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리온 일행은 경악부터 했다. 가리온을 포위한 데카론들 때문이 아니었다. 엘타에 나타난 델카도르의 모습에 놀란 것이었다.
“델카도르! 드디어 직접 나타났구나!”
“가리온.”
델카도르는 가리온을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가리온 또한 피하지 않고 델카도르와 맞섰다. 두 사람 사이를, 가리온의 일행과 데카론들 사이를 바닷 바람이 갈랐다.
“아이구. 태풍이 오려나. 전, 이만.”
가리온에게 배를 판 어부는 서둘러 자리를 떴다. 바다의 해적들이 자주 오는 엘타. 트리에스테 대륙의 범죄자들이 모이는 엘타에서 이런 광경은 흔했다. 그래서 재빨리 몸을 피한 것이었다.
“가리온. 언제 요드까지….”
델카도르는 조급하게 공격하지 않았다. 요드가 있는 곳에서 싸우면, 필시 비나엘르 파라이의 귀에도 들어갈 것이었다. 델카도르는 비나엘르 파라이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자신은 로아 성의 집정관에 불과했다. 비나엘르 파라이가 가리온의 뒤를 봐주는 것이 확실했기에,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우리는 얼마나 있지?”
델카도르는 가리온 일행인 열 두 명의 얼굴을 꼼꼼히 살피며 옆에 있던 기사에게 물었다.
“열 두 명은 간단히 해치울 수 있습니다.”
“아니야. 저 열 둘은 상징의 숫자야.”
“네?”
델카도르는 더 말하지 않고 다시 물었다.
“우리가 얼마나 있지?”
“에…”
기사는 뒤돌아 데카론들의 머리를 세어 보았다. 델카도르는 트리에스테 대륙에서 명망이 있는데다가 잠재 세력을 키워왔지만, 엘타에서의 사정은 조금 달랐다. 어부들은 엘타에서의 삶에 만족했기에, 인카르 교단의 일에 비협조적이었다. 그들을 제외하면 대부분 뜨내기들이었다. 그들이 얼마나 참여해줄지는 미지수였다. 설사, 참여했다 하더라도 중간에 불리하다 싶으면 도망가 버리면 그만이었다.
“이미 세 번이나 실패했어.”
델카도르는 근심했다. 가리온이 엘타에서 또 어디로 움직일지도 알기 어려웠고, 남쪽으로 내려가게 되면 델카도르가 힘을 뻗기 힘들었다. 이런 식의 뒤치기를 계속하는 것도 불가능해질 것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직접 엘타까지 쫓아 온 것이었다.
“서른 명이 조금 넘습니다.”
델카도르는 휙 뒤돌아 보았다.
“서른 명은 넘을 것 같은데?”
항구에는 수백은 될 것 같은 데카론들이 운집해 있었다.
“나머지는 구경꾼들입니다. 저들은 상황을 봐서, 아마 유리한 쪽으로 붙을 겁니다. 처음에 숫자로 밀어붙이면 될 것 같습니다.”
“어려워…. 그 정도로는.”
“하지만, 저 쪽에 요드가 있어서…. 델카도르님을 따르지만, 비나엘르 파라이를 두려워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역시. 그런가….”
델카도르는 눈살을 찌푸렸다. 요드 루이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을 눈치챘는지 빙긋 웃었다.
“저 쪽이, 먼저 공격을 하도록 유도할까요?”
기사가 물었다.
“아니. 그것도 좋지 않네. 심리전을 펼치는 게 좋겠어.”
델카도르는 가리온을 보며 대답했다.
가리온은 델카도르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델카도르는 가리온이 알로켄, 아니 칼리지오 밧슈의 후손이며 카론을 부활시킬 수 있는 중간자라는 것을 알고 죽이려 들었다. 그 사실을 이 자리에서 폭로하지 않으리란 법이 없었다. 아니, 그 사실을 폭로하는 것이 델카도르에게 가장 유리한 방법이었다.
가리온에게는 치명적인 일이었다. 당장 옆에 있는 동료들까지 적으로 변할 수도 있었다. 가리온은 신중하고도 신속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적어도 에바와 타마라, 그리고 요드 루이는 가리온을 적으로 돌리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이미 가리온의 운명이 어떠한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뒤에는 가리온이 구해 둔 배가 있었다.
‘여차하면 배를 타고!’
