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e - 지옥의 징조 - 9장. Wuthering. 폭풍
| 21.01.27 12:00 | 조회수: 995


바다 하늘이 갑자기 변했다. 흐리다 못해 검게 내려 앉았다. 검은 물결이 삼킬 듯 넘실거렸다. 데카론 사람들은 이계의 힘이라고 겁에 질렸고, 엘타 사람들은 론도우를 성나게 했다며 악을 질렀다. 바다는 얼굴색을 검게 바꾼 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는지 바람을 치기 시작했다. 바람은 점점 더 거세져 사람 하나는 가뿐히 날릴 듯 했다. 데카론들이 가리온을 향해 날린 마법과 화살들은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되돌아갔다. 데카론들은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어떤 배는 돛대가 바람에 꺾였다. 어부들은 배를 보며 발을 동동 굴렀지만, 어쩔 수 없었다. 바다에 묶이지 않는 모든 것들이 해변가의 사람들을 위협했다.

“거봐. 내가 태풍이 올 날씨라고 했잖아. 이건 태풍 정도가 아니라, 아주 폭풍이야. 폭풍!”

태풍이 쏟아지자 눈을 제대로 뜰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가리온을 죽이기 위해 로아에서 쫓아 온 델카도르는 사람들을 더 동요시킬 수가 없었다. 가리온이 알로켄이라고, 제 2의 그랜드 폴을 몰고 올 수 있다고 했지만 그것은 이야기일 뿐 현실이 아니었다. 당장은 가리온을 죽이는 것 보다, 태풍을 피해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 각자에게 더 중요했다. 그렇게 바람이 가리온을 돕고 있었다.

가리온은 바람을 타고 사람들 사이로 뛰어 들었다. 가리온의 검으로 베어내지 못할 것이 없었다. 가리온의 검 솜씨도 훌륭했지만, 칼리지오 밧슈의 후손이며 알로켄의 상징인 두 번째 검을 보고 사람들이 슬슬 피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두려웠다. 가리온을 죽이려 덤비자 기다렸다는 듯이 하늘이 어두워졌고 폭풍이 몰아쳤졌다.

가리온은 한 명 한 명, 차례 차례 도왔다. 지금까지 해오던 모습 그대로였다. 가리온은 그것이 기분 좋았다. 다를 것 없는, 괴물을 죽고 베는 과정 속에서 지금 친구들을 만나게 되었으니, 좋지 않을 리가 없었다. 새로울 것 없는 전투처럼 느껴졌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새로웠다. 신비로웠다. 진심으로 가리온은 일행을 위해 검을 휘둘렀다. 헬리시타를 떠난 이후, 아니 생전 처음이었다.

그러나 가리온이 이렇게 감격스러워하고 있을 때, 일행들의 기분은 달랐다. 그들은 지금껏 자랑스러웠던 가리온이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예전 같으면 그저 고마워했을 테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하나도 고맙지 않았다. 오히려 전혀 낯설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떨떠름했다. 사실 일행들은 가리온에게 속아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지금도 특별히 가리온을 도울 생각은 없었다. 몸이 익었기 때문에, 적이 밀려오니까 싸우고 있는 것이었다.

"먼저 저리로."

헤이치 페드론과 시리엘 아즈에게 한 말이었다. 타마라는 가리온이 말 한대로 했다. 얌전히 따랐다.

"에?"

"이건! 배!"

낡을대로 낡은 배 앞에서 헤이치 페드론과 시리엘 아즈는 잠시 서로 마주보았다. 뒤에서 가리온이 싸우고 있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만 탈출하나요?"

시리엘이 물었다.

“이 배는 가리온이 구한 거예요. 가리온은 일행들을 모두 태워달라고 했어요.”

타마라는 솔직하게 이야기 했다. 가리온의 저런 모습은 타마라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냉정한 타마라였지만, 어쩐지 가리온의 행동은 가슴을 따뜻하게 만들었다.

“….”

타마라의 말에, 두 사람은 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두 사람 모두 망설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가리온은….”

타마라는 불쾌했다. 가리온은 진심으로 일행을 지키고자 싸우고 있었다. ‘인간들이란!’

“내가 먼저 타야겠소.”

