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e - 지옥의 징조 - 13장. Twelve and Six . 12와 6
| 21.01.27 12:00 | 조회수: 851


“누트 샤인은 듀스 마블과 한 패야.”

가리온이 어디로 가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을 때, 캄비라 바투가 말했다. 시에나는 눈을 땅으로 감추었다. 시에나도 듀스 마블과 누트 샤인이 은밀히 거래하고 있던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바기족 1대 족장 누트 샤인은 듀스 마블과 계약을 맺어, 그의 연구를 도왔다.”

“연구를 도와?”

룸바르트의 질문에 캄비라 바투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린 바기족들을. 미로의 숲으로 보내서. 헬리시타로 빼돌렸지. 듀스 마블에게로 말이야.”

캄비라 바투는 잠시 후에 다시 말을 이었다.

“나의 동족이자, 친구이며, 후손인 그 어린 바기족들을. 듀스 마블이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생각으로는… 아마….”

차마 말을 잊지 못하는 캄비라 바투를 보며, 룸바르트는 짐작 할 수 있었다. 어린 바기족들은 소환술 연구를 위해 희생당하고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고통으로 죽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연구는, 역시 듀스 마블을 돕던 요쉬마 디아메키와 헤이치 페드론이 진행했을 것이다. 룸바르트는 선량한 헤이치 페드론의 성품을 떠올렸다.

‘헤이치 페드론….’

“그렇다면, 듀스 마블이 누트 샤인에게로 갈 수도 있다는 것인가?”

가리온에게는 듀스 마블과 누트 샤인의 관계보다 듀스 마블이 어디에 있는지, 슈마트라 초이가 어디에 있는지가 더 궁금한 일이었다.

“추측할 뿐이지.”

캄비라 바투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여기서 피톤 성까지는 얼마나 걸리지?"

“글쎄. 산맥을 타고, 이계의 적들과 싸우면서 가려면 꽤 걸리지 않을까 싶은데.”

룸바르트의 대답이었다.

“어떻게 되든, 바라트만큼 오래 걸리지는 않겠지.”

그래도 가리온은 망설였다. 피톤에서 일어난 일이 엘타까지 전해지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또 괜히 소문이 불거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바라트의 누트 샤인을 배제할 수도 없었다. 누트 샤인은 위험 인물이 확실했다. 캄비라 바투가 듀스 마블과 누트 샤인이 서로 협력한 이야기도 해주었다.

“더 빠르게 갈 수 있는 방법이 있어요.”

“…?”

“그리폰을 타고 가요.”

말을 마친 시에나는 요정의 호수 쪽을 돌아 보았다. 시에나는 되도록 일행이 빨리 이곳을 벗어나기를 바라고 있었다.

두 번째였다. 아레스 숲에서 크루어를 얻은 그 날, 가리온은 처음 그리폰을 탔다. 시에나의 그리폰을 타고 노라크 동굴로 갔다. 가리온은 조금 익숙해진 것 같은 그리폰의 갈기를 부드럽게 잡았다. 다시 타는 그리폰 위에서 맞는 세찬 바람은 역시 굉장했다. 가리온은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걱정하느라 바람을 즐길 수 없는 것이 아쉬웠다. 룸바르트는 가리온과 달리 그리폰이 처음이었다. 시에나는 룸바르트와 에바를 위해서 그리폰을 불러 주었다. 룸바르트가 소환술을 할 줄 안다는 이유만으로 그리폰을 맡았지만, 역시 그리폰의 갈기를 잡는 것은 영 어색했다. 뒤에 에바까지 태우니 더 떨렸다. 캄비라 바투는 자신의 그리폰에 쿠리오를 태웠다. 이렇게 세 개의 그리폰이 페니키의 하늘을 날아 올랐다. 요정의 호수는 금새 웅덩이처럼 작아 보였다.

“타마라는 어떻게, 잘 오겠지요?”

쿠리오가 캄비라 바투에게 물었다. 타마라는 그리폰에 타는 것을 꺼렸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폰은 헬리온의 상징. 이계에서 온 세그날레, 타마라와는 정 반대의 성향이었다.

“난 혼자 가겠어요. 피톤에서 만나요.”

