듀스 마블은 고압적인 자세를 버리지 않았다.
“도대체가 생각이 있으신 겁니까? 그런 파렴치한 살인마를 만나시다니요! 그것은 조디악으로서 해서는 안될 일입니다! 제발 처신 좀 잘하십시오!”
듀스 마블은 계속해서 비나엘르 파라이를 다그쳤지만, 더 이상 어떤 말도 비나엘르 파라이의 귀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비나엘르 파라이의 신경은 온통 창 밖으로 쏠려 있었다.
‘그 사람의 목소리. 그 사람의 목소리가 분명해. 설마!’
비나엘르 파라이는 쓰러질 듯 휘청거리며 옆에 놓여진 나무 의자를 짚었다. 갑작스레 놀란 호흡은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비나엘르 파라이님이 이러시니까, 제노아가 우리 헬리시타를 넘보는 것 아닙니까!”
“난 이만 돌아가야겠다. 머리가 어지럽구나.”
“흥, 아예 가서 차라리 나타나질 마십시오. 그게 오히려 인카르를 위하는 길이겠습니다!”
듀스 마블은 자신의 이야기가 효과를 본 것으로 생각하고 잘난 체하며 거드름을 피웠다.
“알았다. 알았으니 이제 그만 돌아가라. 더 얘기하고 싶지 않아.”
“지켜보겠습니다.”
듀스 마블은 만족한 표정으로 문을 나섰다.
‘흥, 이제는 돌아가 버리겠지.’
듀스 마블은 비나엘르 파라이가 여전히 자신에게 약하다고 생각했다. 이제 자신이 뜻하던 대로 사죄의식을 진행시킬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문을 나서는 그 순간, 듀스 마블에게는 새로운 의심이 떠올랐다.
‘가만, 왜 이렇게 일이 쉽게 되었지? 아니 비나엘르 파라이가 갑자기 왜 저러지?’
듀스 마블은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지만 무언가 수상쩍은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빨리 가야 해. 되도록 빨리. 가서 직접 내 눈으로.”
비나엘르 파라이는 당장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슈마트라 초이의 일도 중요했지만, 지금 들린 목소리는 비나엘르 파라이가 기다리고 또 기다린 그리움이었다. 모든 일은 그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지금껏 버텨온 것도 모두 그 사람 때문이었다. 비나엘르 파라이의 가슴이 가쁘게 고동쳤다.
잠시 막을 튕겨보던 가리온은 이어서 에바가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중얼거렸다. 기사의 말은 어떤 주술인지 어두웠던 다크 홀에 몇몇 개의 횃불이 더 드문드문 켜지는 것 같았다. 소름 끼치게 들리는 그 목소리는 두 개의 음색이었다.
“정……. 정상이 아냐.”
에바는 그 목소리에 떨며, 어떻게 이 상황을 극복해야 할지 궁리했다. 하지만 다크 홀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클로비스가 즐겨 부르던 노래 밖에 없었다.
에바가 파르카 신전에서 만난 사람들은 여러 지방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엘타 항구에서 온 사람도 있었고, 자덴의 반대편 카시미르 산맥의 동쪽에 있는 페니키에서 온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은 대부분 부족을 따르기보다는 서로 화합하여 살던 사람들로 인카르에 핍박 받아오던 작은 영지의 주민들이었다. 크레스포의 생존자도 있었다. 수많은 크레스포의 주민들이 인카르의 말 뿐인 지원에 존명을 달리하고 있었고 그나마 생명을 건진 사람들은 파르카에서 그 질긴 생명을 이어갔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섞여 있는 파르카 신전에서 신전의 주인을 대신해 관리하는 사람이 바로 클로비스였다. 하지만 파르카 신전의 사람 대부분이 클로비스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그냥 느낌이란 것은, 클로비스는 다른 작은 영지에서 온 사람들과 달리, 그 외모나 말투 같은 것이 평범한 사람의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었다. 때문에 파르카 신전의 사람들은 클로비스를 수비대의 대장이라기 보다는, 풍류만 좋아하다가 자신의 영토에서 쫓겨난 능력 없는 영주 정도로 여겼다. 그 때문에 생긴 별명이 “음유시인”이었다. 자칭 음유시인이기는 하지만 유치하면서도 별 볼일 없는 몽상가가 바로 파르카 신전의 클로비스였다.
그런 클로비스는 습관처럼 다크 홀에 관한 노래를 불렀다.
