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cond - 두 번째의 힘 - 7장. Bagi''s Bargain. 바기족의 계약
| 20.12.23 12:00 | 조회수: 1,082


“안돼!”

방금 전의 꿈은 소름 끼치는 것이었다. 푸른 빛만이 가득한 공간에서 상상 속의 괴수 쿤다의 번개. 피를 튀기며 되돌아오는 자신의 마력, 그리고 온 몸이 묶여버린 기사가 어지럽게 돌고 있었다. 시에나는 흠뻑 젖어버린 땀을 닦아내었다.

처음부터 무언가 잃어버린 것만 같은 느낌에, 몸이 회복되지 않았는데도 인카르 신전을 나선 시에나였다. 물론 듀스 마블의 명령이기도 했지만, 헬리시타를 벗어나면 무언가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요란한 꿈으로 더 혼란에 빠져버린 듯,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휴.”

으슬으슬한 새벽 공기가 시에나를 덮쳐 왔다. 잠들기 전까지도 둥둥 울리던 소리는 여전히 들리고 있었다. 시에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막사를 젖혔다. 낯선 흙 모래가 차가웠다. 호흡을 크게 들이쉬자 어제는 미처 느끼지 못했던 역겨움이 밀려들어와 남은 잠을 깨웠다.

“이래서, 역겨운 바기족이로군.”

미식거리면서도 비릿하고 썩어 들어가는 것 같은 고약한 냄새를 눈치챈 그 순간, 시에나는 막사 안에 더는 갇혀있고 싶지 않아졌다. 천천히 밖으로 나온 시에나는 막사 사이를 이리저리 걸었다. 이십여 개의 막사가 있는 듯한 바기족 진영은 숫자상으로는 그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막사 하나는 십 여명의 사람들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매우 컸다. 시에나는 캄비라 바투와 다른 바기족 전사들의 우람한 덩치를 떠올렸다.

“거기서 지금 뭐 하는 거야?”

“앗!”

황금빛이 날카롭게 번뜩이는 창이 어느 새 시에나의 목 언저리에 겨누어져 있었다. 시에나는 순간 너무 놀라버렸지만 들고 있던 스태프를 꼭 쥐며 침착하게 창 끝의 바기족을 바라보았다.

“저는 인카르의 전령입니다.”

“그, 그건 아는데 뭘 하고 있었어?”

시에나는 바기족 전사의 음성이 흔들리고 있음을 눈치챘다. 시에나는 들고 있던 스태프를 더욱 꼭 쥐어보았다.

“뭐 하는 거야! 움직이지마!”

‘역시!’

시에나는 천천히 손을 올려 황금 창 날을 부드럽게 쥐었다.

“뭐, 뭐 하는 거야! 이거 놓지 못해! 어서 놔! 찌, 찔러 버리겠다!”

창을 든 바기족 전사는 식은땀을 흘리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시에나가 자칫 마법이라도 쓸까봐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이 스태프를 쥐고 있는 이상 섣불리 공격하지 못할 것을 알아챈 시에나는 천천히 창 끝을 돌렸다.

하지만 바기족 전사가 소리를 크게 지르자 막사 안에 있던 다른 전사들도 우르르 나와 시에나를 둘러쌓다. 시에나는 주위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는 단지, 족장님을 만나려고 했을 뿐입니다.”

“허, 허튼 소리 하지 마라! 이 새벽에 족장님을 만나다니!”

바기족은 다른 동료들이 몰려와 조금은 자신감이 생겼는지, 창 끝을 흔들며 외쳤다. 시에나는 얼른 창에서 손을 떼고 뒤로 물러섰다. 시에나가 주춤하자 나머지 바기족들도 차츰 다가오기 시작했다. 시에나는 진영 중앙에 위치한 캄비라 바투의 불 켜진 막사를 손짓하며 서둘러 말을 꺼냈다.

“족장님은 지금 아주 중요한 문제로 고민하고 계실 겁니다.”

“흥, 그게 너와 무슨 상관이냐!”

“저는 그 고민에 대한 답을 들어야 하거든요.”

시에나는 호의적인 태도를 보여주기 위해 웃어 보였지만, 미소는 더 이상 먹혀 들지 않았다.

“그런데, 그걸 꼭 새벽에 해야 했다는 거냐!”

“말도 안돼!”

“맞아! 마법을 부려서 우리를 다 죽이려는 거야!”

바기족 전사들은 점점 더 가까이 시에나에게 몰려들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먼저 죽여버리자!”

“이, 이잇 죽어라!”

