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르카 신전에서 에바와 가리온이 사라졌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해가 한참이나 진 후였다.
클로비스는 파르카 신전의 수비대까지 풀어서 사라진 두 사람을 찾도록 했다.
“에바! 에바!”
“여기도 없습니다.”
“두 사람 도대체 어디로 간 거지?”
“혹시 에바가 그 기사 놈 데리고 도망친 거 아냐?”
“뭐야? 그럼 사랑의 도피행각? 크크”
“아주 안달이 났군 그래. 하하하.”
파르카 신전의 수비대가 에바와 가리온을 찾다가 시시덕거렸다.
“시끄러! 닥치지 못해!”
클로비스의 필요 이상의 높은 목소리에 수비병들은 입을 닫아 버렸다.
“너희들, 제대로 다 찾아보기는 한 거야?”
“예. 신전 내부를 샅샅이 뒤졌습니다.”
“그런데도 없단 말이야?”
클로비스의 불호령에 수비대 중 하나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딱 한 군데 찾아보지 않은 곳이 있기는 하지만.“
“뭐?“
병사들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으며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다크 홀이요.”
“다크 홀은 안 찾아봤죠. 들어갈 수가 없잖아요.”
다크 홀. 파르카 신전을 소유한 여신만이 들어갈 수 있는 금지구역.
클로비스는 창 밖으로 굳게 닫혀 있는 다크 홀을 불안하게 바라보았다.
클로비스는 이전에 단 한번 다크 홀에 들어간 적이 있었다. 물론 정식으로 허가를 받고 들어간 것은 아니었다. 다크 홀은 이제껏 여신을 제외한 누구에게도 허락 된 적이 없었다. 그런 다크 홀에 클로비스가 들어간 것은 리엘이 죽고 얼마 후였다.
방주 아르카나에서 나올 때 임신 상태였던 리엘은 파르카 신전에서 클로비스를 낳았다. 현명하고 지혜로운 리엘은 어린 클로비스에게 직접 여러 가지를 가르쳤다. 그 중에서도 아버지의 이름은 매일같이 새겨 주었다.
파르카 신전은 여러 면에서 영검한 곳이었다. 알로켄족의 정신력이 흐르고 있어서인지 그곳에 있는 인간들은 그 신력을 받아 건강한 삶을 누릴 수 있었다. 리엘은 그런 파르카 신전에서 클로비스와 평화롭고 조용하게 살면서 조용히 일생을 마무리 했다.
하지만 혈기 왕성한 클로비스에게 파르카 신전은 자신을 가두는 벽장 같기만 했다. 파르카 신전은 더할 나위 없는 아름다운 곳이었지만, 클로비스는 세상이 궁금했다. 리엘이 숨을 거두자 클로비스는 더는 가만히 있지 못하고 헬리시타 대륙을 향해 떠날 짐을 꾸렸다.
대강의 짐을 꾸려 나섰지만, 파르카 신전을 둘러 싼 하이하프 설원은 죽음을 불러 오는 매서운 추위만이 가득한 곳이었다. 클로비스는 휘몰아치는 눈보라를 이겨낼 수 없었다. 다시 신전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클로비스는 신전을 나갈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그 때 클로비스는 어머니 리엘이 해 주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단 한번이라도 근처에도 가지 않았던 다크 홀에 관한 전설이자 동화 같은, 슬픈 사랑 이야기. 파르카 신전의 여신님의 이야기가.
“클로비스. 너의 아버지 누트 샤인이 그랜드 폴을 겪기 전에 말이다. 이 파르카 신전에는 사랑이 가득했단다. 하지만 그것은 슬픈 사랑이었지.”
리엘은 클로비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야기했다.
“칼과 엘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었어. 그래서 둘은 이 파르카 신전으로 도망쳤지. 하이하프 설원은 매우 추운 곳이었는데, 이 곳만 두 사람의 사랑 때문에 따뜻하고 아름다운 곳이 된 거야. 하지만 두 사람은 언젠가는 세상에 나가 살고 싶었어. 그래서 칼은 트리에스테 대륙을 거미줄처럼 통해갈 수 있는 지하 통로를 만들었지. 그 통로의 출발점이 바로 저기 보이는 다크 홀이란다.”
클로비스는 눈을 크게 뜨며 손가락으로 신전 옆의 작은 집을 가리켰다.
“알아요! 알아요! 저기가 다크 홀이죠? 저기 마녀가 살죠!”
“그래. 우리 클로비스. 똑똑하구나.”