트리에스테 대륙이 있기도 전부터
예정되어 있던 운명적인 사랑
칼과 엘
트리에스테 대륙이 휘몰아치던 그 날
하늘이 결정지은 비극적 사랑
칼과 엘
트리에스테에서는 결코 함께 할 수 없는
안타까운 사랑에 관한 이야기
칼과 엘
하지만 언제나 사랑은 고귀한 것
엘은 남아 칼을 기다리네
엘은 남아 칼을 기다리네
그것이 다크 홀 그것이 다크 홀
파르카 신전에 숨겨져 있는 다크 홀
두 번째 힘을 감추어두고 기다린다네
엘이 기다린다네
…….
노래는 아직 남았지만 에바는 더 생각나지 않았다. 노래를 떠올려봤자 알아낼 만한 것도 없는 것 같았다.
‘역시 유치한 노래일 뿐인가.’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에바는 지금까지 어떠한 역경이 있더라도 이겨내 온 사람이었다. 흠 하나 잡을 곳 없는 아름다운 얼굴과 달리, 그녀가 지금까지 살아온 길은 너무나 굴곡진 것이었다. 고향 네오스를 떠날 때, 앞으로 어떠한 시련이 닥쳐와도 절대로 겁먹거나 흔들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그녀였다. 에바는 지금까지처럼 혼자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마음먹었다.
에바는 살짝 뒤돌아 보았다. 길을 찾는 척 하면서 다크 홀을 나가는 문을 찾으려는 생각이었지만 문 같은 것이 보이질 않았다. 영혼이 떠다니는 모습의 으스스한 다리 위로 높이 솟아 있는 나선형 길은 끝도 없이 올라갈 뿐이었다.
에바는 오감이 예민한 궁수였다. 그녀는 그것을 최대한 활용하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둑어둑한 다크 홀은 쉽게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냄새라도 맡아 방향을 찾아보려고 했지만, 어디서부터 흘러나오는지 알 수 없는 피비린내가 벽을 타고 슬슬 베어 나와 방향 감각을 잃게 만들고 있었다.
기사는 여전히 낮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두 사람을 가로막은 투명했던 막도 점차 하얗게 변하며 균열을 일으키고 있었다. 에바는 기사가 막을 무너뜨리기 전에 다크 홀에서 나가고 싶은 마음이 더 간절해졌다.
‘오감을 집중시키고 단서를 잡아야 해!’
누트 샤인의 몸은 더욱 허약해져 있었다. 이계의 오염으로 이미 변형되어 버렸지만, 그래도 역시 차원의 문에 가까이 가는 것은 무리였다. 누트 샤인은 작은 기침을 연신 삼켜대며 허름한 망토 자락을 움켜 잡았다. 노라크 교도들이 차원의 문을 열기 위해 감추어 왔던 봉인의 비밀은 누트 샤인이 회수했다. 모든 것은 고서에 적힌 그대로였다. 그렇게 누트 샤인은 봉인을 풀기 위한 해답에 점점 더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다.
이제 이계 오염의 근원지인 크레스포로 향하기 위해 누트 샤인은 다크 홀을 통과해야 했다. 사실 누트 샤인은 다크 홀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법으로 만들어진 공간이라 자칫 미로에 빠질 수 있었고 앞에 막이 있어 더 갈수도 없는 데다가, 아무래도 놈이 만들어 놓은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 때는 등에서 살기가 저절로 돋을 정도였다.
게다가 어딘가에서부터 으스스한 한기가 흘러나오는 것 같은 불길한 느낌에 차라리 이계의 생물이라도 나와주었으면 하는 바람마저 하고 있던 누트 샤인이었다.
그래도 역시 뒤에서 인기척이 났을 때는 저절로 촉수가 돋으며 긴장되는 것이었다. 누트 샤인은 누군가 뒤에서 자기가 있는 쪽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쉬 돌아보지 않았다. 우선은 작은 키를 이용해, 자신이 생명체가 아닌 것처럼 가장할 속셈이었다.
하지만 누트 샤인의 가장할 속셈을 무너뜨린 건, 갑작스레 뒤에서 울린 놈의 목소리였다.
“인간인가?”
“예?”
에바는 어리둥절해 했다. 이제 투명한 막은 툭 건드리기만 하면 터질 정도로 심하게 금이 가 있었다. 갑자기 멈춘 기사가 이상해 보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누트 샤인은 순간적으로 그 자리에서 굳어 버렸다.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었다. 자신의 운명이 한 순간에 뒤바뀌어버리던 그 날, 그 장소. 놈의 목소리가 틀림없었다.
