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io - 의식 - 4장. Penetration. 침입
| 20.12.30 12:00 | 조회수: 941


서쪽에서 뿌옇게 모래 바람이 일고 그리폰이 하늘을 맴돌자 쿠리오는 곧바로 네디앙 비노쉬의 방으로 뛰어갔다.

보초들에게 보고를 받고서 닭이 벌써 세 번이나 울었지만 세지타족은 그림자도 마주칠 수 없었다. 이런 전투가 오래 지속되었기는 했지만 그 때는 세지타족이 활을 쏘아 내쫓은 것이었다.

“네디앙 비노쉬님!”

급한 마음에 문을 대뜸 열어젖힌 쿠리오는 순간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 뭐야.”

네디앙 비노쉬는 방 안 어느 구석에도 없었다.

쿠리오는 곧 다른 경비병들에게도 상황을 알렸다. 경비병들은 모두 의아해 했다. 네디앙 비노쉬는 아침을 꼭 자기 방에서 먹었기 때문에, 아직 조식이 시작되지도 않은 이 시각에 어딜 갔을 리가 없었다.

“나도 오늘 아침부터 세지타를 한 명도 못 만났어.”

“그래? 나도 그런데.”

“자네도?”

“거 참, 이상하네.”

“다들 어디로 간 거지?”

경비병들은 맥이 풀려버리는 듯 했다.

“설마!”

“응?”

“여길 버리고 뜬 거 아냐?”

병사들의 얼굴은 곧 새파래졌다.

“말도 안돼.”

“그래. 설마 그 자존심 센 세지타족이 바기족 따위를 두려워하겠어?”

“하지만. 아무도 없잖아?”

설마 하는 마음으로 두려운 빛을 띠고 모여 있는 경비병들의 귀에 밖의 외침소리와 종소리가 시끄럽게 커졌다.

“바기족이다!”

“가까이 왔어!”

“바기족이다! 바기족이 쳐들어온다!”

병사들은 어수선하고 혼란스러운 자덴 성을 둘러보았다. 어딜 보아도 자덴 성 태생의 사람들뿐이었다.

“세지타족은. 없어.”

“바기족이 침입하려는데.’

“배신한 건가?”

“이제 우린 어쩌지?”

“우리라도 지켜야지.”

쿠리오는 주먹을 꼭 쥐며 말했다. 모인 경비병들 모두가 그 말에 수긍하는 듯 했다. 자덴 성의 사람들은 이미 아이언 테라클에게 버림받은 적이 있었기에, 언제고 이 땅은 자신들이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 우리라도!”

경비병들은 서둘러 세지타족의 옷으로 갈아입었다. 이런 전투가 몇 차례 있었기 때문에, 궁수 옷을 입고 명궁인척 활을 쏘면 우매한 바기족이 물러갈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사수들은 서둘러 앞줄을 채웠다.

적은 수의 사수들로 이계의 생명체를 상대한다는 것은 한계가 있었지만, 세지타족이었기에 지난밤부터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이기도 했다. 풍족한 네오스가 자덴 성까지 손을 뻗은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금도 금이었지만, 비나엘르 파라이가 아이리스 비노쉬에게 은밀히 부탁한 것은 지하에서 끊임없이 올라오는 괴물의 처리였다.

쉬운 결정은 아니었지만 그 누구도 아닌 자신들을 위해 해야 하는 일이었다. 이들이 자덴을 넘으면 네오스로 올 것이 분명했다.

“정신 차려! 흐트러지지 마! 곧 마스터가 나올 거야!”

아이리스 비노쉬는 중앙에서 큰 소리로 외쳤다.

“휴. 오늘 따라 유난히 많은데? 벌써 해가 떴겠군. 서둘러야겠어. 네디앙! 마스터가 나오면 내가 앞으로 갈 테니까, 뒤에서 붙도록 해! 알았지?”

“네!”

네디앙은 힘주어 활시위를 정 위치 했다.

“좋아! 그럼 맨 앞줄은 모두 나를 따라서 앞으로 이동하자!”

아이리스 비노쉬를 선두로 앞줄의 궁수들은 단검을 빼어 들었다. 이제는 근접 공격으로 마무리를 지어야 할 시점이었다.

“자! 가자!”

궁수들의 날렵한 바람소리가 자덴 성 지하의 흙벽을 타고 스며들어갔다.

사정거리에 가까워지자, 사기가 충천했던 바기족 전사들은 어쩐지 멈칫거리는 듯 했다. 캄비라 바투는 이를 빠르게 눈치 채고 전사들을 독려했다.

“오늘 전사들의 한 발이, 역사의 한 발자국이 될 것이다! 두려워 말고, 우리가 원래 가졌어야 했던 것들은 놓치지 마라!”

바기족 전사들은 구령 소리에 맞춰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한 발 한 발을 띠었다.