클로비스는 그 다크 홀을 따라 나가 세계와 조우했고 사랑을 배워왔다.
“휴. 어쩔 수 없군.”
클로비스는 어느 새 다크 홀을 향해 뛰어 가고 있었다.
“대장님!”
“나는 현자 칼리지오 밧슈다.”
기사는 그렇게 말했다.
에바는 놀라서 입을 벌리고 가리온을 쳐다보았다.
“칼리지오 밧슈?”
누트 샤인의 더 커질 수 없을 것 같은 눈도 거의 튀어나올 듯 하더니, 누트 샤인은 갑자기 배꼽을 잡으며 크게 웃어대기 시작했다.
“크크크크크. 이놈! 네놈이 아주 미쳤구나! 미쳤어! 그놈은 그랜드 폴 당시에 온 몸이 산산이 부서졌다. 이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단 말이다! 네놈이 어디서 그런 마법을 배웠는지는 모르겠지만, 나한테 그런 거짓말이 통할 성 싶으냐! 어서 예언서나 다시 내놓아라!”
누트 샤인은 가리온을 향해 촉수를 뻗었다. 고서를 되찾아 와야 했다. 에바는 급하게 변하는 상황 때문에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서기관이고 뭐고 에바가 알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누트 샤인이 촉수를 쏜살같이 내쏘자 가리온은 고서를 공중에 띄운 채로 중얼거렸다.
“디스라쥬.”
고서는 공중을 휙 날아 에바 쪽에 떨어졌다. 에바는 잠시 당황했다.
‘내가 가지고 있으라는 뜻인가?’
에바는 어떻게 할까 고민하면서도, 고서를 집어 들었다.
그 사이 가리온의 손에는 하얗게 빛나는 것이 잡혀져 있었다. 가리온은 그 검을 누트 샤인을 향해 하얗게 갈랐다. 작은 몸집을 이용해 재빠르게 움직인 누트 샤인은 끝 날에 스친 상처를 감싸며 말했다.
“마검인가? 역시 알로켄족의 피가 섞이긴 했나 보구나.”
“고서는 인간이 가질 것이 아니다.”
“천만에! 나는 인간 같은 하등한 족속이 아니다! 알로켄족의 서기관 누트 샤인이란 말이다!”
누트 샤인은 몸을 앞으로 구르며 촉수를 앞으로 뻗었다. 누트 샤인의 몸집보다도 훨씬 긴 촉수는 한없이 길게 뻗어나서 가리온의 다리를 죄는 듯 했다.
하지만 가리온이 검으로 광풍을 한번 내지르자 촉수는 휘어지며 누트 샤인과 함께 날아갔다. 누트 샤인은 공중을 그대로 날아가 벽에 부딪히며 나가 떨어졌다.
“큭.”
누트 샤인은 지금의 가리온에게 이길 수 없다는 것을 확실히 깨달았다.
‘놈이 도대체 어떤 수법을 쓴 거지? 이대로는 안돼!’
여기서 쓰러질 수는 없었다. 누트 샤인은 서둘러 에바 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돌진하기 시작했다. 고서부터 얻고자 함이었다. 에바는 순식간에 누트 샤인이 커다란 눈을 부라리며 자기 쪽으로 다가오자 당황했지만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고서를 가지려고!”
마지막 일격을 가하려고 한 가리온은 누트 샤인이 방향을 바꾸어 에바에게로 향하는 것을 보고 몸을 돌려 에바 쪽으로 하얀 검을 들고 뛰어 올랐다.
“에바!”
에바는 고서를 들고 있는 자신을 향하여 성큼 다가오는 두 사람을 정신없이 바라보다가 뒤에서 자기를 부르는 소리에 놀라 휙 뒤돌아보았다.
“에바! 비켜!”
에바가 뒤를 돌아봄과 동시에 클로비스는 이미 마법을 완성하여 에바 쪽으로 보냈다. 클로비스가 다크 홀 안으로 뛰어 들어와 울리는 소리를 따라오니 에바를 향하여 조그마한 난쟁이 비슷한 것이 달려들고 있었고, 자신들이 구한 정체불명의 기사도 함께 있었다. 클로비스는 에바가 위험하다는 직감에 바로 마법을 썼던 것이었다.