타마라는 그렇게 말하고 먼저 북서쪽으로 출발했다.

“뭐, 보통 인간은 아니지 않은가. 세그날레니 무슨 수가 있겠지.”

캄비라 바투는 대강 대답하고 시에나의 그리폰과 속도를 맞추는데 노력했다. 쿠리오는 혼자 고개를 끄덕이며 고개를 돌렸다. 다리 아래 풀 숲은 그리폰의 빠른 속도 때문에 초록과 검정, 흙색이 번져 보였다. 멀리 서쪽은 자덴일 것이다.

‘… 자덴. 나의 고향.’

쿠리오는 고향이 어떻게 되었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그는 자덴의 경비병이었다. 바기족이 자덴을 함락하자, 바기족의 족장을 암살하려고 따라 나섰다. 그러나 바기족의 족장은 생각보다 지혜로웠고 용맹했다. 그는 쿠리오가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것을 알고도 받아들였다. 그 족장이 캄비라 바투였고, 쿠리오는 지금까지도 캄비라 바투를 따라다니고 있었다. ‘친구들은 잘 지내고 있을까? 자덴이 함락당하던 날. 그 날 이후로 보지 못했는데…. 아마 탈출했겠지? ….’

캄비라 바투를 믿어 따르고 있지만, 쿠리오는 친구들이 자덴을 탈출했기를 바랬다. 아무리 캄비라 바투가 좋은 바기족이라 하더라도 고향을 뺏은 자임은 달라지지 않았다.

“쿠리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쿠리오는 고함소리에 놀라 하던 생각을 멈추었다. 캄비라 바투였다.

“예?”

“꽉 잡아! 느슨하잖아!”

“네?”

“곧 하강할 거야!”

이 말에 밑을 제대로 내려다보니, 금모래가 눈이 부셨다.

“저곳은 마음에 드는군. 황금빛이라니! 우리 바기족을 상징하는 것 같지 않아?”

캄비라 바투가 너스레를 떨었다. 황금에 비유한 그 곳은 드라코 사막이었다. 드라코 사막 아래, 잿빛이 도는 곳이 보였다. 출발 전, 시에나가 말했던 것이 떠올랐다. 피톤 성은 드라코 사막을 가기 전, 우울한 기운이 가득한 곳이라고 했다.

“자. 이제 내려가보자!”

캄비라 바투는 잿빛이 가득해 음울한 곳으로 빠르게 하강했다. 시에나보다 먼저 착지하고 싶어서였다. 그 바람대로 캄비라 바투의 그리폰이 제일 먼저 착륙했다. 그 다음에는 시에나. 그리고 그리폰 조절이 서투른 룸바르트가 마지막으로 땅을 밟았다.

“오. 진정 빠른데?”

룸바르트는 땀이 흠뻑 젖은 손으로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며 말했다. 예상보다도 빠른 그리폰을 감당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그래도 유쾌한 경험이었다.

“서둘러 움직이자.”

시에나와 캄비라 바투가 그리폰을 보내고, 일행은 피톤 성을 향해 걸어갔다.

“뭐야? 황금성이잖아?”

캄비라 바투는 피톤성을 보며, 감탄을 지어내다가 다시 탄식했다.

“그런데 어째서 금빛 찬란하지 않지? 위에서 봤을 때도 그냥 잿빛이었어! 황금이 이렇게 바래버리다니! 그럴 수도 있는 건가?”

“저 친구. 금을 너무 좋아하는군.”

룸바르트가 한 마디하자, 쿠리오가 작게 속삭였다.

“황금을 이용해서 자덴을 얻었지요….”

“오호. 그렇군.”

“타마라는 왔을까요?”

시에나가 물었다.

“글쎄. 어딘가에서 나타나겠지. 아무래도 세그날레이니, 우리와는 다른 방법이 있을 거요.”

캄비라 바투가 친절하게 대답했다.

“잠깐만.”

가리온은 대화를 중지하며 일행을 멈춰 세웠다. 꽃봉오리를 그리는 피톤 성의 탑 아래는 마른 핏빛의 담이 쭉 이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많은 데카론들이 있었다. 그들은 누군가와 싸우고 있었다.

