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cond - 두 번째의 힘 - 14장. Piece. 집착의 조각
| 20.12.23 12:00 | 조회수: 990


가리온과 에바는 조심스럽게 가리온이 전에 부수어 놓았던 막 앞에 섰다. 처음 이 벽을 마주쳤을 때만 하더라도 투명한 결정들로 촘촘하게 만들어 진 것 같았지만, 지금 그 벽은 이곳저곳이 균열을 일으키며 날카로운 빛을 띠고 있었다. 에바는 낮은 곳을 향하여 손가락을 가리켰다.

“저기에 흔적이 있네요. 역시 이곳으로!”

벽과 바닥이 붙어 있는 구석진 곳에 작은 구멍이 뚫려 있었다. 가리온과 에바 모두 다음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저 구멍 하나로 모든 것을 알 수 있었다.

‘바기족이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섣불리 움직일 수는 없었다. 그들은 저 작은 구멍으로 빠져나갈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막을 무너뜨리는 것도 어쩐지 꺼림칙했다. 이제 와서 다시 돌아갈 수도 없었다.

노라크 동굴에서 누트 샤인은 가리온에게 어떤 암시를 던져 주는 것 같았다. 누트 샤인은 확실히 가리온과 관련된 무언가를 알고 있었다. 게다가 노라크 동굴에서 가리온을 구해 준 것은 파르카 신전의 용병들이었다. 가리온은 명예를 지키는 기사로서 그들을 도우는 것이 마땅했다. 때문에 가리온은 누트 샤인을 잡아야만 했다.

가리온은 망령이 떠다니는 다리를 조심스럽게 돌아보다 의지를 굳힌 듯 열명 남짓한 파르카 신전의 병사들과 에바를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

비나엘르 파라이는 그랜드 폴 이후 대부분의 시간을 파르카 신전에서 보내왔다. 고향과 가족을 송두리째 잃어버린 비나엘르 파라이에게 파르카 신전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했던 유일한 안식처였다.

그랜드 폴 바로 직후까지도 인간들에 대해 거의 무지했던 비나엘르 파라이를 도운 것은 리엘이었다. 마침, 리엘이 임신 중이기도 해서 방주 아르카나가 열리자 비나엘르 파라이는 리엘을 파르카 신전으로 데려왔다. 비나엘르 파라이의 경험에 의하면 파르카 신전은 출산하기 좋은 곳이었다. 리엘은 건강한 아들을 낳았고 그 아이가 클로비스였다.

“이제야 도착했어.”

비나엘르 파라이는 황금 천사가 새겨진 문을 벌컥 열었다. 전처럼 문 앞에 경비병이 없는 것이 어쩐지 수상스러웠다.

“무슨 일이 있긴 했나 본데.”

비나엘르 파라이는 성큼 파르카 신전 안으로 발을 디뎠다. 크레스포의 오염은 비나엘르 파라이의 소중한 안식처 파르카 신전에 위협을 가했다. 특히 다크 홀은 트리에스테 대륙 각지로 지하 터널이 뻗어 있기 때문에 그 오염 속도가 더 빨랐다. 때문에 비나엘르 파라이는 다크 홀에 결계를 치고, 노라크 동굴과 이어지는 길을 하나 만들었다. 그때가 마침 노라크 교도들을 슈마트라 초이가 잡아간 후라, 특별한 방해꾼은 없었다.

하지만 오염이 하이하프 설원을 넘어 노라크 동굴에 번지면서, 그곳에서도 오염체와 이계 생물들이 득실거리게 되었고, 비나엘르 파라이는 신전의 안전을 위해 클로비스를 시켜 노라크 동굴을 정기적으로 청소하도록 지시했다. 가리온이 구출된 것은 그 덕분이었다.

“데비나님!”

“클로비스는 어디 있지? 문 앞에 경비병이 없더군.”

“좋지 않은 일이 있었습니다.”

병사는 비나엘르 파라이를 클로비스에게로 안내했다. 침대에 누워 있는 창백한 얼굴의 클로비스의 모습에서 비나엘르 파라이는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음을 직감했다.

“가요.”

먼저 발을 뗀 것은 에바였다. 에바가 손으로 살짝 건드리자, 투명한 막은 그것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사르르 무너져 내렸다. 가리온은 한동안 멍하니 있었다. 이렇게 되기까지, 막의 균형을 깨뜨린 것이 자신이라는 사실이 도무지 믿기질 않았다. 에바는 병사들과 함께 나서며 가리온을 불렀다.

