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cond - 두 번째의 힘 - 3장. Sign. 들릴 수 없는 목소리
| 20.12.23 12:00 | 조회수: 962


‘아무래도……. 닮지 않았어.’

시선을 다시 거두는 비나엘르 파라이에게 듀스 마블이 가까이 앉으며 말했다. 푸른 공단이 덧씌워져 있는 의자가 찌그러지면서 듀스 마블의 얼굴도 잔뜩 찌푸려졌다.

“이번에는 꽤 오래 계시는군요.”

비나엘르 파라이는 차를 내려 놓으며 듀스 마블을 뚫어지게 바라 보았다. 넓적하고 허여멀건 한 얼굴에서는 도저히 공통점을 찾을 수가 없었다. “네가 그런 말을 하니 이상하구나.”

“제가 뭘요?”

“하고 싶은 말이 있니?”

방해 받고 싶지 않았던 비나엘르 파라이가 성가시다는 듯이 말하자 듀스 마블은 경멸에 찬 목소리로 삐딱하게 대답했다. 듀스 마블의 정보력은 헬리시타의 누구보다도 빠르고 정확했다.

“지하 감옥에 갇혀 있는 살인마를 만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슈마트라 초이지.”

비나엘르 파라이는 놓았던 차를 다시 잡아 들었다. 듀스 마블이 그 일 때문에 여기까지 오리라는 것은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듀스 마블이 이렇게 신경질적이고 조급한 모습을 보인 것은 크레스포 원정에서 돌아와 조디악이 되고 난 후 처음이었다. 비나엘르 파라이는 쉽게 듀스 마블이 살인 사건과 관련되어 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네가 한 짓이니?”

듀스 마블은 과도하게 얼굴을 붉히며 외쳤다.

“무, 무슨 소립니까! 엄연한 증인이 있습니다! 거기 있는 모두가 살인 현장을 목격했지요! 아니, 어떻게 저를 범인으로 몰아세우실 수가 있습니까?“

“그 눈은 기사의 눈이었다.”

침착하고 조용한 비나엘르 파라이의 모습에 더욱 화가 난 듀스 마블은 기가 막힌다는 듯이 조소하며 말했다.

“기사라구요? 큭. 그 놈은 기껏해야 잔꾀나 조금 부릴 줄 아는 놈입니다. 그가 제노아 태생이라구요? 아니, 그것도 확실치 않습니다. 검기의 위력이 대단하다구요? 그건 더욱 아니올시다입니다. 그 놈은 하이하프 설원과 아레스 숲을 헤매던 도적꾼이란 말입니다!”

“뭐라고?”

비나엘르 파라이의 눈이 커졌다.

‘제노아 출신이 아니다?’

듀스 마블은 비나엘르 파라이가 반응을 보이자 신나서 계속 나불거렸다. “크크크. 저의 자비가 아니었다면 그 놈은 지금쯤 어딘가에서 구걸을 하거나, 노략질이나 하고 있었을 겁니다!”

듀스 마블의 작은 눈이 더욱 작아졌다.

“혹시 그 놈을 감싸시려는 겁니까? 두둔하시는 겁니까? 아니요! 그래서는 안됩니다! 트리에스테의 지도자는 그런 모습을 보이면 안됩니다!”

듀스 마블은 점점 더 소리를 높여갔다.

“그깟 요술 좀 부려서 검기가 있는 척 하는 사기꾼에게는, 실낱만큼의 동정이라도 주시면 안됩니다! 이젠 정신 좀 차리십시오! 인카르의 앞길이 비나엘르 파라이라는 이름 아래 걸려 있다는 걸 아셔야죠!”

듀스 마블은 지금껏 비나엘르 파라이에게 담아왔던 불만을 토해내며 윽박질렀다. 노라크 교도를 정벌한 슈마트라 초이가 당당히 헬리시타 거리에 입성했을 때부터 비나엘르 파라이의 눈에 새로운 그늘이 생겨난 것을 듀스 마블은 본능으로 느끼고 있었다. 비나엘르 파라이의 비위를 맞추는 것도 중요했지만, 자꾸만 인카르를 소원 시 하는 비나엘르 파라이를 다시 제자리로 돌려 놓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었다.