“저것들 많이 봤던 건데? 그렇지 시에나?”

룸바르트는 시에나를 흘겨 보았다.

“….”

시에나는 눈을 질끈 감으며 말했다.

“듀스 마블의 고문관들이에요.”

“역시! 소문이 맞는 것 같군.”

룸바르트는 이상하게 들떴다. 듀스 마블이 이곳에 있다는 것은, 슈마트라 초이도 있음을 의미했다. 룸바르트는 슈마트라 초이의 모습을 보고 싶었다.

“우리도 일단 저들과 싸워야 들어갈 수 있겠군.”

가리온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앞에는 고문관들이 단체로 있었다. 그들은 트리에스테 대륙의 성 곳곳, 지하에서 듀스 마블과 함께 탐욕스럽게 피를 갈취해 오던 이들이었다.

“조심해. 저들의 눈빛을 봐. 인간이 아니야.”

“그래. 딱 보아도. 사악하다는 것을 알아 차릴 수 있겠어.”

가리온의 일행은 피톤 성으로 진입하기 위해 싸우는 데카론들과 자연스럽게 섞였다. 모두들 자신의 전투에 임하고 있어서 가리온의 일행을 특별히 의식하는 사람도 없었다.

쿠리오는 캄비라 바투 옆에서 열심히 싸웠다. 전투에 열중하다가 바기족인 캄비라 바투를 보고 깜짝 놀라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아직 내 뜻이 전달되지 않았는가 보군.”

캄비라 바투는 바기족도 데카론에 참여시키길 원했고, 인카르 교단과 자덴에 뜻을 알렸다. 그러나 크레스포에서 이루어진 일이라 확실히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는 없었다. 인카르 교단에서 바기족을 거절할 수도 있었고, 자덴에서 뜻을 달리할 수도 있었다. 캄비라 바투가 3대 족장이기는 했지만, 그가 자덴을 비운지가 벌써 반년이 다 되고 있었다. 오래도록 자리를 비운 족장을 과연 지도자라 할 수 있을까. 쿠리오는 어쩐지 캄비라 바투가 걱정되었다.

“쿠리오!”

쿠리오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뜻밖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쿠리오! 쿠리오 맞지?”

목소리의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쿠리오는 눈이 커다래졌다.

“친구들!”

“쿠리오! 세상에! 여기서 이렇게 만나지다니!”

자덴성의 친구들이었다. 바기족이 자덴을 함락하던 날, 함께 싸우던 경비병 동료들이었다. 쿠리오는 그들과 다른 길을 선택했고, 자덴의 침략자 캄비라 바투와 함께 여행해 왔다.

“여기는 어떻게 온 거야?”

“그 동안 어떻게 지낸 거야?”

쿠리오는 한 동안 벙벙해서 대답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 듀…. 듀스 마블이.”

“그래? 너도 그래서 온 거야? 너도 데카론이구나!”

“우리도 듀스 마블이 여기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이리로 왔지!”

친구들은 매우 기뻐했다.

“너, 그런데 그 때. 우리가 잡혔을 때 말이야. 캄비라 바투를 데리고 헬리시타를 간다고 했었지?”

친구 중 하나가 정색을 하며 무기를 들이댔다. 경비병일 때와는 다른, 고급스러운 검이었다. 그는 데카론으로서 많은 이계의 적들을 죽이고, 그 대가로 좋은 무기를 얻은 영웅임이 틀림없었다. 쿠리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식은땀을 흘렸다.

“자식. 긴장하기는.”

친구는 무기를 거두고 쿠리오를 덥석 안았다.

“다시 만나 반갑다! 내 고향 친구! 자덴의 형제!”

“너희들은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야?”

쿠리오는 친구의 품을 빠져 나오며 물었다.

“뭐, 탈출했지.”

“쉽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자유만큼 좋은 게 없더군.”

친구들은 말하며 상처를 보여주었다. 얼굴과 팔에 긁힌 상처는 탈출하다 다친 상처였다. 쿠리오는 이들에게 소홀했던 자신을 원망했다.

“미안하네. 친구들.”

“뭐가 미안해. 이렇게 다시 만났으면 됐지.”