“캄비라 바투!”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어깨에 쿠리오를 엎고 있었다. 격렬하게 싸우다가 쿠리오가 부상을 입은 모양이었다. 타마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내주었다.

“당신들은 망설이는 모양인데. 저 사람이 당신들과 달라서 괴롭혔소? 내가 보기에, 가리온은 아무도 해치지 않았소. 오히려 지금은 당신들을, 우리 일행을 구하기 위해 싸우고 있소.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기 위해 앞에 미끼로 나섰단 말이오. 그거면 충분하지 않소?”

캄비라 바투의 말에, 타마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캄비라 바투는 바기족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선입견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복수의 빙곡에서 눈이 멀어 내 사람들을 잃었소. 가리온이 알로켄이건 중간자이건 상관 없소. 나는 남은 내 사람이라도 지키겠소.”

그리고는 쿠리오를 내려 눕혔다. 쿠리오는 이곳 저곳 상처가 많았다.

“잠시 뒤에 치료를 도와드릴게요.”

타마라가 말하자, 캄비라 바투는 고개를 끄덕였다. 타마라는 무언가 더 말하려다 그냥 뛰어갔다. 그러나 다시 돌아왔을 때, 시리엘 아즈와 헤이치 페드론은 여전히 배에 오르지 못하고 있었다. 둘은 여전히 망설이고 있었다. 타마라가 데려온 잔바크 그레이와 파그노, 칸 역시 같은 문제로 고민하였다. 그러나 막상 이야기가 오가지는 않았다. 델카도르의 말이 너무도 충격적이기에 그 말을 그대로 믿어야 할지 고민하였지만 이미 복수의 빙곡에서부터 데카론들에게 쫓겨 다녔기 때문에 진실일 확률이 높았다. 또, 가리온이 중간자일 경우 다가올 위험에 대해서 확실히 알지 못하고 있었다. 여기까지 따라온 청기사 단장이, 사실은 불행의 씨앗이었다는 이야기는 일행의 머리 속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다들 머리가 모자란 거 아니에요?”

어색한 침묵을 타마라가 깼다.

“가리온은 당신들을 위해 저기서 싸우고 있어요!”

“우리는 그러라고 한 적 없네.”

헤이치 페드론이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며 말했다. 타마라는 혀를 찼다.

“좋아요. 탈 사람만 타세요!”

그리고 다시 가리온을 향해 갔다. 남아 있는 자들은, 가리온, 에바, 시에나, 룸바르트였다. 뒤를 돌아보니, 캄비라 바투와 쿠리오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이 풍랑 속에서 땅만 내려다보고 서 있었다. 한심하기 그지 없는 꼴이었다.

“흥. 이제 됐어. 지금으로도 충분해.”

그러나 남은 사람들은 그러지 못했다. 배가 준비된 것을 눈치챈 사람들이 공격해오기 시작한 것이다. 헤이치 페드론은 얼른 배 위로 올라탔다.

“시리엘! 어서!”

시리엘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헤이치 페드론의 손을 잡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했고, 잔바크 그레이와 파그노, 그리고 칸은 싸워야 했다.

“제길! 그냥 저 배를 타야겠어!”

“잔바크?”

칸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잔바크의 이름에 물음표를 달았다.

“그렇잖아! 우리는 이미 여기 모인 사람들의 적이 됐다고! 배를 타고 가지 않는다고 우리를 가만히 버려둘 것 같아?”

“잔바크의 말이 맞아! 배를 띄워서 가자! 그게 좋겠어!”

바람은 마침 더욱 거세지고 있었다. 배는 요동쳤고, 시간이 촉박했다. 잔바크 그레이와 파그노는 서로 눈짓을 했다. 파그노는 서둘러 등을 돌렸다. 배를 띄우려는 것이었다.

“…. 과연 옳은 일일까요?”

칸이 조심스레 잔바크 그레이에게 물었다. 잔바크 그레이는 사람들을 막느라 정신이 없으면서도 칸에게 대답해주었다.

“살아남는 게 옳은 거야.”

그리고 마음 속으로, 파그노가 빨리 배를 준비할 수 있기를 기도했다.

“자네, 뭐 하는 짓이야?”

“추는 올린 건가. 노를 저어야 하나?”

“뭐 하는 짓이냐고?”

캄비라 바투는 파그노를 다그쳤다. 아직 일행이 육지에 남아 있는데, 배를 점검하며 돌아다니는 파그노가 수상했다.