“슈마트라 초이가 요술을 한다고?”

비나엘르 파라이가 조심스럽게 묻자 듀스 마블은 코웃음 치며 말했다.

“그 자가 검기라고 내뿜는 하얀 빛은 한낱 눈속임일 뿐입니다. 아마 하얀 가루 같은 것을 뿜는 장치를 했을 테죠. 그런 천박한 자가 검기 따위를 뿜어낼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 자는 근본 자체부터 진실이라는 것은 일말도 없단 말씀입니다!”

사방이 온통 눈으로 뒤덮여 있었지만, 유독 파르카 신전에는 따뜻한 기운이 넘쳐 흘렀다. 하이하프 설원 한 중앙에 이렇게 따뜻한 신전이 있다는 것은 그 누구도 쉽게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 노라크 동굴을 지나 설원에 이를 때쯤이면 누구나 매서운 추위에 얼어버릴 정도였으니까.

때문에 크레스포에서 발생한 오염체들이 하이하프 설원을 지나 아레스 숲까지 내려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하지만 한 세기가 넘는 시간이 흐르면서 바기족과 마찬가지로 오염체가 가지고 있는 “내성”이라는 능력은 그 매서운 추위를 헤쳐, 사악한 힘을 가진 생물이 산 자의 피를 찾아 설원을 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 파르카 신전에도 이계의 기운이 조금씩 스며들고 있었다.

“어이, 에바! 어디 가는 거야? 검 좀 더 휘두르지 그래?”

“야. 야. 에바는 궁수야. 활도 좀 쏘아 줘야지. 그렇지? 에바! 그런데 오늘은 웬일로 화장까지 했냐?”

“왜, 있잖아. 며칠째 누워있는 약골. 크큭”

“설마 그 뭐, 기사라던가 그 사람 때문인가?”

“아직도 누워 있는 젊은이 말이지?”

“다들 그만해! 그런 거 아니란 말야!”

빨간 머리가 템페스트에 스쳐 흩날리면서 도톰한 입술을 앙다문 에바의 조그마한 얼굴이 드러났다. 아름다운 두 볼은 어느새 발그레해 있었다.

“야. 너무 놀리지 말라구. 에바도 시집은 가야 할 거 아냐?”

“근데 그 사람, 아직 깨어나지도 않았잖아.”

“뭐야. 에바 혼자 벌써부터 몸달아 하는 거야?”

“아아, 눈에 시린 밤만 외롭구나.”

“푸하하하”

병사들은 에바를 두고 웃어 제꼈다. 에바는 저들을 좀 말려보라고 클로비스를 쳐다봤지만 딴청을 부리며 동조하고 있었다. 자기 편이 없다는 걸 느꼈는지 에바는 몸을 돌려 신전 뒤편으로 무작정 걸어갔다. 에바의 성큼성큼 걸어가는 발자국에 짧게 자란 풀들이 사락사락 빠르게 밟혀 들어갔다. 목을 길게 뺀 병사들이 에바가 사라진 곳을 멀리 내다보며 연신 킬킬거렸다.

“어이. 에바! 삐진 거야?”

“에이. 설마 에바가 삐질라구. 저 녀석은 생긴 거만 여자지 속은 우리랑 똑같아. 안 그래?”

“크큭.”

“흥!”

에바는 샐룩해져서 입술을 마구 문질러댔다. 입술에 바른 것이 묻어나면서 그을린 손등이 분홍빛으로 번졌다.

“왜들 그러는 거야. 괜히.”

뒤를 샐쭉 돌아보니 병사들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에바는 고개를 바로 들어 신전을 응시했다.

