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하프 설원은 파르카 신전을 병풍처럼 둘러쳐 어스름한 달빛을 비추었다. 유난히 고요한 것 같은 파르카 신전을 밤하늘의 별들이 총총히 감쌌다. 이계의 기운이 하루가 다르게 대륙을 잠식해 들어가고 있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파르카 신전이었다. 인카르 교단이 세워지기 훨씬 이전에 세워진 파르카 신전은 가장 분주했을 때나 혹은 폐허처럼 버려졌을 때도 지금처럼 평화롭게 그 온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가리온과 에바, 그리고 클로비스가 다크 홀에서 나왔을 때는 아침이었다. 클로비스는 하루 내내 마법으로 가리온의 상처를 치료했고, 저녁식사를 할 때쯤에 가리온의 상처가 거의 아물자 파르카 신전의 사람들은 다 함께 잔치를 열었다.
가리온에게는 오래간만의 즐거운 시간이었다. 처음에 가리온이 인카르의 기사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약간의 팽팽한 긴장감이 돌기도 했지만, 술이 조금씩 줄어들면서 분위기는 점점 열이 올랐다. 파르카 신전의 병사들은 가리온과 팔씨름을 벌이고 함께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클로비스는 연회장 쪽으로 잠시 고개를 돌렸다가 한숨을 쉬었다. 간간히 잔치를 즐기는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하하.”
“휴…….”
클로비스는 또다시 다크 홀에서의 일을 떠올려 보았다.
“만약 사실이라면…….”
가리온으로부터 그 조그맣게 구부러진 것이, 바기족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만 해도 클로비스는 설마하는 마음이 더 컸다. 아니, 믿고 싶은 마음이 들지를 않았다. 그것은 전혀 클로비스가 상상하던 모습이 아니었다.
클로비스는 어머니 리엘에게 끊임없이 들어왔다.
“너는 너의 근본을 잘 지켜야 한단다.”
금빛이 섞인 갈색으로 찰진 클로비스의 윤기 나는 머리칼을 넘기며 리엘은 말했었다.
“너는 네 아버지로부터 세상에 나온 것이니까.”
“아버지 얘기해줘요! 아버지 얘기해줘요!”
리엘은 클로비스와 똑같이 생긴 눈망울을 하늘을 향해 바라보면서 꿈꾸듯이 말했다.
“아버지는 너처럼 갈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단다.”
“갈색 눈동자!”
“그래, 커다란 갈색 눈동자로 언제나 꿈을 좇으셨지.”
리엘의 얼굴에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하지만 곧 언제 그랬냐는 듯 표정이 다시 밝아졌다.
“클로비스, 네가 아버지를 만나게 된다면 너는 단번에 알아 볼 수 있을 거야.”
클로비스의 순진무구한 얼굴을 들여다보며 리엘이 말했다.
“가족이란 그런 것이란다.”
리엘은 검지를 들어 보이며 클로비스의 눈앞에 바짝 대었다.
“다만, 한 가지 잊어서는 안 될 것이 있어.”
“클로비스 알아요! 이름! 이름!”
“그래. 이름. 그건 보물을 찾는 단서와도 같은 거야. 절대 잊어서는 안돼. 알겠지?”
밖으로 향하는 벽면에 달려 있던 파르카 신전의 두꺼운 휘장이 하이하프 설원의 눈바람을 맞은 듯, 높이 흔들렸다. 그와 함께 클로비스가 차마 끄지 못하고 있던 촛불도 함께 꺼졌다. 초를 다시 켜야 할까 망설이던 클로비스는 불을 다시 켜는 대신 옆에 둔 두껍고 낡은 책을 펼쳤다.
“서기관 샤인에게.”
알로켄 흘림체가 하이하프 설원으로부터 보내진 달빛에 확연한 윤곽을 드러내며 빛나고 있었다. 클로비스의 눈길이 머무른 그 고서 옆에, 바르게 접은 하얀 종이가 있었다. 내일 아침이면 헬리시타로 갈 편지였다. 그 종이도 달빛을 받아 “클로비스 샤인” 이라는 알로켄의 흘림체를 뽐내고 있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클로비스는 고서를 내려놓고, 방문을 나섰다. 가리온의 방이 멀지 않았다.
가리온도 잠을 이루지 못하기는 매한가지였다. 병사들을 만나게 되면서 가리온은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디인지, 그 동안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비교적 정확하게 알게 되었다.
