뜰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눈을 감아버린 전사들은 다시 눈을 뜨고 싶지도 않았다. 두 번 눈을 감게 되면, 자신을 비롯해 가족들이 몰살 될 것이었다. 이런 전사들에게 캄비라 바투가 외쳤다.

"눈을 뜨십시오! 우리 바기족에게는 변형의 힘이 있습니다. 단 일 주일이면, 우리는 이렇게 빛나는 태양이라도 두 눈을 부릅뜨고 바라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햇빛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는 인간들을 기필코 이길 수 있습니다! 이런 것도 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어서 눈을 뜨십시오!"

변형의 힘. 바기족이 가진 가장 치명적이고도 유용한 힘. 전사들은 캄비라 바투의 독려에 망설임 없이 똑바로 눈을 떴다.

평범한 인간들을 쓸어버리고 바기족의 세상을 만드는 것, 그것은 그들 종족의 오랜 숙원이자 염원이었다. 변형의 힘을 이용해 그 숙원과 염원을 이루겠다는데 주저할 바기족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일주일 뒤, 바기족 전사들의 눈에는 투명한 쌍꺼풀이 하나 더 생겼다. 이제 빛 따위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로써 캄비라 바투가 계획했던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 캄비라 바투를 선봉장으로 앞세운 바기족의 전사들은 엄숙하게 자덴으로 향했다.

그 동안 궁사계에서는 고맙게도 전혀 공격을 가해오지 않았다. 궁사계에서는 치아크라 쿠메르의 일로 바기족이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었으리라고 만 생각했다. 우둔하다 치부하던 그들이 또 다른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은 전혀 상상 밖의 일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궁사들의 지나치게 밝은 눈이 오히려 낮에는 약하기 그지없다는 것을 똑똑히 알게 된 바기족이었다.

도금하여 황금처럼 빛나는 무기는 바기족의 새로운 작전이었다. 캄비라 바투는 햇빛이 가장 강렬하게 내리기 시작하는 정오에 공격을 개시하기로 했다. 진로는 충충한 미로의 숲이 아니라, 숲 둘레의 마른 땅이었다.

"이쪽으로는 피할 곳도 없습니다. 이리로 가는 것이 맞습니까?"

"예. 이쪽입니다."

그곳은 미로의 숲과는 달리 나무 한 그루 없는 삭막한 곳이었다. 주위에서 누군가 공격해 온다면 피할 만한 곳도 없었다. 그것이 바로 캄비라 바투가 노리는 바였다.

피할 곳이 없는 상황이라면 전사들은 오히려 죽기를 각오하고 맹렬하게 싸울 것이었고, 해를 가릴 것이 없어 도금한 무기들도 더욱 빛을 발할 것이었다. 또 궁사들도 바기족과 마찬가지로 피할 곳이 없으니 오히려 이 쪽이 빠르게 공격하기에 한층 손쉬울 터였다.

캄비라 바투가 이끄는 바기족의 군대는 영리한 우두머리가 그려놓은 계획대로, 그가 원하던 상황 그대로, 자덴과 촌락 사이에서 궁사계와의 첫 번째 전투를 치르게 되었다.

캄비라 바투와 바기족의 전사들은 낡은 망토를 펄럭이며 서 있었다. 어느 새 그들의 주위를 궁사들이 에워싸는 것이 보였다. 곧이어 공격을 시작할 태세였다.

"빨리 이 낡은 것들을 벗어버립시다!"

"그래요! 이러다가 우리 모두 몰살당하겠소!"

몇몇은 캄비라 바투를 재촉하며, 서둘러 공격할 것을 요구했다. 그들은 두려웠다. 치아크라 쿠메르도 이런 방법으로 온 몸에 화살을 맞아 개죽음을 당했던 것을 생각하니 눈앞이 아찔했다.

"아직 입니다. 조금만 더 기다리십시오."