저기 어디쯤에 노라크 동굴에서 데려 온 기사가 있을 것이었다. 아직 한번도 이야기해보지 못했지만 어쩐지 신경 쓰이는 사람이었다. 에바의 하늘색 눈은 신전을 향해 반짝거렸다.

“내가 왜 이럴까…….”

파르카 신전으로 옮겨진 후 가리온은 계속 일어나지 못했다. 가리온이 유일하게 한 일이라고는 누워서 뒤척이는 것뿐이었다. 상처들이 가득한 가리온의 몸은 땀이 비오 듯 쏟아졌고, 그런 와중에 며칠 째 되풀이되는 같은 꿈이 계속해서 가리온을 괴롭히고 있었다.

“이 반 쪽짜리 인간아!”

소리는 너무나 크게 울려서 가리온이 서 있는 땅까지 뒤흔들었다. 놀란 가리온은 몸을 웅크리고 귀를 틀어막았다. 고막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아니, 그 소리가 가리온 자신에게 하는 비난 같아 들을 수가 없었다.

귀를 막고 괴로워하는 가리온 앞에 돌연 은발의 여자가 나타났다. 얼굴은 자세히 보이지 않았지만 가리온은 그 사람이 몹시 슬퍼하며 울고 있다는 것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기다릴게.”

그 사람의 울음 소리에 따라 어느 새 가리온 주위로 풀, 모래 같은 것들이 회오리를 치며 빙빙 돌았다. 가리온의 갈색 머리칼도 회오리에 날리며 자꾸만 가리온의 얼굴을 때렸다. 회오리 가운데에는 검은 그림자가 팔과 다리를 벌리고 서 있었다.

“저 사람이 회오리를 일으키고 있는 건가.”

검은 그림자가 아버지 슈마트라 초이의 느낌이라는 것을 깨달은 그 순간 가리온도 그 회오리에 휩쓸려 마구 돌기 시작했다.

“으아아아-!”

휘익-.

갑자기 사방이 어두워지는 것 같더니 회오리가 사라졌다. 회오리와 함께 돌던 가리온은 어느 새 바르게 서 있었다. 하지만 곧 칼바람이 거세게 불기 시작했다. 사람의 기척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가리온은 거센 바람을 두 팔로 막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저 멀리, 초록을 띠는 것들이 먼지처럼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가리온은 멈추지 않고 앞으로 걸어 나갔다.

먼지들이 있는 곳까지 다가간 가리온은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 같았다. 먼지 때문에 제대로 숨을 쉬기가 힘이 들었다. 그래도 가리온은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숨이 막혀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보다는 무언가가 자신을 부르고 있다는 끌림이 더 강했다.

“으으.”

앞으로 걸어갈수록 바람은 점점 더 약해졌다. 멀리서 보았던 먼지들이 가리온 주위로 둥둥 떠다녔다. 가까이에서 본 초록 먼지는 꼭 민들레 씨처럼 가볍게 떠다니고 있었다. 그렇지만 가리온은 그것이 민들레 씨앗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가리온이 그것을 잡아 유심히 살펴보려고 하는 순간, 먼지 사이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진 녹색의 크고 둥그런 것이 땅에 박혀 있는 것이 보였다.

“나무?”

가리온은 다시 앞으로 걸어나갔다. 열 걸음도 채 남지 않은 거리에서 갑자기 주위가 밝아졌다. 멀리 있을 때는 몰랐지만, 구가 조금씩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가리온은 알 수 있었다. 그것은 꼭 무언가를 털어내려는 것처럼 보였다.

그 진동하는 것에 손가락을 대어 보려고 조금 더 다가가려는 순간, 가리온은 휘청거리며 바닥에 미끄러졌다.

“으윽!”

가리온은 엉덩이와 손을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힉!”

피범벅이 된 가리온의 발치에 빨간 피가 엉겨 있는 눈알 두 개가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그 눈알은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이리저리 굴러 다녔다. 가리온이 설마 하는 마음으로 두 손을 들여다 보았더니 시뻘건 피가 손바닥을 질척질척하게 감고 있었다. 돌아보니 사방이 피로 가득했다. 그제서야 가리온은 진동하는 피 냄새를 느낄 수 있었다.