피욱-.

과연 사정거리 안에 들어오자 자덴 성의 외벽에서 화살이 날아왔다. 바기족은 서둘러 뭉쳐 방패로 둥글게 반원을 만들었다.

“으흑.”

화살이 수차례 방패를 두들기는 소리가 그치자 전사들은 화살에 맞았는지 확인하기 위해 서로를 둘러보았다.

“뭐야? 괜찮아?”

“응. 멀쩡한데.”

캄비라 바투도 가만히 방패를 내려 보았다.

“이건…….”

화살은 방패의 한 겹도 뚫지 못한 채 모두 튕겼다.

“이, 이건!”

“신이 도우신 거야! 바기족이 승리할 거야!”

“우와와와아!”

상황이 이렇게 되자, 바기족의 사기는 급상승했다. 치아크라 쿠메르의 몸뚱이를 뚫어댔던 화살에 대한 두려움이 일시에 사라져버렸다. 전사들은 의기양양하게 앞으로 성큼 발을 내딛었다.

“자! 바로 저기다!”

“우와아아!”

“성문을 부셔라!”

바기족의 전사들은 황금으로 칠한 나무 기둥을 뉘어 문에 찍어 내리치기 시작했다. 바기족 전사들이 한번 칠 때마다, 견고하지 못한 자덴 성의 외벽에서는 마른 모래가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쿠리오! 어쩌지? 들어오게 생겼어!”

“큰일이야. 일단 여기서 계속 화살을 쏘게 하고 우리는 내려가자. 문 앞에서라도 막아봐야지!”

“그래!”

쿠리오와 일행들은 낡은 검 자루를 쥐고 서둘러 뛰어 내려갔다.

“자! 한 번 더!”

쿵.

“좋아! 좋아!”

쿵.

자덴 성의 낡은 문은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바기족 전사들은 캄비라 바투의 박자에 맞추어 문을 갈겼다.

“좋아! 마지막이야!”

쿵.

쩌억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자덴 성의 문은 드디어 열렸다. 황금으로 만든 기둥은 그대로 문을 질러 가, 안에서 바기족과 싸우려고 기다리고 있던 자덴 성의 병사들을 나동그라지게 만들었다.

“좋아! 이제부터가 진짜 싸움이다! 가자!”

캄비라 바투의 말에 바기족은 커다란 함성을 뱉으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우람한 덩치의 바기족 전사들은 초라한 자덴 성의 병사들을 마구 깔아뭉갰다.

쿤다의 날개에 일격을 당한 아이리스 비노쉬는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아내었다. 그래도 이만한 희생 끝에 모두 제거한 것이 다행이었다.

“마스터들이 점점 강해지고 있어.”

“크큭. 인간들. 이제 곧 그 분이 오실 것이다. 그 분이…….”

쿤다는 날개를 퍼덕거리며 마지막까지 비웃음을 흘렸다.

“퉷.”

아이리스 비노쉬는 그런 쿤다를 향해 피가 섞인 침을 뱉어 버렸다.

“아이리스 비노쉬님!”

뒤쪽에서 궁수 하나가 급하게 달려오며 아이리스 비노쉬를 부르고 있었다.

“그렇게 뛸 것 없어. 이쪽은 상황 정리 됐거든.”

다른 궁수가 한숨 돌리며 말하자, 뛰어오던 궁수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곧바로 아이리스 비노쉬에게 말했다.

“큰일 났습니다.”

“큰일?”

“현재 바기족이 자덴 성에 진입했습니다.”

“뭐?”

아이리스를 비롯해 모든 궁수들의 힘이 빠져나가 버리는 것 같았다. 자덴 성을 위해 지난밤부터 이계의 생명체들과 싸웠다는 것이 모두 물거품처럼 느껴졌다.

“그 인카르 계집이 협상에 실패했군!”

“그리고.”

“그리고?”

“좋지 않은 소식이 하나 더 있습니다.”

“하나 더 있다고?”

“인카르에서, 디에네 비노쉬님을 데려갔다고 합니다.”

“뭐? 디에네를?”

아이리스 비노쉬는 주먹을 벌벌 떨었다.

“어머니, 이건 분명히!”

네디앙 비노쉬는 깊은 그림자를 얼굴에 드리우며 걱정스럽게 말했다.

“분명히 듀스 마블 짓이야! 이 놈, 무슨 짓을 하려고!”

아이리스 비노쉬는 화살을 꾸욱 쥐며 궁수들에게 말했다.

“오늘부로 궁수들은 자덴에서 퇴각한다.”

너무 지쳐버린 궁수들은 아이리스 비노쉬의 말에 어떠한 토도 달지 않았다.

“우리는 일단 네오스로 돌아간 후에, 헬리시타로 간다.”

“어머니!”

“배신은 용서하지 않아. 결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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