“좀 조용히 하시오! 나보다도 말이 많아! 보면 모르오? 살려고 이런다고!”

“지금 떠나는 건가? 하지만 아직 사람들이 다 타지 않았어!”

파그노는 잠시 조용하다가, 대꾸했다. 눈은 저 멀리, 알로켄의 힘으로 싸우는 가리온을 향해 있었다. 배가 심하게 요동을 쳐서 가리온의 얼굴이 보이다 사라졌다.

“그러니까, 지금 떠나려는 겁니다.”

“이런 식으로 도망치는 게 기사들인가?”

파그노의 뒤에 어느새 캄비라 바투가 도끼 날을 들고 서 있었다.

“한심하기 그지 없군.”

“당신은 몰라!”

“몰라? 무엇을, 몰라? 가리온은 독단적인 면이 있지만, 일행을 성실하게 지켜왔네. 혼자 떠나겠다는 그를 붙잡은 것은 우리였네. 왜 그랬지? 왜 우리가 가리온을 따라 온 것이지? 그 일을 모두 잊었나?”

“가리온…. 가리온…. 가리온님은! 악마의 자식이야! 불행을 가져올 거라고!”

“그래서? 두렵나? 고작 그 따위 용기로 세상을 구해보겠다고 설쳤던 것인가? 자네가 진정 기사라면 가리온을 따라서 트리에스테를 구하겠다고 했던 자신의 말을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

캄비라 바투는 도끼로 파그노를 구석으로 몰았다.

“나는. 기사란 그런 것이라고 알아왔네.”

“이, 이 바기족! 역시 바기족이라 그렇구나! 이계와 무슨 속셈이라도 짠 것이냐? 타마라도 그렇고! 그래. 너희들끼리 무슨 작당이라도 한 모양이지?”

파그노도 검을 들었다. 폭풍이 배의 유리를 때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타마라가 사람들을 모두 모았다고, 더 늦기 전에 출발하자고 말하는 사이에도 에바는 활 시위를 놓지 않았다.

‘하나라도 더!’

“지나치게 열심인 것 아니야?”

룸바르트는 에바를 살폈다. 에바의 표정은 거의 변하지 않고 있었다. 오로지 활을 쏠 뿐이었다. 자신과 같은 세지타 헌터 일지라도 상관없었다. 그저 죽일 뿐이었다. 그런 모습을 보며 룸바르트는 확신했다.

‘알고 있었어!’

틀림 없었다. 에바는 이미 가리온이 칼리지오 밧슈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냉정한 세지타 헌터라지만, 놀라운 진실이 밝혀진 상황에서도 침착하다는 것은 충격적인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밖에 되질 않았다.

‘그렇다면 저쪽도?’

룸바르트는 시에나 쪽을 보았다. 시에나는 역시 전혀 흔들리지 않고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물론 시에나는 평소에도 특유의 침착성으로 놀라는 법이 없었다. 그러나, 인카르의 전령이라면 알로켄을 저렇게 담담히 받아들여서는 안되었다. 인카르 교단의 궁극적인 목표는 트리에스테를 안정화하고, 카론으로부터 제 2의 그랜드 폴을 막는 것이다. 룸바르트는 시에나도 수상스러웠다. 그리고 세그날레, 타마라. 타마라는 분명히 알고 있을 것이었다. 그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었다.

‘갑자기 혼자 바보가 된 기분이군.’

룸바르트는 가리온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너무도 큰 비밀을 홀로 간직해 온 가리온이, 가리온의 비밀을 알고도 곁에 있어주는 시에나와 에바 그리고 타마라가 룸바르트에게는 너무도 대단해 보였다. 그리고, 슈마트라 초이, 그에 관해서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리온이 칼리지오 밧슈의 후손이라면, 가리온의 아버지인 슈마트라 초이, 룸바르트의 원수인 슈마트라 초이도 칼리지오 밧슈의 후손일 것이다.

‘그래서 듀스 마블은…?’

듀스 마블은 어인 일에서인지, 슈마트라 초이를 죽이려 안달했었다. 룸바르트는 이제야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듀스 마블은 슈마트라 초이가 제 2의 그랜드 폴을 일으킬까 두려웠던 것이다. 그리고. 슈마트라 초이가 왜 자신의 가족들을 죽였는지도 알았다.