바기족이 미동도 않고,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바기족을 둘러 싼 궁사들도 잠시 멈칫하고 있었다. 양쪽 다 섣불리 공격에 나서지 않았던 것이다.

캄비라 바투의 눈에 저 멀리 한 마리 그리폰이 날아오르려 하는 것이 보였다. 그리폰은 계속해서 날개를 퍼덕이고 있었지만, 쉽게 하늘로 떠오르지 못하고 있었다.

'날개가 부러졌나……. 왜 날지 못하고 있지……. 저대로 있다간 다른 놈한테 잡힐 텐데…….'

캄비라 바투는 어쩐지 저 그리폰이 바기족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같은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변형되었다는 이유 하나로, 오염체로 취급 받아 온 바기족은 여태껏 평범한 인간들을 두려워하며 숨어 살아왔다. 날지 못하면 멀쩡한 그리폰들에게 잡아 먹혀 버리고 마는, 날개가 부러진 그리폰과 바기족은 다를 바가 없었다.

바기족의 숙명을 떠올리는 순간 가슴이 메어질 듯 아파왔다. 캄비라 바투는 더 이상 당하고 있지만은 않겠다는 결의에 차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순간 놀랍게도, 퍼덕이던 그리폰의 몸체가 조금씩 위로 뜨기 시작하더니, 드디어 창공을 향해 비상했다.

캄비라 바투는 그리폰이 날아오르는 모습이 마치 행운의 조짐 같았다. 바기족이 이번 전투에서 기필코 이길 것이라는 확신이 섰다. 그러자 그리폰은 캄비라 바투에게 대답이라도 하는 듯이 맑은 소리를 길게 카랑카랑하게 뿜어냈다.

이 소리에 캄비라 바투는 주저 없이 공격을 명령했다.

"지금입니다!"

온 몸이 근질근질했던 바기족의 전사들은 낡은 망토를 벗어 던지고 일제히 앞으로 돌격했다. 뜨거운 태양빛이 바기족의 갑옷과 무기의 눈부신 금빛에 반사되었다. 궁수들은 그 휘황하고 강렬한 빛에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때문에 궁사들은 제대로 화살을 쏠 수도 없었고, 그야말로 무식할 정도로 눈에 불을 키며 달려드는 바기족의 전사들을 막을 도리도 없었다. 전사들은 괴물처럼 함성을 지르며 궁수에게로 달려들어 금을 입힌 도끼로 내려 찍었다. 모래처럼 쓰러지는 궁수들의 살점이 금빛에 반짝이며 선명한 피와 함께 튀어 올랐다.

바기족의 기습조는 이렇게 너무나 손쉽게 그것도 단번에 궁수들을 제압하였다.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후발대가 나설 필요도 없었다.

순식간에 전투가 끝나자 공중을 날던 그리폰이 캄비라 바투 가까이로 다가와 어깨를 쪼았다. 섬길 사람을 직접 선택하는 그리폰의 충성의 표시였다.

캄비라 바투는 말에서 그리폰으로 갈아탄 뒤 자덴의 입구까지 진군해갔다. 출정에 나선 지 일 주일만의 일이었다.

"아무래도 저들이 단단히 벼르고 온 것 같습니다. 준비도 상당합니다."

"금으로 떡칠을 한 바기족이라……. 누트 샤인은 바보가 아니지."

자덴의 성에서는 남문을 가로막고 서 있는 금빛 무리에 대한 회의가 한창이었다. 하지만 궁사들은 누트 샤인이 길을 떠났다는 것, 캄비라 바투가 바기족을 이끌고 있다는 것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

"금이 햇빛에 반사되어 궁수들의 시력에 무리가 오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차를 마시며 아이리스 비노쉬는 조용히 말했다.

"눈을 가리거라. 우리는 청각과 후각도 강하다. 저들의 냄새가 오히려 표지가 될 것이야."

"예. 알겠습니다. 그럼 먼저 공격을 시작할까요?"