우선 가리온 자신은 여기 파르카 신전의 수비대에 의해 구출되었다. 가리온은 시에나에 대해 물어보았지만, 그들은 가리온 단 한 사람을 보았을 뿐이라고 했다. 그래서 가리온은 그곳까지 어떻게 온 것이냐고 물었다. 처음에 병사들은 말하길 꺼려하는 듯 했지만, 천성이 순한 것 같은 그들은 곧 수더분하게 말해주었다.
“이곳에는 비밀 통로가 많아. 몇 년을 여기서 살아왔어도 아직도 헷갈릴 정도지. 아마 여기 있는 우리들 중에서도 그 비밀 통로를 전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걸.”
“우리는 그냥 명령 받으면, 대장을 따라 가는 거라구.”
“대장이요?”
“그래! 아직 모르나? 클로비스가 대장이지.”
“에바는 자넬 좋아하고! 크하하하.”
가리온이 다크 홀에서 살아 돌아 온 것을 보고 병사들은 신기해하며 가리온을 둘러 싸 앉았다. 클로비스와 에바는 뒤쪽으로 밀려 어느 샌가는 자리를 뜨고 없었다. 가리온은 사실 병사들보다는 클로비스나 에바와 이야기하고 싶었다. 특히 에바에게 물어 볼 것이 많았다. 가리온은 다크 홀에서 해 주었던 알로켄에 대한 이야기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가리온은 어떻게 해서라도 그 일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야만 했다.
파르카 신전에 밤이 서서히 다가오자 병사들도 힘에 부쳤는지 하나 둘씩 빈 술잔을 남겨두고 자기 위치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가리온도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지만 푹신한 것들로만 채워져 있는 그 방에서 쉽게 잠들 수가 없었다.
“자네 아버지가 말하지 않던가? 상계를 닫아버린 칼리지오 밧슈의 이름을!”
“가리온, 당신은 정말로 자신이 칼리지오 밧슈라고 말했어요.”
가리온은 에바의 이야기를 듣고 까무러칠 수밖에 없었다. 가리온은 자신도 모르게 누트 샤인의 말처럼 변해가고 있었다.
‘내가 정말, 알로켄족의 후예란 말인가! 하지만 아버지는.’
가리온은 슈마트라 초이의 얼굴을 떠 올렸다. 근엄한 모습 속에 눈빛이 서 있는 눈동자가 자연스럽게 그려졌다. 가리온은 아무래도 누트 샤인과 에바에게 들은 이야기로는 불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아버지 슈마트라 초이와 만나서 직접 이야기하는 것이 편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사, 가리온 자신이 정말로 남의 자식일지라도.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대강 정리를 끝낸 가리온은 그만 노곤한 몸을 이끌고 쉬려고 했다. 밤은 깊어만 갔고, 바람은 더욱 차가워지고 있었다.
“가리온?”
초를 끄는 순간 밖에서 부른 소리에 일어 난 가리온이 문을 열자, 자신의 눈동자와 같은 하늘색 빛 시폰 드레스를 입은 에바가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서 있었다.
“지금이 아니면 제대로 이야기 할 수가 없을 것 같아서요.”
당황한 가리온은 에바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이런 식의 방문은 생각도 못했던 것이었다.
에바의 건강한 몸으로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드레스가 가죽으로 된 템페스트와는 전혀 다른 느낌을 주었다. 생기가 넘치는 빨간 곱슬머리, 건강하게 그을린 금빛 피부, 시선을 뿌리치기 힘든 하늘색 눈동자, 도무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것들이 묘하게 어우러져 있었다.
“드, 들어와요.”
“고마워요.”
에바를 스치며 가리온은 문을 닫았다. 보기 좋게 드러낸 어깨 선을 따라 기묘한 모양의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우물거리다 달빛을 등지고 돌아 선 에바는 가리온의 시선을 느끼고 문신을 살짝 손으로 덮으며 말했다.
“고향을 떠날 때, 새긴 거예요.”
“네.”
에바는 가리온의 시선을 약간 피하는 듯 하더니 작은 탁자가 놓인 그림자가 걸린 벽으로 다가갔다. 에바는 가리온보다도 이 방의 배치를 더 잘 알고 있는 듯 했다. 작은 탁자 위에 놓인 주전자를 찻잔에 기울이며 에바가 말했다.
“차라도 마실까요?”
“아. 네.”
가리온은 불을 다시 키기 위해 움직였다.
“저도 이곳에 처음 왔을 때, 이 방을 썼었어요. 파르카 신전에서는 눈바람이 제일 약하게 부는 곳이죠.”
“눈바람이요?”
“네. 하이하프에서 불어오는 찬바람 말이에요.”
“그렇군요.”
에바는 머리를 귀 뒤로 쓸어 넘기더니 스푼을 들어 살짝 몇 번 저어 가리온에게 건넸다. 가리온은 의자에 앉으며 찻잔을 받아 들었다.
