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릭 쉬릭.
어지럽게 몰아치는 바람에 크루어가 덜썩 흔들렸다. 눈을 뜨기가 힘들었다. 가리온은 크루어를 놓치지 않도록 꼬옥 쥐었다. 가득 찬 열기가 크루어로 전해지자, 크루어는 은백색 빛을 뿜어냈다. 가리온은 크루어에 힘이 차 오르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점점 더 무거워지는 것 같은 크루어에 집중하는데 또 다시 바람의 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더 얇은, 좀 전의 것과는 다른 음색이었다.
“피를 나누는 자가 그대를 배신할 것이며!”
가리온은 몸을 훑어 오르는 섬뜩함을 느꼈다. 바람의 탓인지, 피가 역류하는 듯 메스꺼웠다.
가리온은 검을 두 손으로 부여잡고 억지로 눈을 가늘게 떴다. 다시 보니, 바람이 스쳐간 곳에서 조금씩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가리온의 갑옷을 예리하게 파고들어 살갗을 들어내는 무서운 칼바람이었다. 새끼 손톱만한 핏방울들이 조금씩, 조금씩 밝고 선명한 노란 바람 속으로 모여 들어가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바람이 천막을 쳤는지, 두리번거리는 가리온의 눈동자는 노르넨에 함께 들어 온 일행을 찾을 수가 없었다. 오로지 혼자였다.
“모두 어디로 간 거야?”
쉐엑. 쉐엑.
휘황찬란한 바람의 가면은 가리온을 조롱하듯 점점 더 조였다.
“으윽.”
구석구석에서 살갗이 그어져 나가는 고통에 온 몸에서 열이 들끓었다. 차가워야 할 크루어를 쥔 손이 몹시 뜨거워져 마치 정신을 놓치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했다. 하지만 가리온은 그 와중에도 검만은 꼭 쥐었다.
가리온은 자신의 심장이 뜨겁게 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직 죽지 않았다.
“지금 너희들이 뭘 하자는 건지 모르겠다만!”
가리온은 크게 외쳤다. 가리온의 핏방울이 같이 튀었다.
“난 여기 살아있다! 검을 들고 겨루자!”
이 말에 웃음소리가 반사되어 돌아왔다. 하나의 음색이 아닌 여러 명의 소리였다.
“까르르르르.”
“까르르르르.”
“쉼 없는 초침아래 그대 가는 길은 피가 그득하구나!”
“까르르르르.”
웃음소리가 연거푸 울리더니, 밝은 빛깔은 어느 새 황량한 붉은 색으로 돌변했다. 휘몰아치는 돌개바람은 가리온을 꼭 껴안았다. 가리온의 날카로운 콧날 사이로 땀과 핏방울이 섞여 흘러내렸다. 핏방울들이 돌개바람의 빛깔을 한층 짙게 하고 있었다. 가리온은 더 이상 바람을 피하지 않고 눈을 똑바로 떴다. 이대로 가다간 피가 말라 죽어 버릴 것이었다.
“분명, 저기야.”
가리온은 붉다 못해 검은 테가 나는 곳을 쏘아 보았다.
팔꿈치를 뒤로 깊게 뺀 가리온은 충분히 달구어진 크루어에 온 힘을 집중해 검은 테로 밀어 넣었다.
“으아아아!”
가리온의 기합 소리와 함께, 핏방울들도 물결 모양을 바꾸어 춤추기 시작했다. 피 바람이 멈추며 핏방울들은 빗물처럼 툭툭 땅으로 내렸다.
가리온은 멈추지 않고, 검은 테를 가르고 찔렀다. 물컹한 느낌이 온기가 살아 있는 작은 심장을 도려내는 듯했다.
“가리온!”
에바가 가리온을 부르고 있었다.
“끄아아!”
검은 테는 얼마 남지 않은 바람을 모아 바닥을 쳐 올랐다. 날카로운 비명이 귀를 아프게 했다.
“으윽!”
가리온은 에바를 향해 몇 걸음 띠었다가, 도로 뒤로 밀려나버렸다. 흙을 밀어 딛고 겨우 멈춘 가리온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 크지 않은 노르넨 안에서 자신처럼 갑옷이 바람에 잘려나간 하이하프의 몇몇 병사들이 땅에 쓰러져 허우적대었다. 다른 몇몇들은 이미 정신을 잃은 듯, 혓바닥을 내놓고 나자빠져 있었다. 에바의 템페스트도 찢겨나간 듯, 사방이 쫙쫙 그어져 있었다. 너덜너덜한 템페스트가 에바의 굴곡을 군데군데 드러내 가리온은 고개를 돌렸다.
“가리온! 무사했군요!”
“아, 네.”
“하지만 이 피들은! 모두가!”
가리온의 갑옷에서 배어 나온 피를 보고 놀란 에바는 주위를 둘러 보다 다시 한 번 놀랐다.
