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e - 지옥의 징조 - 4장. Volcano Chain. 불의 사슬
| 21.01.27 12:00 | 조회수: 836


바람 끝에서 예리한 통증이 느껴져 왔을 때, 가리온은 이유를 몰랐다. 흐린 구름만이 빠르게 지나가는 하이하프 산맥을 쭉 걸어와 이미 감각이 마비되어 가는 상태이기도 했고, 계속 이어진 눈보라 때문에 시야가 흐려졌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계의 괴물마저 견디지 못하는 하이하프의 추위에 힘이 빠져버려 입이 얼어붙은 가리온은 그저 앞으로 계속 나가야 된다는 생각만으로, 끝도 없는 설원을 통과해야만 한다는 그 의지 하나만 붙잡고 걸었다.

그래서 눈이 녹아 진흙이 되어 가리온의 다리에 달라붙었을 때도, 붉은 땅을 보았을 때도 설원을 벗어났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진흙과 붉은 땅….”

갑자기 몸에 붙은 얼음들이 갈라져 나가는 기분이었다. 한기는 여전했지만, 무언가 가벼워졌다. 무의식적인 반동으로 고개를 든 가리온은 한참을 멍하니 앞만 보았다.

“사람이다….”

가리온이 드디어 사람의 존재를 확인한 그 순간, 몸에 온기가 퍼지는 듯 했다. 그 온기는 단순히 사람의 자취를 찾을 수 없는 설원을 지나 사람을 보게 되었다는 그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비가….”

가리온은 손을 올려 비를 받았다. 처음에는 미지근한가 싶더니 점차 따뜻해졌다. 받은 물을 얼굴에 가져갔다. 찌릿하고 뜨거운 것이 닿았다. 오랜만에 부드럽게 얼굴을 문질렀다. 세포 하나가 간지럽게 살아났다. 몸을 적시는 물은 점점 뜨거워졌고, 빗줄기는 약해졌다.

부슬비가 안개처럼 뿌옇게 변해있을 즘에, 멀리서 보였던 사람이 걸어오고 있었다. 아니,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전투복을 입고 있었는데 가까이 오더니 부축해주었다. 수염이 덥수룩한 사내에게 가리온이 물었다.

“여기가 어디요?”

남자는 대답했다.

“불의 사슬.”

가리온은 마침내 하이하프 설원을 지난 것이었다. 이번에는 남자가 물었다.

“데카론 사람이오?”

가리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리온은 몸을 뒤척였다. 동상 때문에 가만히 있는 게 쉽지 않았다.

“으윽.”

“어어! 깼어”

가리온은 익숙한 목소리에 설마 하고 고개를 돌렸다.

“이렇게 또 만나는군.”

“룸바르트…!”

가리온은 너무도 놀랐다. 주위를 자세히 보니 에바를 제외한 일행 모두가 있었다.

“어떻게 모두 이곳에!”

“너를 쫓았지. 오히려 우리가 먼저 도착했지만.”

“이곳에 온지 꽤 되었습니다. 우리도 여기서 동상 치료를 받았죠.”

가리온은 어이가 없었다. 힘들게 혼자 떠나왔는데 다시 만나지다니.

“나를 모른 척 하고 그냥 떠나게.”

“그럴 순 없어.”

“그래요.”

“우리 모두 결심했습니다.”

룸바르트와 시리엘 아즈, 헤이치 페드론이 한꺼번에 말했다.

“이왕 여기까지 온 거, 끝까지 가야죠.”

파그노가 쑥스러워하며 말하자, 칸이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모두 좀 더 여행을 하고 싶습니다.”

잔바크 그레이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이 데카론이라는 모임에 바기족도 끌어들이고 싶네.”

캄비라 바투가 진지하게 말했다.

“그건 무슨 이야기인가?”

“세그날레처럼, 바기족도 데카론에 동참하겠다는 의미일세.”

“뭐라구?”