“그래. 여기서 영웅이 되어, 사람들을 모을 거야. 그래서 자덴으로 돌아가야지. 바기족으로부터 빼앗긴 우리 성을 되찾는 거야.”

쿠리오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잠시 후, 더 말할 수 없는 지경으로 빠져 버렸다.

“여기서 뭐하고 있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쿠리오는 끝없는 절벽으로 떨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친구들의 눈이 커다래지는 것을 보는 것도 힘든 일이었다. 쿠리오 뒤를 향하던 눈은 다시 쿠리오에게 와서 박혔다.

“너, 너 어떻게 된 거야.”

“쿠리오. 너. 저, 저 바기족과.”

쿠리오는 자신이 종이처럼 느껴졌다. 차라리 팔락여서 이 자리를 날아가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오호. 이 친구들. 그 때 자덴성의 경비병들이군.”

캄비라 바투는 허물어져 가는 쿠리오의 심정은 알지도 못하고 넉살 좋게 말했다. 쿠리오가 이 상황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 지 고민하고 있을 때, 친구는 다시 무기를 겨누었다.

“바기족을 따르는 거냐?”

그랬다. 쿠리오는 캄비라 바투를 따르고 있었다. 하지만 캄비라 바투는 그럴만한 사람이었다. 그는 신념이 확고했고,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를 친구들에게 할 수는 없었다. 캄비라 바투는 자덴의 침략자였다.

“당장 대답해. 널 죽이겠다.”

“여, 여. 살살하시지.”

두꺼운 손이 쿠리오를 향하던 검을 치웠다.

“쿠리오는 우리 친구네.”

“동료지. 그렇지?”

“네.”

“진짜 명예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기사들이 등장하셨군.”

캄비라 바투는 잔바크 그레이와 파그노, 칸을 쏘아 보았다. 눈을 돌려보니 헤이치 페드론과 시리엘도 있었다.

“무슨 일이냐?”

아이언 테라클은 멀리 말 위에서 물었다.

“저희의 동료입니다.”

잔바크 그레이는 쿠리오의 고향 친구를 뒤로 물러 서게 했다. 쿠리오는 얼떨결에 아이언 테라클에게 소개되었다.

“그렇지? 쿠리오?”

잔바크 그레이가 쿠리오를 회유하는 동안, 파그노는 고향 친구들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자네들! 저분이 누구신지 모르겠는가? 아이언 테라클님이시네! 제노아 출신이며, 운도 마조키에의 후예, 그리고 조디악이신 아이언 테라클님이네!”

캄비라 바투는 예전의 일행이 뻔뻔스럽게까지 보였다. 쿠리오를 데려가려는데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멈춰라! 그는 나의 사람이다!”

자덴의 경비병들은 캄비라 바투와 쿠리오를 번갈아 보았다.

“쿠리오! 자네 정말!”

“우리를 배신하고 바기족을 따랐던 건가?”

쿠리오는 뒤를 돌아볼 수가 없었다. 캄비라 바투를 향해 몸을 돌리는 순간, 그는 고향을 배신한 것이 되었다. 쿠리오에게 그럴 마음은 없었다. 처음 쿠리오는 캄비라 바투를 없애고, 고향을 되찾기 위해 따르는 척 했다. 날마다 칼날을 갈며 복수를 다짐했다. 자신은 고향을 위해 그를 따라다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캄비라 바투를 인정하게 되면, 자신은 고향을 저버린 배신자가 되는 것이었다. 원수를 따른 아첨꾼으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었다.

“….”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쿠리오는 그것을 억지로 참았다. 그리고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갔다. 캄비라 바투가 뒤에서 어떤 표정을 지을지 알 수 없었지만, 쿠리오는 뒤돌아 보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나약한지 깨달았다. 캄비라 바투의 발톱에 끼인 때만큼의 위인도 되지 못한다는 것 역시 깨달았다.

“그래. 쿠리오. 우리와 함께 가자.”

잔바크 그레이는 쿠리오를 호위하듯 아이언 테라클에게 데려갔다. 그는 기뻤다. 이제야 공평해졌다. 가리온이 여섯이 되었고, 자신도 여섯이 되었다. 그렇게 열 둘은 반으로 각각 갈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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