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그드라실! 정말 오랜만에 와보는구나!”
비나엘르 파라이는 혼자 즐거워하며 흥을 돋웠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전혀 그것에 동참할 기분이 아니었다. 불빛이 조금도 새어나가지 않고 있는 까만 공중에 가냘픈 길 하나만이 어지럽게 돌아가고 있었다. 다행히 밝은 이슬이 길의 윤곽을 잡아 드러내게 해 주었는데 겨우겨우 연결된 컴컴한 외길은 절벽 아래로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이 아찔해 보였다.
“자네가 먼저 가게.”
“아, 먼저 가라니까!”
용병들은 서로 자리싸움을 하느라고 밀치고 당겼다. 그러자 몇몇은 습한 흙에 발이 미끄러져 떨어질 뻔 했다. 발에 밀쳐 난 흙은 소리도 없이 공중으로 사라져 버렸다.
“왜 이래! 밀지 말라구!”
“좀 조심들 해!”
“그, 그러니까 순서대로 하자구!”
다들 몸을 추스리는 가운데 가리온이 먼저 앞으로 나섰다. 에바는 그런 가리온의 모습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아슬아슬한 낭떠러지를 겁내지 않고 묵직하게 걸어가는 가리온은 무척이나 듬직하고 믿음직스러워 보였다. 에바는 그런 가리온의 모습에 용기를 얻어 다른 용병들도 잘 건너갈 수 있다고 힘을 주었다.
“자자, 한 명씩 가자구.”
뒤에서 망설이고 있던 용병들은 조금씩 외길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으헛!”
“무슨 일이야?”
가리온과 에바는 동시에 외쳤다. 두 사람의 목소리가 멀리 퍼지는 것 같더니 다시 돌아왔다.
“아니, 저기.”
순식간에 공간 하나가 뻥 뚫려버렸고, 뒷사람은 말을 더듬으며 손가락으로 빈자리를 가리켰다.
“어디 간 거야?”
에바가 묻자, 뒤에 있던 용병의 손가락이 가만히 길을 비켜났다. 그의 손가락은 똑똑히 절벽 아래에 가 있었다. 날카롭게 깎아 지르는 듯한 절벽의 모서리에만 흙먼지가 조금 일어나다 말았을 뿐, 사람의 자취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떠, 떨어졌어.”
이 말과 동시에 용병들은 모두 저주에 걸린 듯 다리를 후들후들 떨었다. 용병은 거의 주저앉을 듯 주춤거렸다. 그리고는 두려운 눈빛으로 말했다.
“화살, 화살에 꽂혀서. 화살에!”
“화살?”
에바의 말이 끝나면서 새파랗게 질린 용병들 사이로 굵은 장대비 같은 화살이 좍좍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으악!”
“커억.”
용병들은 그렇지 않아도 가파른 절벽 위에서 뛰어다니며 서로 밀치고 당겨댔다.
“진정하고, 자세를 낮춰요!”
가리온은 용병들이 놀라 서로 부딪히고 떨어지는 것을 막으려고 소리쳤다. 그렇지만 용병들은 가리온의 말을 들을 수가 없었다. 몸뚱이가 과녁이 되어 버린 용병들은 서로 부딪히다가 급기야 몇몇은 절벽 밑으로 떨어져 버리고 말았다.
가리온은 결국 앞에 있던 용병들부터 차례로 앉혀갔다. 에바는 앞쪽에서 가리온이 애를 쓰는 것을 보고 가리온을 돕기 위해 눈을 감고 화살이 오는 방향과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자칫 에바가 다칠 수도 있는 위험한 시도이기는 했지만, 에바는 가리온을 위해서 대담하게 눈을 감고 공격했던 것이다.
비나엘르 파라이는 가리온의 행동을 유심히 살피었다. 원래 비나엘르 파라이는 안전한 막을 둥글게 쳐서 가리온과 에바, 그리고 열 명의 용병까지 모두 살릴 수도 있었지만, 비나엘르 파라이는 그저 가만히 서서 나직하게 중얼거릴 따름이었다.
“하우트.”
곧 외길이 무너질 듯 흔들리더니 절벽에서부터 길쭉하고 거대한 줄기가 여러 개 솟아나오기 시작했다. 흙이 뚝뚝 떨어지는 줄기는 그렇지 않아도 약한 외길을 푹푹 내리쳤다. 가리온은 용병들을 진정시키다가 껑충 뛰어올라 줄기를 피해야만 했다. 용병들은 겁에 질려 감히 나설 생각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가리온은 여기서 반드시 살아나간다는 일념으로 크루어를 단단히 쥐었다.
“뭐야! 이건!”
가리온은 일단 줄기 하나에 올라 베어내려 했다. 가리온이 올라탄 줄기는 크루어의 공격을받자 공중을 휭휭 날아다니며 거세게 흔들어댔다. 가리온은 떨어지지 않으려고 검을 줄기에 꽂은 채로 매달렸다. 하지만 검이 꽂힌 부분이 점점 헐거워져 착지할 곳을 찾지 않으면 안되었다. 게다가 위로는 또 다른 줄기가 가리온을 덮치고 있었다.