“이미 내 뜻을 편지에 적어 자덴과 헬리시타로 보냈네. 앞으로는 바기족의 전사도 데카론이 될 것이네.”

모두가 활기차게 말했지만, 가리온은 고개를 저었다.

“말도 안되네. 이건.”

“좀 어떠시오?”

가리온과 다시 만난 일행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누군가 천막으로 들어왔다.

“아. 오셨군요.”

헤이치 페드론은 벌떡 일어나 수염이 덥수룩한 사내를 맞이하고 가리온에게 소개를 시켜주었다. 가리온을 그 얼굴을 알고 있었다. 자신을 부축했던 사람이었다.

“여기 불의 사슬에 정착한 사람들의 대표입니다.”

“미하일이오.”

“가리온이오.”

“가리온님은 인카르의 청기사단장이십니다.”

잔바크 그레이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랬군요.”

가리온은 미하일에게 감사의 말을 전했다.

“추위에 많이 지쳐있었는데, 덕분에 살았소. 어떻게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아니, 별 일 아니었소. 다 데카론을 위해 모인 사람들인데 서로 돕는 게 당연한 거지.”

미하일은 털털한 사람 같았다. 얼굴은 더위에 찌들어 있었지만, 잔주름 늘어지게 웃는 모습은 상대방을 편하게 하는 마력이 있었다. 가리온은 몇 번이나 데카론의 복장을 한 사람들에게 기습을 받아 약간의 의심이 남아있었지만, 미하일은 좋은 사람처럼 보여 안심했다.

“그래,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이오?”

“모두 일어나면, 엘타로 갈 겁니다.”

타마라가 선수를 쳤다.

“아니. 어떻게?”

가리온은 놀랐지만 미하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태도였다.

“뭐, 더 머무르든 떠나든 그것은 당신들 마음이오. 간섭하지 않을 테니 편히 하시오.”

하지만 가리온은 걱정스러웠다.

다시 일행을 만나게 되었고, 그들은 가리온과 함께 엘타로 가려고 했다. 일행을 보게 된 것이 반갑기는 했지만, 가리온은 다시 홀로 비밀을 간직한 채 가슴을 졸여야 했다. 게다가 동상이라는 것은 생각보다 끈질긴 병이었다. 분명 불의 사슬에서 시간을 지체할 것이었다.

‘듀스 마블은 아버지를 데리고 얼마만큼이나 갔을까….’

가리온은 아무 것도 알 수가 없었다. 지금 있는 곳은 도시도 아니었고, 요드들이 순례를 도는 곳도 아니었다. 불의 사슬은 그야말로 고립된 곳이었다. 마음은 답답했지만 뾰족한 수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얼른 회복해서 이곳을 떠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한달 남짓, 가리온은 일어섰다. 가리온은 일행과 어떻게 다시 떨어질까 고민하며 출발 준비를 서둘렀다.

불의 사슬은 밤에도 환했다. 따로 횃불을 킬 필요가 없었다. 구석구석이 워낙 훤하게 잘 보이기 때문에 경비병도 따로 없었다. 물론, 불의 사슬에서 침입해올 적이란 것이 이계의 괴물들뿐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날 밤 미하일의 집을 누군가 불쑥 들어갔다.

“누구요?”

미하일은 침상 옆에 두었던 칼을 들고 가만히 앉았다. 밖의 빛이 스며들어와 방안은 붉으락 했지만, 밖보다는 어두웠다. 슬슬 바닥을 스치는 소리와 목소리가 들렸다.

“지령이 있소.”

“…!”

“델카도르 님이요.”

바닥을 스치는 소리가 더 가까워졌다. 회색 옷을 입은 사내가 미하일에게 봉투를 건넸다. 미하일은 편지를 받아 들었다. 편지를 받아 든 손이 약간 떨렸지만, 침착하게 봉투를 뜯어 읽었다. 편지를 읽을수록 미하일의 얼굴은 굳어져갔다.

“…. 가리온이?”