‘듀스 마블은 슈마트라 초이의 약점을 이용했구나! 슈마트라 초이는 사실이 알려질까 두려웠어!’

“자네, 제노아에 가본 적이 있는가.”

룸바르트는 슈마트라 초이가 했던 말이 기억났다. 담담하면서도 후회스런 그 음성. 가리온과 겹쳐질 듯 했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가리온은 자신에 대한 비밀이 드러났지만, 슈마트라 초이처럼 도망치지 않았다. 그는 다시 돌아와 일행을 지키고 있었다. 슈마트라 초이와 달리 아직 젊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지도 몰랐지만, 룸바르트는 가리온이 보통 사람이 아님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룸바르트는 가리온에게 더욱 흥미가 생겼다. 그래서 타마라가 함께 배를 타자고 했을 때, 룸바르트는 한 마디 던지며 흔쾌히 동의 할 수 있었다.

“흥미롭군.”

그러나 결코 재미있는 일만은 아니었다. 모든 일행이, 타마라와 룸바르트에 이어 시에나, 에바, 그리고 가리온이 승선할 때까지 폭풍 속에서도 데카론들은 일행을 괴롭혔다. 근접전은 가리온과 룸바르트가 맡았고, 원거리는 시에나의 방어막이 막아냈다.

“모두 탔지?”

가리온의 물음에 타마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배를 출발시켜 보자!”

그렇게 외치고 가리온과 타마라는 선장실로 뛰어갔다.

“생각은 좋은데, 바람이 이렇게 불어서 어떻게 출항할 수 있지? 게다가 우리는 노를 저을 수 있는 인력도 없어. 이 배는 도대체 어떻게 굴려야 하지?”

룸바르트의 말에 시에나가 대답했다.

“제게 좋은 생각이 있어요.”

룸바르트는 놀라며 물었다.

“어떤 생각?”

“도와주실 수 있어요?”

룸바르트는 시에나의 갑작스런 제안에 놀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타마라는 키를 조정하기 위해 선장실로 향했다. 그러나 타마라는 선장실의 문을 열자마자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뭐 하는 짓이죠?”

미리 배에 타 있는 줄로만 알았던, 일행들. 잔바크 그레이와 칸, 그리고 캄비라 바투와 파그노가 서로 노려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캄비라 바투가 파그노 뒤에서 도끼로 위협하고 있었고, 잔바크 그레이와 칸은 캄비라 바투를 저지하려고 틈을 노렸다. 헤이피 체드론과 시리엘은 구석에서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타마라.”

캄비라 바투가 타마라를 불렀다.

“당신이 여기까지 온 것을 보니, 다 탔나 보군.”

“네.”

“그러면 얼른 배를 출발시키시오.”

“그럴 생각으로 여기 온 거예요. 그런데 지금 이 상황은 뭐죠?”

“그건 상관하지 말고 어서 배를 출발시키기나 하시오.”

타마라는 얼굴들을 살피다가 움직였다.

“가리온과 함께 갈 수는 없어!”

파그노는 절규하듯 외쳤다. 이 한마디로 타마라는 지금의 상황을 이해할 수가 있었다.

“그런 거였군.”

타마라는 인간들이 한심스러웠다. 그러나 웃었다. 이래서 인간인 것일 테다.

“함께 갈 수 없다니?”

가리온이었다. 파그노는 거의 죽을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

“우리는 알로켄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잔바크 그레이가 말했다. 지금껏 들었던 그 어떤 말보다도 냉정하게 들렸다.

“….”

가리온은 말을 잃었다.

“당신을 인정할 수 없습니다.”

잔바크 그레이는 가리온에게 판결을 내려 주는 것 같았다. 가리온은 불행의 씨앗이며, 누구와도 융화될 수 없는 화근임을 낙인 찍는 듯 했다.

“아시다시피, 제노아에서는.”

칸은 말꼬리를 흘렸다. 변명이었다. 가리온이 대신 말을 끝냈다.

“제노아에서는. 혈통이 가장 중요하지.”

더 말할 수는 없었다. 아버지 슈마트라 초이에게 지워졌던 족쇄가 가리온에게도 채워지는 순간이었다. 가리온은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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