“서둘러요.”

가리온은 곧 생각을 접었다. 모든 의문을 누트 샤인이 풀어 줄 수도 있었다. 그러려면 우선 누트 샤인부터 찾아야 했다. 가리온은 에바 쪽으로 앞서나갔다.

“갑시다.”

막을 지나자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은 옆에 서 있는 석상들이었다. 양 옆에 두 개, 그리고 중앙에 하나까지 해서 모두 세 개의 석상이 화살의 코처럼 삐죽하게 서 있었다. 천정에서부터 내려오는 거미 줄 같은 실들은 이곳이 오랫동안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았음을 알려 주었다. 그렇지만 딱 누트 샤인의 크기만 한 높이에서 실은 잘려 있었다. 저곳으로 누트 샤인이 지나갔으리라. 일행은 축축 늘어진 거미줄을 쳐내며 앞으로 나섰다.

석상은 원래는 하얀 것이었는데 그 위에 먼지와 각종 분비물들이 쌓여 더러워진 것처럼 보였다.

“꼭 점박이 강아지처럼 생겼군.”

병사 중 누군가가 농담처럼 말했지만, 웃는 사람은 없었다. 가리온은 그 보다 더 앞쪽을 주시했다. 노라크 동굴에서 보았던 보랏빛이 앞쪽에서 은은히 빛나고 있었다. 가리온과 에바는 다른 병사들보다 앞서서 걸어갔지만, 특별한 것은 없었다. 벽에 군데군데 들어간 곳이 있을 뿐이었다.

“기묘한 곳이군요.”

가리온은 노라크 동굴을 떠올리며 발걸음을 세웠지만, 에바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가리온을 끌 정도였다.

“지체할 시간 없어요. 서둘러야 해요.”

클로비스를 찌른 누트 샤인을 한시라도 빨리 잡아들이고 싶은 에바였다. 에바는 급한 마음에 뒤쪽에서 거미줄과 씨름하던 병사들에게도 큰 소리로 외쳤다.

“어이! 빨리들 오라구! 아직도 빠져 나오지 못한 거야?”

“아, 가고 있어!”

병사들은 궁시렁거리며 서둘렀다. 가리온도 더 발걸음을 재촉했다. 골이 파인 곳을 몇 군데 더 지나자 이번에는 작은 방이 연달아 나왔다. 가리온이 먼저 방 하나를 살펴보았다.

“에취.”

먼지가 많이 쌓인 듯 가리온이 발걸음을 안쪽으로 옮기자 케케묵은 연기가 피어올라 기관지를 고통스럽게 했다. 작은 방 중앙에는 탁자가 하나 있었고, 그 위에 작은 상자가 있었다. 가리온이 그것을 조심스럽게 열어보려 한 순간, 통로 쪽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이쪽에도 방이 있는데! 상자가 열려 있어!”

에바는 그 소리를 듣고 가리온에게 말했다.

“가리온, 그 상자 열지 마요.”

가리온은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잘못 열었다가는 어떤 암기가 튀어나올지 몰라요.”

가리온은 상자를 열어 보고 싶은 마음에 침이 꼴깍 넘어갔지만, 에바의 말도 일리가 있어 뒤로 물러났다. 가리온이 통로로 나오자 에바가 바닥을 가리키며 말했다.

“보세요. 먼지가 쓸려 있는 부분이 있어요. 하지만 방금 저 방으로는 쓸려 있지 않죠. 먼지가 쓸린 자국은 저 윗방으로 연결되어 있어요. 바기족은 저 방에 들렀다가……. 저리로 간 거예요.”

에바는 자국을 따라 시선을 돌리며 손가락으로 앞을 가리켰다. 그냥 보기에도 두꺼워 보이는 철문이 비스듬하게 열려 있었다.

비나엘르 파라이는 자신이 만든 결계 조각들을 손으로 쓸어 보았다. 이 결계를 치기 위해 많은 힘을 쏟아 부었던 비나엘르 파라이는 표정을 약간 찌푸리며 조각을 한 움큼 쥐고 일어섰다. 클로비스의 이야기만으로는 부족했다. 비나엘르 파라이는 자신을 칼리지오 밧슈라고 한 자가 누구인지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해야 했다.