하지만 가리온은 배를 띄울 시간을 벌 수 있을 지가 걱정이었다.
‘일단은 싸워서 소동을 만들어야 해!’
약은 수법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앞에는 델카도르가 있었고, 뒤에는 바다였다. 앞뒤가 막혔지만 가리온은 바라트로 가야 했다. 룸바르트가 말했던 소문에 대해서도 확인하고 싶었다. 가리온은 여기까지 같이 온 동료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미안한 마음을 사죄했다.
사실 불의 사슬에서 가리온의 신분이 드러날 뻔 했을 때,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자신을 배려하는, 믿어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일이었다. 지금껏 스스로의 힘으로 서는 것만 열중했던 가리온은, 누군가가 자신을 이해해주거나 같은 편이 되어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일행들은 가리온을 믿어주었고, 가리온을 위해서 검을 들었고, 가리온을 보호해 주었다. 그것은 가리온이 난생 처음으로 경험한 것이었다. 누군가에게 소중해지는 것, 그런 것이었다. 온 사방이 적으로만 가득 찬 것만 같았는데, 그 두려움이 말끔히 사라졌다. 그리고 나서야 가리온은 그들이 진정한 동료였음을, 우정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가리온은 이제 그들을 뒤로 하고, 약은 수법으로 혼자 탈출하려 했다. 가리온은 갑자기 더욱 고독해지는 기분이었다. 그 때 델카도르가 가리온을 불렀다.
“가리온.”
가리온은 델카도르에게 대답하기 전에 요드를 향해 눈짓을 했다. 요드는 싸우지 않았다.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들의 규칙이 그러했다. 그들은 선행만을 하는 존재였다. 때문에 가리온은 배의 출항 준비를 요드에게 부탁한 것이었다. 루이는 가리온의 의도를 금방 눈치챘지만, 섣불리 움직이지는 않았다. 영리한 델카도르가 방해하려 할 수도 있었다.
“가리온.”
델카도르는 가리온이 대답하지 않자 다시 한 번 불렀다. 항구는 조용해졌다. 사람들은 델카도르와 같이 가리온의 대답을 기다렸다. 가리온은 일행들과 한번씩 눈인사를 하고 델카도르에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나와 이야기하는 것이 두려운가?”
‘역시!’
가리온은 델카도르가 알로켄, 중간자에 대해 폭로할 것임을 확신했다.
“그래. 두렵겠지? 나라도 두려울 거야.”
델카도르는 가리온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말을 이었다. 사람들은 델카도르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것인지 궁금해 하기 시작했다.
“나는 가리온을 쫓아 여기까지 왔소. 복수의 빙곡, 크레스포, 불의 사슬. 이름만 들어도 무시무시한 곳에서 계속 가리온을 죽이려 했지.”
“맞아! 그랬어! 게다가 당신은 우리를 아발론까지 보내려 했지! 어째서 우리를 계속 위험에 몰아 넣는 거지? 우리도 데카론이란 말이다!”
파그노는 델카도르를 향해 소리쳤다. 그러나 델카도르는 피식 웃을 뿐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뭣이!”
파그노는 금방이라도 튀어나갈 태세였다. 가리온은 그런 파그노를 말리지 않았다.
“나갑시다! 저까짓 것들! 금방 해치울 수 있습니다!”
“그럽시다! 저 늙은이, 하는 말은 많아도 다 되지도 않을 말들입니다! 그 동안 우리를 괴롭힌 것을 후회하게 해줍시다!”
잔바크 그레이도 동조했다. 두 사람이 나가 싸운다면, 분명 칸도 뒤따를 것이었다. 세 명이라면 소동을 일으킬 시발점으로는 충분한 것 같았다. “자네들에게 맡기겠네.”
가리온은 짤막하게 말했다.
“갑시다!”
가리온의 예상대로 파그노와 잔바크 그레이가 앞으로 뛰어 나가자 칸도 뒤따랐다.
“가리온. 눈치챘군. 그러나 고삐는 내가 잡고 있다!”
델카도르는 뛰쳐나오는 세 명을 잠시 보았다가 가리온을 향해 다시 눈길을 돌렸다.
“어쩔까요?”
델카도르의 옆에 있던 기사가 물었다.
“일단 방패로 적당히 막게.”
“겨우 세 명인데요?”
“큰 싸움을 일으킬 수도 있어.”