쿵-
두 개의 줄기가 겹쳐지면서 절벽 길을 때리자 가느다란 외길이 몹시 흔들렸다. 게다가 줄기가 솟아난 부분 둘레로 큰 흙덩어리가 부숴져 떨어지고 있었다. 그나마 휘둘리는 줄기가 화살 공격을 막아 주었지만 에바는 지반이 점점 더 요란하게 흔들리고 있음을 느꼈다.
“안되겠어! 서둘러 건너야 해!”
에바는 벌떡 일어나 용병들과 가리온이 있던 곳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가리온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에바는 걱정스러운 눈길로 주위를 살피다가, 데비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일단 여기를 피하세요.”
에바는 데비나와 함께 용병들이 있는 곳까지 서둘러 뛰어갔다.
“가리온님은?”
“그, 글쎄. 모르겠어. 피해!”
줄기 하나가 다시 한번 땅을 내리쳤다.
“에바! 기사는 나중에 찾고 지금은 우선 피하자구!”
“데비나님! 어서 이쪽으로!”
용병들은 뒤엉킨 흙먼지를 풀풀 날리며 서둘러 외길 끝으로 달아났다.
“안돼! 그냥 두고 갈 수 없어!”
에바는 용병들의 손을 뿌리치고 다시 외길로 들어섰다. 가뜩이나 어두운 외길은 이제 거대한 줄기들의 난동으로 거의 무너질 듯 휘청거리고 있었다.
“가리온! 가리온! 어디 있어요!”
에바는 탄력적인 몸매로 날쌔게 뛰어다니며 가리온을 불러보았다. 무언가 대답소리가 웅웅거리는 것 같기도 했지만, 줄기들이 날뛰는 턱에 좀처럼 방향을 잡아낼 수가 없었다.
“도대체 어디 있는 거지?”
그 순간 큰 줄기 하나가 에바의 뒤를 덮쳤다.
“아앗!”
에바는 예민한 감각으로 줄기를 피하기는 했지만, 몸은 공중 위였다. 안전하게 착지할 바닥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뭐라도 잡아야 해!’
떨어지는 에바의 눈 앞에 아직은 형태를 버티고 있는 외길의 벽이 보였다. 에바는 서둘러 품 속에서 단검을 꺼내 이를 악물고 벽에 푹 꽂았다. “허억. 허억.”
에바는 짧은 검에 의지해 대롱대롱 매달렸다.
“이걸로는 오래 못 버텨! 이제 어쩌지?”
휘휘 돌고 있는 줄기가 한 번이라도 에바를 덮치면 그 때는 그걸로 끝이었다. 에바의 생각이 끝나기가 무섭게 흙으로 된 줄기는 에바를 향해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 거대한 줄기가 암흑을 가르는 소리가 몸서리처지게 싸늘했다.
“싫어! 이대로는! 이대로는 죽을 수 없어!”
에바는 이제는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발버둥쳤다. 살아가는 일분 일초가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었다. 줄기의 흙먼지가 등 바로 뒤에서 흩날리는 순간까지도 에바는 희망을 놓고 싶지 않았다. 에바는 죽기 살기로 화살을 꺼내 허물어지고 있는 벽에 꽂았다. 가벼운 나무 화살이 에바의 몸을 오래 지탱시켜 줄 리는 없었지만 무엇이든 해야만 했다.
“죽고 싶지 않다구!”
“어서 여기로 올라와요!”
화살을 잡았던 손이 미끄러지는 듯 하면서 에바는 소리 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온 몸이 스르르 떨어지고 있었지만 더 이상 절망스럽지 않았다. 기사 가리온이었다.
“서둘러야 해요. 이 줄기도 오래 못 버틸 거예요. 저 길이 무너지면 이 줄기들도 다 사라질 테니까.”
에바는 하늘색 눈을 깜빡이며 가리온을 응시했다. 지금의 에바로서는 가리온을 제외한 그 어떤 것도 눈에 담을 수가 없었다.
“지금 외길로 다시 내려가는 건 위험해요. 그러니까 우리는 줄기를 타고 길을 건너도록 합시다. 에바는 날 따라오기만 하면 되요.”
가리온은 에바의 눈을 깊게 들여다 보았다. 최대한 빠르고 안전하게 도착하기 위해서는 에바가 잘 따라주어야 했다.
“그럼 어서 가죠!”
가리온은 에바의 손을 덥썩 잡아 끌었다. 줄기를 받침대 삼아 뛰어 오른 가리온은 재빨리 다른 줄기에 검을 꽂고 중심을 잡았다. 에바는 마치 자신이 나비가 되어 날아오르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가리온은 그런 에바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에바의 손을 잡은 채 절벽 끝으로 뛰어들어갔다.