"천천히 기다리도록 해. 급한 건 우리들이 아니라 저들이니까."

자덴의 성벽 앞 한 복판에 쥐 죽은 듯이 기다리고 서 있는 바기족을 향하여 활시위가 겨누어졌다. 그러나 화살은 날아오지 않았다.

캄비라 바투는 명궁 아이리스 비노쉬가 시간을 끌기 위해 수작을 부리는 것을 눈치 챘다. 전쟁이 늦어질수록 불리한 것은 바기족이었고, 캄비라 바투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캄비라 바투는 바기족의 전사들에게 외쳤다.

"증류수를 땅에 뿌리시오!"

바기족이 만든 추출액이 뿌려지자, 뙤약볕의 열기로 뜨끈하게 익은 땅에서 참기 힘든 고약한 냄새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눈을 감고 바기족의 체취를 좇던 궁사들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렇지 않아도 고약한 바기족 자체의 냄새에 더욱 자극적인 악취가 가해지자, 극도로 냄새에 예민한 궁사들의 코는 여지없이 혼란에 빠졌다. 어찔어찔하고 구역질 나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냄새였다.

지독한 악취를 참지 못한 몇몇 궁수들은 자기도 모르게 활시위를 잡아당겼다. 그러나 냄새로 집중력이 흐트러진 탓에 궁수들의 활의 위력은 상당히 감소되었고, 바기족은 손쉽게 화살을 피할 수 있었다. 결국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한 채, 궁수들이 먼저 공격을 시작한 꼴이 되었다.

이제 캄비라 바투가 자덴 성을 향하여 공격을 시작할 차례였다.

"바기족의 전사들이여! 드디어 우리는 오늘 이 자리에서 그간 숨어 지냈었던 지난날을 모두 털어버릴, 광명을 되찾을 것입니다! 자랑스러운 바기족의 전사들이. 그 어느 종족보다도, 우수한 종족이라는 사실이 지금 여기에서 증명될 것입니다!"

"우와와와와-!!!!!"

"나가자!"

"나가서 싸웁시다!"

"좋습니다! 바로 이 힘입니다! 오늘 이 시각부터 트리에스테의 모든 것들이 바기족 앞에 무릎을 꿇을 것입니다!"

캄비라 바투의 머리 위로 날개가 부러졌던 예의 그리폰이 원을 그리며 날아올랐다.

"자! 갑시다!"

"우와와와와-!!!!!"

캄비라 바투는 아버지 치아크라 쿠메르의 죽음을 떠올리면서 그 어느 때보다도 목청을 높여 우렁차게 외쳤다. 모든 바기족 전사들이 치욕스러웠던 지난날을 회상하며, 켜켜이 쌓아왔던 복수심을 불태우고 있었다.

'내 아버지의 원수와, 내 가족의 원수와, 바기족의 수모를 오늘! 여기에서! 모조리 갚아 주리라!'

바기족들 특유의 괴물 같은 함성이 자덴을 위협하면서 다가왔다.

"성벽을 지켜라!"

궁사들은 다시 활을 잡아들었다. 호흡을 가다듬고 화살을 날리려는 찰나, 캄비라 바투는 다시 외쳤다.

"기둥을 내리치시오!"

"우와-!"

캄비라 바투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뒤쪽에 있던 괴력의 소유자들이, 금으로 칠해진 나무 기둥을 한꺼번에 내리쳤다. 괴력이 나무 기둥에 고스란히 전해지면서, 그것이 땅을 내리치자 성벽이 흔들릴 정도의 진동이 발생했다. 그 위력으로 성벽에 서 있던 궁수들의 반이 우수수 땅으로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날쌘 바기족의 기습조가 앞으로 튀어나오면서 도끼로 벽돌을 찍으며 성벽을 타고 기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성벽 위에 남아 있던 궁사들이 정신 없이 밑으로 화살을 쏘아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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