“뭐……. 뭐야!”

가리온이 놀란 마음을 추스르기도 전에 휙 강풍이 불어오더니 느닷없이 사방에서 하얗고 긴 것들이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가리온의 눈 앞에는 어느 새 은발의 여자가 다시 나타났다. 여자는 양손에 하얗게 빛나는 검을 들고 있었다. 가리온이 있다는 것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는지 여자는 이상한 말을 뱉으며 앞으로 뛰어갔다.

순간 땅이 흔들리며 나무에서 큰 굉음이 울렸다. 가리온이 나무를 바라보자 땅을 굴러다니던 눈알이 공중으로 번쩍 튀어 올라 가리온을 주시했다. 가리온은 그 눈길을 피할 수 없었다.

“내게 와라!”

뻘건 눈은 점점 가리온의 갈색 눈과 가까워졌다.

“내게 와라!”

파르카 신전의 조용한 방 안에서 가리온의 누운 몸이 덜썩 들렸다.

“내게! 내게 와라!”

누워있던 가리온은 스르르 일어나 문 앞으로 걸어갔다. 초점이 가려진 가리온이 천천히 손잡이를 돌려 문을 열었다.

“두 번째 힘을 찾으러.”

에바의 발걸음은 신전의 정원을 지나 점점 가리온의 방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에바 자신도 그것을 눈치챘을 때는 꽤나 놀라고 말았다.

“내가 정말 왜 이러지. 휴.”

에바의 한숨 섞인 목소리가 조용한 신전에 울렸다.

에바는 머리 속에서 크루어의 기사를 지울 수가 없었다. 오히려 한발한발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그 기사에 대한 생각과 궁금증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하나씩 늘어나고만 있었다. 에바는 빨개진 얼굴을 푹 숙였다. “얼굴이라도 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

에바가 쿵쿵 뛰는 가슴을 느끼며 무심코 고개를 든 순간, 유령처럼 걸어가는 누군가가 보였다. 예리한 에바의 눈에 비친 그 사람은 에바의 가슴을 흔들고 있는 그 기사였다.

“아니, 저 사람은!”

에바는 놀라서 그 자리에 멈춰버렸다.

‘말, 말을 걸어야 해!’

에바는 하늘색 눈을 그대로 고정시키며 발걸음을 앞세웠다.

“이봐요! 일어난 거예요?”

기사는 듣지 못한 듯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안 들리는 건가? 언제 깨어난 거지?”

이상한 생각이 든 에바는 기사를 쫓아 가기 시작했고, 에바는 곧 그 기사가 향하는 곳이 어딘지 알 것 같았다. 기사가 향하는 방향은 단 한곳을 의미했다.

“그 쪽으로 가면 안돼요!”

가리온은 에바의 외침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계속 걷기만 할 뿐이었다.

“그곳은 금지구역이에요!”

에바는 긴 다리로 성큼성큼 쫓았지만 가리온을 붙들 수가 없었다. 가리온은 무서운 속도로 한 곳을 향해 가고 있었다. 에바는 점점 불안해졌다. 시커멓게 입을 벌리고 있는 입구가 바로 눈 앞까지 들이닥쳤다.

“머, 멈춰! 저긴 다크 홀이라구!”

에바는 얼른 가리온의 옷 덜미를 잡아 끌었다. 가리온은 약간 기우뚱하더니 멈추는 것 같았다. 하지만 두 사람의 발은 이미 다크 홀 안으로 들어선 후였다.

“아! 어떡해!”

쾅-.

다크 홀의 육중한 문이 닫히며 사방이 깜깜해졌다.

에바는 덜컥 겁이 났다. 벽마다 띄엄띄엄 횃불이 켜져 있었지만 그것이 오히려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도, 돌아가요.”