“그렇소. 가리온. 데카론의 청기사단 단장은 알로켄의 피를 가진 중간자요. 그가 제 2의 그랜드 폴을 일으키게 될 것이오.”

회색 옷을 입은 사내는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트리에스테 대륙을 지켜주시기 바라오.”

미하일은 일단 편지를 내려놓았다.

그는 지금껏 나름대로 소신이 있게 그리고 정직하게 살아왔다. 때문에 이곳에 도착해서도 침착하게 위기에 빠진 사람들을 구했고 마을을 꾸렸다. 게다가 이번에는 가리온의 일행도 구했다. 가리온은, 미하일에게는 일종의 기회였다. 그는 인카르 교단의 청기사단장이었고, 또한 불의 사슬을 넘어 엘타로 가려는 열정과 투지를 보여주었다. 이곳에 묶여버린 미하일에게 가리온은 훌륭한 자극이었다. 어차피 인카르의 명령을 받고 불의 사슬에 머물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언젠가 불의 사슬을 떠나리라고 마음 먹고 있었다. 몰려드는 사람들과 앞을 가로막은 괴물들 틈 사이에서, 자신이 가려 했던 길을 더 늦기 전에 다시 찾은 것 같아 미하일은 기뻤다. 그렇게 가리온 덕분에 다시 활발하게 활동할 마음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런 가리온이 사실은 불행을 일으킬, 지금 불행을 일으키고 있는 모든 것의 근원과 관련된, 재앙의 씨앗이라니.

“그를 제거하면 요드를 데리고 오겠소.”

요드. 요드가 있다면, 무사히 불의 사슬에서 다른 곳으로 탈출할 수 있을 것이다.

‘가리온을 죽이는 대가로, 요드를 얻어 이곳에서 나갈 수 있다!’

가리온은 역시 기회와 가능성이었다. 미하일은 잠시 침묵했다. 지금 자신의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길목에 서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덧붙여 가리온을 감싸든, 재앙의 씨앗을 제거하든 내일이 오늘과는 같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가리온은 어색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불의 사슬, 화염만이 존재하는 열악한 곳이었다. 그래도 이곳을 떠나는 것은 어쩐지 아쉬웠다. 세상과 달리 쓸데없는 의심이라던가, 경쟁심은 없었다. 진실하지 않으면 보지도 않을 것 같은, 미하일의 모습은 사실 부러웠다.

가리온에게는 없었다. 가리온은 진실 할 수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마음을 드러내려 노력해보았지만, 그 마음은 대부분 수포로 돌아갔다. 부모마저도 가리온의 사랑을 차갑게 거절했었다. 받아주지 않을 바에야, 속으로 품자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또한 지금 숨기고 있는 사실은 진실 할래야 진실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진실을 말하는 순간, 가리온에게 남는 것은 증오와 멸시, 미움뿐일 것이 뻔했다.

“가리온.”

“미하일!”

가리온은 미하일을 반갑게 맞았다.

“오늘이군.”

“그 동안 고마웠소.”

가리온은 진심으로 말했다. 미하일은 웃는 듯 했다.

“몇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다네.”

“…?”

“자네는 어째서 데카론의 길을 선택했는가?”

미하일의 깊은 눈은 진심으로 묻고 있었다. 가리온은 웃으며 대답했다.

“질문이 이상한데?”

미하일은 웃지 않고 말했다.

“자네도 나처럼, 카론과 싸우기 위해 데카론의 길을 가는가?”

가리온은 곰곰이 생각했다.

‘미하일도 나처럼, 이곳을 떠나려는 것 일까?’

가리온은 미하일이 이곳을 떠나게 될 경우, 앞으로 이곳이 어떻게 될지, 이곳까지 오게 될 데카론의 전사들은 어떻게 될 지 생각해 보았다.

“그럼. 하지만 우선 카론이 부활하지 않도록 해야지.”

가리온은 적당한 선에서, 그러나 진실한 마음으로 대답했다.

“…그런가?”

미하일은 더 묻지 않았다.

“준비하고 나오게.”

그리고 미하일은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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