“밝아져라.”

비나엘르 파라이는 결계를 지나 스컬쳐들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오랜만의 다크 홀 공기는 매캐하기도 했지만, 아련한 그리움을 떠올리게도 만들었다. 비나엘르 파라이는 경쾌하게 스컬쳐들에게 인사했다.

“안녕, 할머니들. 오랜만이군. 그 동안 때가 많이 탔네.”

에바는 잠시 물러났고, 가리온을 선두로 두꺼운 문을 살며시 열었다. 고약한 냄새가 풍기는 것이 모두의 얼굴을 찌푸리게 했다. 여차하면 활시위를 당길 준비를 하고 있던 에바도 손이 미끄러지는 것만 같았다. 가리온은 팔뚝으로 코를 가리며 방안을 살폈다.

“너무 역한데요. 특별히 뭔가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아요.”

가리온은 발자국을 안으로 들이며 좀 더 자세히 살펴보았다. 공중에는 특별한 것이 없었고, 바닥에 피 같은 것들이 찐득하게 벌려져 있었다. 벽에 있는 횃불이 바닥을 더욱 음산하게 만들었다. 눅눅한 것 같으면서도 열기가 차 있는 느낌이 방금 전까지도 이곳에서 격전이 벌어졌음을 암시했다. 가리온은 좀 더 나아가 앞에 있는 두꺼운 문을 마저 열었다. 스산한 돌들이 가리온의 눈앞에 줄지어 있었다.

“이것들은 뭐지?”

한기가 휙 도는 것 같은 기분과 함께 가리온이 다음 방으로 넘어가려는 순간, 누군가 가리온의 어깨를 잡았다. 놀란 가리온이 홱 돌아보았다. 에바였다.

“가리온, 데비나님이에요.”

어스름한 붉은 기운 가운데 은발의 여자가 가리온을 노한 눈길로 쳐다보고 있었다.

비나엘르 파라이는 억장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설마 했던 것이었지만, 역시나 바라던 결과가 아니었다.

‘이런 애송이가.’

에바는 신전의 주인인 데비나에 대해 설명했다. 가리온은 열심히 에바의 설명을 들었다. 은발의 여자는 쉽지 않아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에바의 탄탄하고 아름다운, 건강한 육체에 비해서는 너무나 약해 보였다. 에바의 말이 멈추자 가리온은 고개를 숙였다.

“가리온 초이입니다.”

“초이?”

“예. 그렇습니다.”

비나엘르 파라이의 노한 마음은 조금씩 새로운 감정으로 싹터나갔다.

‘그렇다면 혹시!’

비나엘르 파라이의 얼굴에 작은 미소가 감돌았다.

“제노아의 초이인가?”

가리온은 그것이 곧 아버지 슈마트라 초이를 이야기하는 것임을 알았다. 가리온은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네. 그렇습니다.”

“호오. 그래.”

비나엘르 파라이는 가리온에게 많은 것을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에바가 그 사이를 가로 채었다.

“저, 데비나님.”

“응?”

“저희는 서둘러야 합니다. 바기족 한 놈이 다크 홀에 숨어들었습니다. 고대 알로켄족의 예언서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 클로비스가 그랬지. 그렇다면 서둘러야겠구나.”

비나엘르 파라이는 가리온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가까이 다가가자 가리온의 얼굴을 더욱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기대했던 남색 눈동자는 아니었다. 에바는 당황하며 우물거렸다.

“아니, 저.”

“왜 그러지?”

“아니, 아니요.”

에바는 말끝을 흐렸다. 데비나가 이렇게 나서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게다가 가리온에게 지나친 관심을 보이는 것 같아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하지만 에바가 반박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내 생각에는, 바기족은 아마 지금쯤 이그드라실을 지나, 리틱 홀에서 끙끙거리고 있을 것 같구나. 아스가르드를 저렇게 쉽게 통과한 걸 보아서는. 보통은 아닐 것 같고.”

비나엘르 파라이는 여기 저기 방향을 가리키며 말했지만, 가리온과 에바 그리고 병사들은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비나엘르 파라이는 개의치 않고 말했다.

“자, 우리도 어서 이그드라실로 가자!”

병사들은 곧 비나엘르 파라이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늘따라 이상한데…….’

데비나가 자신만큼이나 명랑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에바였지만, 용병 무리에 가담하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에바는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로 뒤따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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