클로비스가 언젠가 이곳에 들어와서 살아나간 사람은 한 명도 없다고 한 이야기가 생각났다.

“하필이면 이럴 때. 우, 우리 여기서 나가야 해요. 여기는 금지된 곳이에요.”

가리온은 계속 앞으로 걸어나갈 뿐 대답 하지 않았다. 에바는 가리온의 옷을 더욱 꽉 쥐었다.

“여기서 더 가면 안돼! 돌아가야 해! 여기 있으면 죽는 단 말이야!”

에바는 가리온의 옷자락이라도 잡고 멈추려는 셈이었다. 허나 그런 것도 소용없었다. 가리온은 무의식의 힘으로 계속해서 발걸음을 앞으로 떼고 있었다. 참다 못한 에바는 가리온의 앞에 서서 두 팔을 벌리고 가로막았다.

“더 이상은 안돼! 이제 그만 돌아가!”

드디어 가리온이 입을 열었지만 에바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알로켄족의 언어였다.

“찾아야 해.”

가리온의 흐릿하고도 초점 없는 눈동자는 한치의 흔들림도 없었지만 무얼 응시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게 만들고 있었다.

“당신 누구야?”

에바가 당황하며 묻자 가리온은 에바를 확 밀쳐냈다.

“비켜라. 인간.”

“꺄아.”

에바는 저항할 새도 없이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템페스트 사이로 보이는 황금빛 살이 바닥에 긁히면서 살짝 피가 배어났다.

“나를 부르고 있어.”

가리온은 전혀 개의치 않은 듯 앞으로만 계속 나갔다.

에바는 가리온의 이름조차 모르고 있었지만, 가리온이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 가리온의 얼굴은 에바가 처음 보았던 기사의 얼굴이 아니었다.

나선형 길 끝에 다다르자 조금씩 흔들리는 불빛 사이로 길게 뻗은 길이 보였다.

“지금이라도 돌아가요. 늦지 않았어요.”

에바는 조심스레 가리온의 옷자락을 잡아 당겼지만 아무 소용도 없었다. 가리온은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나갈 뿐이었다.

“뭐, 뭐야 이건!”

에바는 소리를 지르며 펄쩍 펄쩍 뛰었다. 좁고 길게 늘어진 길 양 옆으로 시체 같은 것이 흐물흐물하게 떠 있었다. 그것들은 갑자기 두 눈을 부릅뜨고 에바에게 달려들 것만 같았다.

“제발 여기서 나가요!”

에바는 가리온을 세차게 흔들었다. 하지만, 에바가 그럴 필요도 없이 가리온이 곧 멈추었다. 아니 튕겨져 나갔다. 다리 끝 무렵이었다.

“뭐지?”

또 다시 알로켄어였다. 에바는 무슨 일인지 몰랐지만 이것이 기회다 싶었다.

“잘됐어. 어차피 들어가지도 못하잖아. 어서 여기서 나가요!”

에바는 가리온을 다짜고짜 끌었지만, 가리온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가리온을 튕겨낸 투명한 막이 부르르 떨리는 것 같더니 여자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대는 허락된 자인가.”

“이 목소리!”

에바는 반색과 불안을 합친 얼굴로 외쳤다. 에바에게 익숙한 데비나의 목소리였다. 그런데 그 목소리를 반기는 것은 에바 뿐만이 아니었다. 가리온의 진지한 표정이 한없이 부드러워지더니 두 목소리가 섞여 나왔다. 놀랍게도 그것은 인간의 언어였다.

“나는 이곳을 세운 존재다.”

듀스 마블의 신경질적인 말들을 귀로 흘리고 있던 비나엘르 파라이는 휙 고개를 돌려 일어섰다. 창 밖은 조용하기만 했지만, 분명히 들었다. 비나엘르 파라이는 분명하게 들었다. 그것은 너무나도 분명한 그의 목소리였다.

“나는 이곳을 세운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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