‘마, 말도 안돼! 환청이겠지.’
누트 샤인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놈의 몸이 산산이 부서지는 것을 틀림없이 두 눈으로 본 누트 샤인이었다.
“나의 영지에 들어온 너는 누구인가.”
또 다시 목소리가 조용한 다크 홀에 울려 퍼졌다. 누트 샤인은 고개를 더욱 세차게 흔들며 절박한 심정으로 아닐 거라고 중얼거렸다.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누트 샤인은 저절로 돌아가는 고개를 멈출 수가 없었다. “헛.”
고개를 돌린 누트 샤인은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노라크 동굴에서 죽었어야 할 인카르의 기사가 또다시 눈앞에 서 있었다. 그 옆에 어린 마법사가 아닌, 탄탄한 몸매의 아름다운 에바가 서 있었다.
“또 네 놈이냐?”
누트 샤인은 천천히 돌아섰다. 어느새 입가에는 기막힌 미소가 떠올랐다. 놈이 아니라, 애송이 기사라면 겁낼 것도 없었다.
“크크크. 놈의 핏줄이 확실하긴 한가 보구나. 이 누트 샤인까지 감쪽같이 속일 정도야. 크크크. 질긴 놈. 하지만 어차피 너는 반 쪽짜리 인간에 불과해! 이젠 정말 없어져라!”
누트 샤인은 헤지고 축축해진 망토를 끌며 천천히 가리온에게로 다가갔다. 에바는 작은 괴물 같은 것이 다가오자 당황하며 활 사위를 잡아 들었다.
“다가오지마!”
누트 샤인의 커다란 눈이 비웃음을 흘렸다.
“어리석은 것. 잠자코 있어라.”
에바는 찔끔 놀랐지만, 이에 기죽을 사람이 아니었다.
“더 다가오면 활을 쏘겠다!”
“날 귀찮게 하지 마라.”
“정말 쏘겠다!”
“어떻게 인간들은 이렇게 한결같이 멍청한 것인가. 왜 자기 분수도 모르는 것이냐. 어리석은 인간들!”
누트 샤인은 에바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이 혀를 끌끌 차며 계속 걸어왔다. 누트 샤인은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었다.
“이제는 끝장을 내주마!”
에바는 조그마한 것이 슬슬 다가오자 소름이 끼쳤다. 하지만 어찌해야 할 지 알 수가 없었다.
작은 생물체는 가리온을 향해서 걸어 오고 있었지만, 가리온은 전혀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아니, 초점을 전혀 알 수 없어 제대로 보고 있는지도 몰랐다.
‘뭐야, 이 상황에서! 일단 저것부터 막자. 저게 무엇이든!’
마음이 조급해진 에바는 살기를 진하게 풍기는 누트 샤인을 향해 화살을 쏘았다.
에바의 감은 두 눈이 파르르 떨리면서 화살은 정확히 누트 샤인에게로 향했다. 분노로 가득 찬 누트 샤인은 미처 화살을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화살이 가슴팍에 꽂히는 듯했지만 화살은 그대로 툭 튕겨 나왔다. 누트 샤인의 부리부리한 눈이 확 뜨이며 에바에게로 쏠렸다.
“이게 뭐야?”
“설마. 빗나가지 않았는데.”
에바가 이상하게 생각하며 다시 활을 잡는 순간, 누트 샤인의 망토 사이로 낡은 책 하나가 툭 떨어졌다. 깜짝 놀란 누트 샤인이 품 안에 고이 간직해 온 고서를 얼른 집어 들려고 하는 순간 가리온의 입이 먼저 열렸다.
“도 라.”
고서는 휘리릭 날아 가리온 앞에서 멈추었다. 초점 없는 눈동자가 고서를 응시했다.
“고대의 예언서인가.”
또 다시 놈의 목소리가 들리자 누트 샤인은 전신이 떨려 오는 것 같았다. 가리온의 눈 앞에서 멈춘 고서가 스르륵 펼쳐졌다.
“서기관이었군. 누트 샤인”
누트 샤인의 눈동자가 당혹스러움과 두려움으로 가득 차 올랐다.
“네, 네 놈은 누구냐!”
퀭한 눈으로 고서를 꿰뚫고 서 있는 사람은 누트 샤인이 알던 가리온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