시에나는 황급히 스태프를 길게 돌려 바기족들의 복부를 차례로 강타했다. 시간을 벌어 주문을 외울 생각이었다. 스태프를 따라 시에나의 가녀린 몸이 핑그르르 돌며 물결 같은 주문이 쏟아져 나왔다.

“달빛의 여신 큔에게 발화의 힘을 빌리니, 엘리멘터들이여 나와 함께 꽃처럼 아름답고 칼날보다 날카로운 그대들의 놀라운 힘을 지금 이곳에 집중케 하라!”

“뭐, 뭐야!”

“마법을 쓴다!”

“플레어 비트!”

시에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작은 불덩어리들이 원형으로 빠르게 퍼졌다.

“으으! 이게 뭐야!”

“부, 불이다아!”

시에나는 화상을 입고 땅을 구르는 바기족 전사들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어냈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거대한 바기족 전사들의 날카로운 창과 주먹에 당할 뻔 했다.

“무슨 일이냐!”

시에나가 소리 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뒤늦게 나타난 캄비라 바투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시에나와 쓰러진 전사들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곧, 어느 정도 상황을 알아차린 캄비라 바투가 시에나에게 말했다.

“이게 무슨 짓이오!”

하얀 미소를 지으며 시에나가 대답했다.

“족장님을 만나러 가기가 참 어렵군요.”

너무나 가볍고 아름다운 시에나의 미소에 뺨이 붉어진 캄비라 바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시에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놀라운 여자였다. 마법으로 일순간에 바기족 전사들을 꼼짝하지도 못하게 하면서도, 미소를 지을 때면 세상에는 없는 천사 같았다.

“그런데.”

시에나는 캄비라 바투에게 서서히 다가가며 말했다. 캄비라 바투는 시에나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결정은 내리셨나요?”

캄비라 바투는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쓰러져 있는 바기족 전사들의 모습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캄비라 바투는 머뭇거리며 시에나에게 조용히 말했다.

“막사로 가서 이야기합시다.”

시에나는 쓰러진 바기족 전사들을 뒤로 하고 캄비라 바투를 따라 나섰다.

시에나는 역겨운 냄새를 견디며 앉아 있었다. 슬슬 결판을 낼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밤새 생각해보았는데. 그러니까, 당신의 말대로라면. 지금껏 누트 샤인님은.”

떨떠름한 표정의 캄비라 바투에게 시에나가 힘주어 말했다.

“예. 그렇습니다.”

헬리시타를 떠나기 전, 듀스 마블은 시에나가 전해야 할 내용에 대해 상세히 일러 주었다.

“시에나. 네가 전해야 할 것에 대해 말해주마.”

“네.”

“첫째, 바기족은 자덴에 대한 공격을 멈출 것.”

“자덴이요?”

노라크 동굴에 가있었기 때문에 자덴에서의 일을 몰랐던 시에나가 되물었다.

“그래. 바기족 놈들은 지금 자덴을 향해 공격을 퍼붓고 있지. 분수도 모르고 말이야.”

시에나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황금 때문인가요?”

“그렇지.”

듀스 마블은 서둘러 다음 이야기를 꺼냈다.

“둘째, 바기족은 바라트로 이주할 것.”

“바라트라면!”

“그래, 이것은 아이리스 비노쉬의 요구다. 그는 바기족이 이 세상에서 아예 사라지길 바라는 모양이야. 무서운 궁사 놈들.”

“그렇군요.”

시에나는 오렌다 사막과 영혼의 밀림에 둘러싸인 죽음의 땅 바라트를 떠올렸다. 아이리스 비노쉬가 수장으로 있는 궁사계는 이성적이다 못해 시릴 정도로 냉철한 종족이었다. 그들을 해쳤다면, 바라트 정도는 감사히 여겨야 할 것이었다.

“그리고 하나 더.”

“예,”

“이것은 절대로 아이리스 비노쉬가 알게 해서는 안 된다.”

시에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반드시 바기족 족장만이 알아야 해.”

듀스 마블은 주위를 낮게 살폈다.

“셋째, 바기족은 계약을 이행할 것.”

시에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계약?’

듀스 마블은 뜸을 들이며 천천히 조심스럽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시에나. 바기족과 나의 인카르는 오랜 세월 동안 계약을 맺어 왔다.”