“하지만….”
델카도르는 기사가 말할 틈을 주지 않고 크게 외쳤다.
“이 중에 알로켄이 있다!”
자리에 있던 모두가 놀라 입을 쩍 벌렸다. 파그노와 잔바크 그레이, 칸이 싸움을 시도했지만 모두의 관심은 델카도르의 입으로 쏠렸다.
“알로켄?”
“알로켄이라면! 카론을 불러낸?”
“그래! 그랜드 폴을 일으켰던 그 신족!”
“누구야? 누구? 그게 누구야?”
“저기, 저 열 두 명 중에 있는 거야?”
사람들은 웅성거렸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이 델카도르는 아무나 죽이려 드는 파렴치한은 아닙니다! 자! 여러분! 알로켄족이 다시 활개를 치고 다니면, 여기 트리에스테 대륙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람들은 차마 대답을 하지 못했다. 델카도르가 대신 말했다.
“그랜드 폴! 제 2의 그랜드 폴이 일어납니다!”
‘델카도르!’
가리온은 몸을 떨었다. 그래서 뒤로 루이가 다가 왔는지도 몰랐다.
“준비가 되었습니다.”
루이는 살며시 가리온의 귀에 속삭였다. 가리온이 뒤를 돌아보자, 배가 가리온을 기다리듯 좌우로 출렁이고 있었다.
‘어서 피해야 해!’
“그랜드 폴을 일으킬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기! 제가 계속 쫓아 온 가리온! 인카르 교단의 청기사 단장 가리온! 그가 알로켄입니다!”
눈동자들이 일시에 모조리 가리온에게 쏠렸다.
“정확히는 중간자! 알로켄과 인간의 중간자! 저 자는 카론을 불러낼 수 있습니다!”
델카도르는 계속 외쳤다. 가리온이 중간자이며 카론을 불러낼 수 있다는 사실은 사람들에게 혼란을 가져 올 수 있었다. 그러나 다른 방법이 없었다. 카론을 부활시킬 실마리를 없애는 것이 제일 중요했다.
“이제 모두가 우리 편이다!”
델카도르의 말대로, 모두가 가리온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저 놈이 악마였군.”
“저 자를 죽이면, 이계의 생명체들도 들끓지 않겠지?”
가리온은 당황스러워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앞으로 나가서 싸우던 파그노와 잔바크 그레이, 칸도 가리온을 향해 몸을 돌렸다. 가리온은 누구와도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가리온. 무슨 소리야?”
“지금 우리가 무슨 소리를 들은 거지?”
“정말이에요?”
주위에서 질문들이 쏟아졌지만, 가리온은 제대로 들리지가 않았다. 가리온을 향해 다가오는 일행들이 두려울 뿐이었다.
“악마의 자식!”
“잡아 죽여라! 저 놈 때문에 내 딸이 죽었어!”
사람들은 가리온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가리온을 향해 화살이 빗발쳤다. 델카도르의 군대는 이제 서른 명이 아니었다. 구경을 하던 수백의 데카론들이 가리온을 죽이려 달려들고 있었다. 가리온의 일행은 잠시 질문을 멈추고 점점 벌떼처럼 달려드는 데카론들을 막느라 정신이 없었다. 가리온은 그런 일행들의 뒷모습을 멍하니 보았다. 진실을 알게 되는 순간 자신을 적으로 돌릴 줄 알았던 일행들이 가리온을 위해 또 한번 싸우고 있었다.
“나…. 나는….”
순간, 가리온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정신차려!”
“타마라!”
타마라가 가리온의 볼을 세게 올려 친 것이다.
“여기서 무너지면 안돼!”
“타마라?”
타마라는 가리온을 잡아 끌었다. 타마라는 가리온이 배를 준비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가! 싸울 자신이 없으면! 도망치기라도 해!”
“도망친다!”
“잡아라! 죽여라!”
뒤에서 가리온을 향해 우르르 몰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안돼!”
타마라의 손을 뿌리치며 가리온은 우뚝 멈추었다.
“가리온?”
“모두를 저 배에 태워.”
가리온은 타마라를 향해 말하고는 다시 뒤 돌았다.
“내 사람들을 지키겠다.”
가리온은 달렸다. 손에는 어느 새 알로켄의 표식인, 하얀 검이 솟아나왔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그 검으로 동료들을 지킬 수 있기만을 기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