“감사합니다.”
아련한 차의 향기는 가리온이 처음 마셔 보는 것이었다.
“좋은 차예요. 이 동그란 찻잎은 여기 설원에서만 자라는 건데, 클로비스가 꺾어 오죠.”
“네. 차 맛이 좋은데요. 에바는 클로비스라고 하는 군요.”
에바는 가리온의 말에 자칫 찻잔을 떨어뜨릴 뻔 했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가리온의 음색에 가슴이 흔들리고 있었다. 에바는 그 마음을 담아 그대로 전달했다.
“네. 가리온.”
“다들 대장이라고 부르던데.”
에바는 살짝 웃으며 말했다.
“대장이긴 하죠. 이 파르카 신전을 수비하는. 어떻게 보면 아버지 같은 사람이기도 하고. 너무 편한 사람이에요.”
“아버지요?”
“사실, 전 아버지라던가. 어머니 사랑은 모르고 자랐어요. 그냥 만약에 아버지가 있었더라면 꼭 클로비스처럼 챙겨주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해요. 약간 우습죠?”
“아니, 그렇지 않은데요.”
가리온은 에바의 쓸쓸한 듯한 뒷말에 자신에 대해서 떠올리게 되었다.
‘나도 사랑을 받고 자란 편은 아니지.’
가리온은 얼른 생각을 지워버리고 말을 꺼냈다.
“그런데, 이야기란?”
에바는 찻잔을 내려놓고 의자에 앉으며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칼리지오 밧슈나 알로켄의 언어에 대해 궁금하실 것 같아서요. 손에서 뻗어 나온 검도 그렇고……. 사실 제가 궁금하기도 하구요.”
“아. 그렇군요.”
가리온도 찻잔을 내려놓으며 양 손을 마주 잡았다.
“알로켄족 말을 하고 손에서 검기가 나왔다구요?”
“네.”
“내가 칼리지오 밧슈라고도 하고.”
“네. 분명히 그렇게 말했어요.”
가리온은 들키고 싶지 않은 것을 들킨 사람처럼 얼굴이 빨개졌다. 칼리지오 밧슈가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에바도 당연히 알고 있을 것이었다.
“난 당신이 이계의 하수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눈빛에 그렇게 써있으니까.”
에바는 말을 계속 이었다.
“하지만, 손에서 검이 뻗어 나온다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그 때, 나는 무의식이었고……. 사실 나는 아무것도 모르겠군요. 나도 궁금해요. 도대체 왜 그런 일들이 일어난 건지.”
가리온의 말에 에바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리온이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은 에바도 안타깝게 만들었다.
“가리온…….”
에바는 자기도 모르게 가만히 가리온의 손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똑똑-.
가리온은 고개를 문으로 돌렸고, 에바는 서둘러 손을 내려 양손으로 깍지를 꼈다. 어쩐지 얼굴이 확확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문을 두드린 사람은 오래 기다리지 못하겠는지 직접 문을 열었다.
“에바?”
그렇지 않아도 달아오르는 것 같은 에바의 얼굴은 문을 열고 들어 온 클로비스와 마주치고는 불타는 것 같았다.
“아. 클로비스! 저는, 이만.”
에바는 벌떡 일어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가 버렸다. 에바의 그런 행동에 오히려 당황한 것은 가리온이었다. 가리온은 졸지에 잘못을 저지른 어린 아이처럼 되어 버렸다. 클로비스는 넋을 잃은 듯 에바가 떠난 곳을 바라보다가 별 말 없이 가리온에게 말했다.
“묻고 싶은 게 있네.”
“오늘은 다들 저에게 궁금한 것이 많은가 보군요.”
클로비스는 잠옷 차림에 머리도 덥수룩해져 있었다. 아무리 생긴 것 자체가 호남형이라지만 이건 좀 심하다는 생각이 가리온을 스쳐 지나갔다. ‘여기 사람들은 다 이런가. 다들 무방비 상태처럼 보이는군.’
하지만 클로비스는 그런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듯이 가리온에게 가까이 다가서며 물었다.
“그 바기족에 대해 알고 싶네.”
“그 바기족이라면?”
가리온은 촉수를 늘어트린 그 흉측하고 어스름한 두꺼운 얼굴을 기억해냈다. 클로비스는 가리온의 표정을 유심히 살피며 물었다.
“자네 혹시, 그의 이름을 알고 있나?”
가리온은 아버지 슈마트라 초이를 욕보이고, 시에나와 자신을 죽음까지 몰고 갔던 바기족을 생각하며 분노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