양피지 종이와 수많은 책들, 깃털이 달린 펜, 그리고 넘칠 정도의 트리에스테 대륙에 관한 정보와 지도들, 이런 것들은 모두 바기족 촌락에서는 쉽게 구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이것은 쉽게 구할 수 없는 정도의 것이 아니라, 원시 사회나 다름없는 바기족은 구경하기조차 어려운 놀라운 문명의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트 샤인의 잉크가 마르지 않았던 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인카르의 군대를 더 강하게 만드는 것에 혈안이 되어 있던 듀스 마블에게는 괴수를 불러내거나, 혹은 괴수의 힘을 받아들일 수 있는 소환술이 너무나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이계의 부작용은 가혹한 것이었다. 뜻을 같이 했던 많은 친구들이 부작용으로 미쳐버리거나 죽어버렸다.

그것이 계기였다. 누트 샤인과 듀스 마블은 서로 원하는 것을 맞바꾸었다. 듀스 마블은 누트 샤인이 그렇게 원하던 방대한 양의 정보와 지식을 전달해주었고, 누트 샤인은 희생을 대신할 실험체를 듀스 마블에게 건넸다.

이것이 바로 누트 샤인이 듀스 마블과 맺은 계약이었다. 아름다웠던 젊은 시절로 돌아가기 위해 평생을 바친 누트 샤인에게는 먹을 것, 입을 것보다는 보다 많은 정보와, 보다 깊은 연구가 더 필사적이었다. 바기족의 족장이었던 누트 샤인은 그렇게 자신의 욕심을 위한 대가로 바기족의 목숨을 지불했다.

누트 샤인은 바기족의 아이들이 열 살이 되는 해에 일주일간 미로의 숲에서 생활하도록 했다. 그리고 일주일 후에 무사히 집으로 돌아오는 아이들에게는 진짜 바기족 전사가 되었다며 축제를 열어주었다. 하지만 그것은 소수였을 뿐, 다수의 아이들이 촌락으로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축제의 요란한 의식 속에서 살아남은 선택된 아이들만이 전사의 의지를 불살랐고, 이것은 서서히 바기족의 신성한 성인식으로 정착되었다. 우둔한 바기족은 돌아오지 못한 아이들이 미로의 숲에서 길을 잃거나 오염체에게 당하거나, 잡아 먹힌 것으로만 생각했을 뿐이었다.

돌아오지 못한, 다른 방식으로 선택된 아이들이 향한 곳은 헬리시타 인카르 신전의 캄캄한 지하실이었다. 아이들은 듀스 마블의 소환술 연구를 위해 이송된 것이었다. 가축보다는 좀 더 나은 체력과 정신력을 가진 바기족 아이들은 소환술의 부작용을 대신 받아주는데 매우 흡족할 만한 매개체였다. 그러나 그 아이들에게도 결국 남은 것은 죽음뿐이었다. 바기족의 어린 아이들은 소환술사를 대신해 고통만 받다가 온전한 정신을 차려보지도 못하고 죽어갔다.

캄비라 바투는 자신이 치른 성인식이 더욱 강한 전사가 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필수적인 과정이라고 생각했었고, 그것에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캄비라 바투 뿐 아니라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바기족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은 어른이 되는 신성한 절차이자 핍박 받으며 은둔 생활을 해온 바기족을 하나로 모아주는 의식이었다. 그렇지만 믿어왔던 그 모든 것은 누트 샤인의 욕망을 위한 잔인한 사기극일 뿐이었다.

“아버지도 알고 계셨을까.”

캄비라 바투는 밤새 고민하였다. 궁사들에게 처참하게 당한 아버지와 따로 놓고 보더라도, 이 계약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었는지를, 캄비라 바투는 알 수 있었다. 지금껏 누트 샤인이 공급 받아 온 것들을 식량이나 필수품으로 돌리면 바기족으로서는 큰 도움이 될 것이었다. 게다가 만일 지금까지 누트 샤인이 저지른 일을 바기족 전사들이 알게 되면, 그때는 황금 전투 이후 족장의 자리를 맡게 된 캄비라 바투마저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캄비라 바투는 끊임없이 지도 위의 바라트를 노려보았다. 영혼의 밀림과 오랜다 사막이 또렷하게 눈에 들어왔다. 그곳이 어떤 곳인지 캄비라 바투는 잘 알고 있었다.

“많은 고민을 하신 것 같군요.”

캄비라 바투는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다.

“결코 쉬운 선택은 아니지요. 캄비라 바투님은 분명히 현명한 선택을 하시리라 믿습니다.”

시에나의 또박또박한 목소리가 차가운 새벽 공기에 섞여 들어갔다. 하늘에서 온 천사 같은 모습의 시에나를 캄비라 바투는 절망적인 눈으로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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