노르넨의 출입구 가까이에 있던 데비나는, 처음 다크 홀에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청결하고 고고한 자태였다. 에바는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왜 데비나님만?”
가리온도 데비나의 모습에 놀랐다. 데비나가 서 있는 작은 공간과 지금 자신이 서 있는 피로 가득 찬 공간은 공기조차 틀린 것 같았다.
“쉼 없는 초침아래 그대 가는 길은 피가 그득하구나!”
가리온의 머리 속에 세 개의 목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그대 가는 길은 피가 그득하구나!”
“피가 그득하구나!”
“피가! 그득하구나!”
두려운 가리온의 눈빛을, 비나엘르 파라이는 미소 지으며 바라보았다. 마치 그래, 네 생각대로야 라고 말하는 듯 했다. 가리온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비나엘르 파라이는 그 표정을 유지한 채, 손가락을 위로 들어 올렸다.
“아직. 다 끝난 게 아니야.”
공중으로 올라간 검은 테는 세 개로 분리되더니, 길쭉해졌다.
“사, 사람이야?”
길쭉한 세 덩어리는 점차 사람의 형상으로 변모하였다. 하지만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눈알이 없는 여체 세 구였다.
“쿠르르르.”
그들이 짐승처럼 울부짖자, 작은 노르넨이 점차 넓어졌다. 진흙이 덕지덕지 붙은 벽화에 바닥에 널려있던 피가 빨려 들어가면서 노란 빛이 환해졌다. 비나엘르 파라이는 씨익 웃었다.
“할머니들, 여전하군.”
벽을 오려내고 바닥을 밟고 선 벽화들은 가리온과 하이하프 설원의 병사들을 향해 다가왔다. 어느 새 그들의 모습은 흙이 아닌, 온전한 생명체로 변해 있었다.
“기사여!”
“예언을 받았으니!”
“피의 대가는 당연한 것!”
가리온은 순간 바람이 죄어 올 때마다 들렸던 말들을 떠올렸다.
“예언?”
“꺄르르르르.”
“꺄르르르르.”
“웃기지마! 그 딴 말이 무슨 예언이야! 썩 꺼져버려!”
가리온이 공중의 여체를 향해 줄달음쳐 뛰어오르려는 순간, 가리온은 새로운 적을 만났다. 쿵.
온전한 생명체로 변한 거대한 체구의 카타스트로프였다.
해골의 머리에 육중한 몸덩이를 가진 카타스트로프는 단번에 보아도 잿빛 이빨로 가리온의 몸뚱이를 뜯어 낸 다음, 저 위의 예언자들에게 피를 받치려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가리온이 자신을 가로 막은 카타스트로프를 노려보자 카타스트로프는 가리온의 몸통만한 굵기의 창으로 가리온을 후려쳤다. 양끝이 뾰족한 롱기누스였다. 가리온이 서둘러 크루어로 창을 막아 내자 카타스트로프는 창을 휘둘러 다른 쪽 날로 찍어 내리려 했다.
푸욱.
“쿠릉.”
카타스트로프는 고개를 돌렸다. 에바의 화살이 정확하게 카타스트로프의 힘줄에 박혔다.
“가리온님은 저 위를!”
에바는 예언자들을 가리켰다. 가리온은 힐끗 위를 보고는 에바에게 걱정스런 눈빛을 보냈다
“조심해요.”
에바가 가리온에게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우직한 카타스트로프는 에바를 한발 더 내몰았다. 에바가 활 사위를 당길 시간도 없었다. 간신히 롱기누스의 창을 옆으로 피해서자, 카타스트로프의 뾰족한 손톱이 에바를 갈퀴었다.
“앗!”
카타스트로프의 뾰족한 손톱에 에바의 템페스트가 찢겨져 나갔다. 에바는 얼른 손으로 상처를 감추었지만 석류 같은 가슴 위로 붉은 피가 타고 흘러내렸다. 카타스트로프는 동료를 부르는 듯한 소리를 질러대며 롱기누스로 에바를 찍어 내리려 했다.
“아직 일러!”
에바는 다른 손으로 템페스트 자락과 함께 바닥에 떨어진 단검을 빼어 카타스트로프의 정강이에 똑바로 세워 찍어 내렸다.
“쿠아!”
에바는 서둘러 단검을 빼며 물러섰다.
“모두들 정신 차려! 조금만 버텨 보자구!”
여남은 하이하프의 병사들을 향해 에바가 외쳤다.
‘가리온이 저것들을 없애기만 하면!’
에바는 다시 활 사위를 조준해 카타스트로프를 노렸다. 이번엔 팔이 아닌 목이었다.
가리온은 공중에 오래 떠 있을 수 없었다. 짧은 순간에 한 방을 노렸지만, 이상하게도 크루어에 찔려도 여체들은 갈라지지 않았다. 아니 검을 삼키려 했다. 물컹한 몸이 갈라져 쏜살같이 검에 달라붙었다. 그렇지 않아도 시간에 쫓기는 형편에 가리온은 공격을 채 하기도 전에 서둘러 검을 빼내야 했다.