에바는 서둘러 살짝 몸을 비틀어 클로비스에게 뛰어갔고, 눈치 빠른 누트 샤인도 몸을 돌려 껑충 피했다. 하지만 의식을 지배당하고 있는 가리온은 뒤늦게 알아차려 미처 검을 휘두를 사이도 없이 거대한 불덩이를 그대로 맞고 나가 떨어졌다. 그렇지 않아도 상처가 다 낫지 않은 가리온은 신음소리를 몇 번 내더니 그대로 정신을 잃으며 쓰러졌다.
에바는 가리온이 그렇게 쓰러져 버려 크게 놀랐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 살펴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누트 샤인이 여전히 에바가 가슴에 품고 있는 고서를 노리고 있었다. 클로비스도 누트 샤인의 눈길을 눈치 챘는지 에바가 품은 고서를 쳐다보았다.
“그게 뭐지?”
“모르겠어요. 예언서라고 하던데.”
“예언서?”
에바는 클로비스에게 고서를 넘기려 했다. 그러자 누트 샤인은 폴짝 폴짝 뛰어와서 책을 낚아채려 하였다. 코앞에서 고서를 빼앗을 수 있었던 중요한 순간을 놓쳐버린 누트 샤인은 더욱 흥분하여 날뛰었다.
“네 놈들이 함부로 만질 물건이 아니다!”
클로비스가 고서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책을 위로 들어 올리며 피하자, 누트 샤인은 촉수를 뻗어 클로비스의 팔에 흡착시키려 했다. 이를 본 에바는 서둘러 품속에서 단검을 꺼내 누트 샤인의 촉수를 잘라버렸다. 사정거리를 두어야만 공격할 수 있는 에바가 호신용으로 늘 차고 다니는 것이었다. 단검에 찔린 누트 샤인은 축축한 살빛 액체를 뚝뚝 흘리며 신음소리를 내었다. 누트 샤인은 뒤로 천천히 물러서며 말을 흘렸다.
“이건 뭐야? 암기? 크크. 나도 아가씨처럼 단검을 품고 다닐 걸 그랬군. 아무래도 촉수만 가지고 공격하는 것은 무리가 있단 말이야. 그런데 저 청년은 저대로 내버려 두어도 괜찮은 것인가?”
누트 샤인은 말을 통해 시간을 벌어 상처를 회복할 속셈이었다. 누트 샤인은 변형의 힘을 가진 바기족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깨닫지 못한 에바는 자기도 모르게 가리온 쪽으로 달려갔다. 클로비스는 에바가 미처 말릴 사이도 없이 달려가자 누트 샤인을 노려보며 말했다.
“당신은 누구시오? 여기는 비나엘르 파라이님의 영토요.”
“흥. 비나엘르 파라이든. 뭐든. 알로켄족을 배반한 것 따위는 관심 없다.”
누트 샤인의 말에 클로비스는 깜짝 놀랐다. 그랜드 폴 이전의 역사에 대해 아는 사람은 극히 소수일 뿐이었다. 클로비스는 곧바로 화제를 돌리려 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이오. 비나엘르 파라이님이 알로켄족이라니.”
“크크. 난 비나엘르 파라이가 알로켄족이라고 말한 적 없네. ‘배반’했다고 했지.”
누트 샤인은 커다란 눈을 실눈으로 만들어 야비한 눈웃음을 흘렸다.
“어, 어쨌거나 이곳은 비나엘르 파라이님의 영지요! 어서 나가시오!”
“흥. 괘씸한 것들! 여기는 본래 알로켄족의 것이었다! 더러운 너희 인간들이 밟고 있을 곳이 아니니, 너희나 여기서 썩 꺼져라!”
클로비스와 누트 샤인이 살기를 띤 언쟁을 벌이고 있을 때, 에바는 가리온을 제대로 눕혔다. 가리온의 몸을 구석구석 살펴보았더니 벽에 긁힌 상처 말고는 지난번의 상처가 전부였다. 에바는 안도의 숨을 쉬었지만 그래도 내상을 얼마나 입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빨리 돌아가지 않으면 죽을지도 몰라.’
“으, 으윽.”
가리온은 신음을 내뱉으며 깨어났다. 가리온의 얼굴이 고통으로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괜찮아요?”
에바는 가리온이 깨어나는 것을 보고 놀라 소리쳤다. 그 소리에 클로비스와 누트 샤인도 가리온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진짜 질긴 놈이군.”
누트 샤인은 가리온을 보며 잿빛 얼굴로 끌끌 찼다.
클로비스는 그 틈을 타 누트 샤인을 흘깃 쳐다보았다. 무언가 끌리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가리온은 정신을 차리며 제대로 눈을 뜨는 듯 했다.
“여기가 어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