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e - 지옥의 징조 - Apocrypha. Companion. 길동무
| 21.01.27 12:00 | 조회수: 1,064


알로켄이 트리에스테 대륙을 다스리던 시절 운도 마조키에는 전쟁의 신으로 통했다. 그가 나서서 이기지 않은 때가 없었다. 드라코 사막의 용족과도, 인간들에게서 힘으로 대륙을 다스려야 할 때에도 그가 있기에 알로켄은 항상 승리했다. 혈통이 좋아서가 아니었다. 그는 알로켄에게 입양되어 자랐는데, 전쟁에서의 공적이 너무 뛰어나 알로켄의 지도자 12명 중에 하나가 될 수 있었다.

“상계로 진입해야 하오. 인간들은 곧 우리를 뛰어넘게 될 것이오.”

“같이 살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건가?”

“지금의 생활이 편리하기는 하지요.”

“불안을 견디기는 힘들 것이오.”

“칼리지오 밧슈.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운도 마조키에는 재목을 보는 안목이 좋았다. 칼리지오 밧슈를 현자로 만든 것이 바로 운도 마조키에였다. 자신이 그러했듯, 운도 마조키에는 실력이 있는 자라면 딱히 가리지 않았다.

“…. 알로켄을 위해서라면, 서두르는 것이 좋겠지. 그러나 트리에스테 대륙은 위험에 빠지게 될 것이야.”

“인간이란 영리한 종족이지. 쉽게 멸망하지는 않을 것이네.”

“….”

“자네도 준비하고 있는 게 있지 않은가.”

“하지만 그 준비만으로 부족할지도 모르네.”

“자네는 생명을 소중히 생각하지. 그래. 난 그래서 자네를 좋아해. 그러나 이것은 명심하게. 우리는 알로켄이야.”

사실 인간들은 운도 마조키에를 존경했다. 전쟁에서 결코 지지 않는 운도 마조키에는 영웅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가 인간의 영웅이 아니라, 알로켄의 영웅임을 잊고 있었다. 그랬다. 운도 마조키에는 신 중의 신이었으나, 알로켄에게 유리한 신이었다. 알로켄들이 그렇듯 운도 마조키에 역시 그랜드 폴을 찬성했다.

“….”

칼리지오 밧슈는 회당에 모인 알로켄들을 죽 둘러 보았다. 모두 인간들에게 칭송을 받는, 신들이었다.

“반대하는 것은 나뿐이오?”

“칼리지오 밧슈. 자네만 받아들이면 되네.”

그러나 칼리지오 밧슈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칼리지오 밧슈는 알로켄이었지만, 인간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썩은 내가 진동하던 뒷골목 허름한 집에서 홀로 살아가는 어머니를, 인간인 어머니를 멀리서 본 적이 있던 칼리지오 밧슈는 트리에스테 대륙을 버리고 갈 수가 없었다. 칼리지오 밧슈에게는 어머니가 살고 있는 이 땅이 곧 어머니의 품이었다.

“지금이야말로 자네의 힘이 절실히 필요한 때이네.”

운도 마조키에는 칼리지오 밧슈를 달랬다. 평소 마음이 잘 맞는 친구 사이였지만, 칼리지오 밧슈는 계속 고집을 부렸다.

“어머니를 본 적이 있습니다….”

“개인적인 일을 끌어들일 상황이 아니네.”

다른 알로켄이 듣기 거북한 듯, 기침을 했다. 칼리지오 밧슈는 고개를 저었다.

“폭동이 있을 수 있습니다. 게다가 인간들은 우리를 믿고 있습니다!”

날카로운 목소리가 울렸다.

“사실을 알게 된 후에도 과연 그럴까요?”

“….”

알로켄들은 혼란스러웠다. 가장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알로켄들은, 늘 진실을 추구했다. 그들이 추구한 진실이 오히려 자신들을 혼란에 빠뜨릴 것은 감지하지 못했다. 감당하기 힘든 진실 앞에서, 알로켄이 선택한 방법은 상계로의 탈출이었다.

“인간이란 믿을 수 없는 종족입니다. 그들이 가진 힘을 알게 되면, 우리의 존재는 연기처럼 사라지겠죠.”

“….”

칼리지오 밧슈는 수긍할 수도 부인할 수도 없었다. 운도 마조키에는 칼리지오 밧슈의 남색 눈동자에 호소했다. 칼리지오 밧슈는 이계를 열 수 있는 현자였다.

“다시 부탁하네. 자네의 힘이 필요하네.”

흔들리는 듯 보이던 칼리지오 밧슈는 운도 마조키에가 무안할 정도로 단칼에 대답했다. 지금만큼 칼리지오 밧슈가 냉정해 보인 때는 없었다.

“그럴 수는 없네.”

“도대체 왜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죽을 거야.”

자꾸 망설이는 칼리지오 밧슈의 행동을 운도 마조키에는 이해할 수 없었다. 운도 마조키에의 목소리는 싸늘하게 변했다.

“그러나 이대로 가면 자네와 나의 존재가 먼저 사라지겠지.”

“자네도 결국 어쩔 수 없군.”

칼리지오 밧슈는 운도 마조키에를 차갑게 보았다.

“그래도 인간들에게 존경 받아 좋았지?”

“말이 심하네!”

“인간들이 당할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게다가, 사람이자 알로켄인 내가 당하는 고통에 비해서도!”

다른 알로켄들이 괜히 헛기침을 했다. 운도 마조키에와 칼리지오 밧슈는 화를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곧 아기가 태어날 텐데. 괜찮겠는가?”

어쩔 수 없었다. 칼리지오 밧슈를 설득하려면 그가 가장 아끼는 것에 대해 들먹일 수 밖에.

“…!”

칼리지오 밧슈의 얼굴색이 파랗게 변했다.

“자네 밖에 없어. 잘 알고 있잖아. 이대로 트리에스테 대륙에 머물면, 자네의 아이도 무사하지 못해.”

“….”

칼리지오 밧슈는 11명의 알로켄들을 노려보았다. 분하지만 그들이 옳았다. 알로켄의 존재가 세상에서 사라질 때, 사랑하는 비나엘르 파라이도 사라질 것이고 자신도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사랑의 결실인 아이도.

“…. 나 혼자서는 할 수 없소.”

“그래요. 잘 알고 있다오. 어서 빨리 길동무를 찾아야지요.”

알로켄들은 칼리지오 밧슈를 보며 흡족한 표정으로 웃었다. 칼리지오 밧슈는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골몰히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러다가 칼리지오 밧슈의 바로 앞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난 자네를 의심하고 있네.”

“응?”

운도 마조키에는 별 생각 없이 물었지만, 칼리지오 밧슈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은 충격적이었다.

“또 다른 중간자.”

칼리지오 밧슈의 말투는 몹시 건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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