“이잇. 계속 이래서는!”
가리온은 다시 한번 카타스트로프를 밟고 벽을 차 공중으로 올랐다.
‘이번에는 반드시 공격 한다!’
가리온은 힘을 크루어에 싣고 예언자들을 향해 돌격했다.
“으아아아!”
가리온의 크루어가 중앙에 있던 여체를 반으로 가르는 순간, 가리온은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알아챘다.
“헉!”
바람이 가리온을 감쌌던 것처럼, 세 개의 여체가 가리온을 두고 다시 하나로 뭉치고 있었다.
검은 여체들은 어느 새 가리온의 몸뚱이를 둥글게 말아 죄었다. 가리온은 빠져 나오려 발버둥쳤지만 숨을 쉬기가 힘들어짐과 동시에 크루어도 땅으로 곤두박질 쳤다.
“기사여!”
“그대가 가진 예언의 값을!”
검고 물컹한 여체는 더욱 탄탄하게 가리온을 감았다. 가리온의 얼굴은 뻘겋게 되다 못해 파랗게 질려가고 있었다. 쭈그러진 갑옷이 살갗을 파고 들어가며 끼익 소리를 냈다. 가리온의 검붉은 피가 쥐어 짜인 듯 스르르 배어 나왔다.
“피로써 받쳐라!’
“커억!”
줄기는 가리온의 몸을 탄탄하게 죄어 칼로 자르듯 동강내려고 하는 것처럼 보였다. 가리온의 눈은 하얗게 뒤집혀 버렸다.
“안돼!”
비나엘르 파라이가 나섰다.
“페르자 레드!”
하얀 빛이 나선형으로 여체를 끊어나갔다.
“뭐야!”
“이번에도 인간을 돕겠다는 건가?”
“네가 상관할 일이 아냐. 할머니.”
비나엘르 파라이의 손에는 어느 새 하얀 검이 빛을 뿜어내며 들려 있었다. 비나엘르 파라이는 공중으로 뛰어 올라 가리온을 감싼 여체의 등 뒤를 반쯤 갈라내었다.
“으흣!”
“크아아아!”
소름 끼치는 고통의 소리가 방안 가득 울려 퍼지며 찢겨진 곳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나를 위해 이 기사에게 희생되어야겠어.”
비나엘르 파라이는 검을 소멸시키며 가리온을 바라보았다.
“웃기지마! 우리가 죽을 것 같으냐! 우리는 운명을 소유하고 있다구!”
검은 연기와 노란 빛이 회오리처럼 몰아치며 비명소리와 섞여 여러 명의 울음을 토해내더니, 가리온을 완전히 덮어가기 시작했다.
“가리온! 가리온! 정신 차려요!”
카타스트로프와 싸우던 에바가 가리온을 향해 외쳤다. 에바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가리온에게 소리쳐 일어서도록 하는 것뿐이었다. 에바는 곧 다시 카타스트로프와 혈전을 펼쳐야만 했다.
“으…… 으…….”
가리온은 팔을 쭉 뻗었다. 저 앞에 검이 있는 듯 했다. 가리온은 검을 잡으려고 손을 뻗으며 발버둥쳤다.
“여기 있는 모든 피는 우리의 몫이다!”
“안돼! 가리온! 일어나!”
“죽여 버린다!”
“죽인다!”
“죽어!”
쉬익. 쉬익.
가리온은 검을 든 손으로 휘청거렸다. 노란 연기가 여체의 형상으로 변화하며 마지막으로 울렸다.
"너는 불행해질 거야. 반드시…….”
가리온은 터벅터벅 발걸음을 돌렸다.
“뭐야, 뭐가! 도대체 뭐가 예언이라는 거야!”
“가…… 가리온……. 손…… 손에…….”
에바는 입술을 부르르 떨며 가리온의 손을 가리켰고, 비나엘르 파라이는 만족스러운 눈빛으로 미소를 띠었다.
“으응?”
가리온은 통증으로 무거운 고개를 휘청거리며 숙여 내렸다.
“저건.”
가리온의 발밑에 은빛 크루어가 잿빛으로 변해 있었다.
“이런. 검을 떨어뜨렸군.”
휘청대며 검을 주우려는 때. 그제야 가리온은 깨달았다.
“나. 쥐고 있어……!”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에바와 비나엘르 파라이를 번갈아 보던 가리온은 자신의 손에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 내가 쥐고 있는 건.”
가리온의 피와 멍으로 가득한 양손에 도도하게 빛나는 두 개의 검이 각각 쥐어져 있었다.
가리온은 그대로 휘청거렸다. 흐릿한 시야에서 지난번처럼 에바가 눈에 들어왔다.
“가리온!”
에바는 쓰러지려는 가리온을 받치며 데비나를 돌려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