절벽 끝에 다다른 일행 앞에는 한 아름의 돌무더기가 쌓여져 있었다. 절벽에서 지쳐버린 용병들은 다리 힘이 풀린 듯 머뭇거렸지만, 뒤의 절벽을 돌아보고는 기겁하여 돌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재빨리 탄탄한 평지로 들어섰다.
“어이! 저기! 저기 좀 봐!”
“가리온과 에바가 돌아오네!”
용병들은 연신 감탄했고, 비나엘르 파라이는 묘한 미소를 지었다.
“둘 다, 괜찮아?”
“네. 괜찮습니다.”
가리온은 가쁜 숨을 몰아 쉬었다.
“에바양이 많이 놀랐을 겁니다.”
“그래?”
“근데 에바양이 뭐야. 그냥 에바라고 해도 된다구. 하하하.”
“그래. 그래.”
용병들은 기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가리온은 쑥스러워하면서도 유쾌하게 말했다.
“그럼, 다시 출발하죠.”
“그럴까?”
“그래! 그러자구!”
“바기족을 잡아야지! 푸하하하”
천천히 마지막 용병의 발소리까지 사라지자 돌무더기가 쌓여진 한 귀퉁이에서 자갈이 툭툭 떨어졌다. 그리고 슬근슬근 흘러내리는 흙과 함께 힘겨운 호흡 소리가 새어 나왔다.
“하아. 하아.”
에바는 조심스럽게 데비나에게 말을 걸었다. 가리온과 용병들은 혹시라도 또 갑자기 공격이 있을까 앞서서 둘러보고 있었다.
“아까. 다 들었습니다.”
비나엘르 파라이는 표정하나 변하지 않았지만, 싸늘한 말투로 대답했다.
“무얼 말이냐?”
“이그드라실에서. 주문을 외우셨죠?”
“닥쳐라.”
비나엘르 파라이는 에바의 입을 막으려 했지만, 에바는 끝까지 말했다.
“도대체 저는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네가 관여할만한 일이 아니야.”
“하지만, 목숨을 잃은 사람도 있습니다! 데비나님도 위험하셨구요!”
“예언을 받을 만한 자가 있는지 시험해 본 것 뿐이다.”
“네?”
에바는 더 물어보려 했지만, 비나엘르 파라이는 말을 돌렸다.
“다 왔구나!”
가리온은 고개를 돌려 눈을 빛내었다.
“노르넨이야. 예언의 방이지.”
“데비나님!”
하지만 에바는 가리온이 성큼 다가와 말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여기에 바기족이 있겠지요?”
“글쎄. 나는 잘 모르겠구나.”
“일단. 가보죠.”
가리온은 앞으로 나섰다.
몇 발자국 앞에 떨어진 곳에 물이 흐르는 다리가 있었지만, 누군가 그 곳을 건너 간 흔적은 찾을 수가 없었다. 가리온은 조심스럽게 영혼을 잡아 끌어 당기는 듯 시린 물을 첨벙첨벙 건너 삐죽한 문 앞에 섰다.
“자, 그럼 들어갑니다.”
가리온의 날카로운 눈매에 모두들 호흡을 가다듬으며 준비 자세를 취했다. 에바도 화살을 꼭 쥐었다. 비나엘르 파라이는 뒤를 힐끗 돌아보았다.
가리온이 문을 열자 노란 빛이 한 아름 뿜어져 나왔다. 모두들 검은 어둠에 익숙해져 있던 터라 눈을 가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예민한 눈을 가진 에바 역시 손으로 얼굴을 감싸 안았다. 오직 비나엘르 파라이만이 당당하고도 묘한 웃음으로 빛을 마주 대했다. 제일 먼저 문을 연 가리온의 귓가에 큰 바람소리가 왱왱 불어 치더니 점점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소리로 바뀌어갔다.
“도대체 무슨?”
“쉿. 조용히! 예언이 내려진다.”
비나엘르 파라이는 에바를 매서운 눈초리로 막자 현처럼 얇고 가벼운 목소리가 마치 노래 소리처럼 모두를 홀려내었다.
“피가 엉긴 실타래로 꼬아지는 운명의 기사여!”
송곳보다도 따가운 바람이 가리온의 몸을 훑고 지나가더니, 한 번 더 큰 바람이 사람의 소리로 바뀌었다.
“그대는 두 번째 힘을 가지고 태어난 희생자의 후손이로구나!”
바람은 가리온을 향해 점점 더 거세게 불어댔다.
“두 번째 힘?”
가리온은 가만히 손을 들여다 보았다. 자신도 알지 못하는 뜨거운 열기가 온 몸에 가득 차고 있었다.
“드디어 시작되는가!”
비나엘르 파라이는 눈을 더욱 또렷하게 뜨기 위해 미간에 힘을 주었다. 이 순간을 놓칠 수 없었다. 길고 기나긴 세월에 대한 보상이 이제 막 시작되려 하는 찰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