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io - 의식 - 10장. Occasion. 기회
| 20.12.30 12:00 | 조회수: 982


아이언 테라클은 조심스럽게 사방을 주시했다. 수염이 덥수룩하게 꾀죄죄한 그는 전혀 조디악으로 보이지 않았다. 변장에는 성공했지만 며칠 째 같은 대답을 안고 돌아가는 것은 그리 바람직한 일이 아니었다.

“데비나님 계시오?”

“헬리시타에 계시지 않습니다.”

젊은 하녀의 대답은 냉랭했다. 데비나의 일을 거들고 있었기에 아이언 테라클을 함부로 대하진 않았지만, 그 역시 헬리시타의 사람이었다. 아이언 테라클로서는 인카르에 자신을 고발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이었다.

“벌써 일주일이군.”

아이언 테라클은 싸늘한 골목을 한참 들어가 성벽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뒤를 힐끔 보며 망토를 길게 드리운 아이언 테라클은 기름진 얼굴을 찌푸렸다. 비나엘르 파라이가 없다면, 포동포동 살찐 듀스 마블만 쫓으면 될 것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비나엘르 파라이가 돌아와 어떤 행동을 취할 지 알 수 없었다. 비나엘르 파라이가 듀스 마블의 편을 들어줄 지도 모르는 것이었다. 어떤 상황에서든 미리 말을 맞추어 뒤를 깨끗이 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래도 인카르를 제대로 장악하려면 헬리시타를 함락시키는 것이 제일 확실한 방법이기도 했다.

“어쩌면 오히려 기회일지도 몰라.”

아이언 테라클은 망토를 더욱 여미며 발걸음을 서둘렀다. 비나엘르 파라이를 만날 수 없는상황에서 일단 잔바크 그레이가 잘 도착했는지 확인해야 했다.

“어이! 이봐! 오늘은 장사 끝났어!”

선술집 주인은 손 걸레질을 하며 망토 입은 사내를 다그쳤다. 망토 입은 사내는 고개를 필요 이상으로 수그리며 선술집을 나섰다.

“도대체 뭘 그렇게 정신을 놓고 보고 있었던 거야.”

선술집 주인은 사내가 앉았던 테이블을 훔치며 창 밖을 쳐다봤다. 헬리시타를 빠져 나가는 성문이 한 눈에 들어왔다.

“여보! 다 닦았어요?”

“몰라. 애들도 데려갈 거야?”

“그럼요. 오늘 마법 구경 제대로 한다고 다들 들떴는걸요.”

“마법 구경은 무슨. 장사도 떡치는 판인데. 벌써 문을 닫으라면 어떻게 먹고 살라는 거야.”

“그래도 오늘은 어쩔 수 없죠. 헬리시타 사람들 다 가야한다구요. 이왕 가는 김에 우리 가게도 좀 알리자구요.”

“저 놈도 술 한 잔 안 마시고. 이거 어디 장사하겠어! 크웩!”

주인은 사래를 걸러내며 창 밖을 지나가는 아이언 테라클을 쳐다보았다. 아이언 테라클은 마치 헬리시타에 처음 온 사람처럼 이리저리 살피다가 건물과 건물 사이, 그늘이 어둡게 진 틈으로 몸을 숨겼다.

“이보게. 어서 가자구! 좋은 구경 다 놓치겠어!”

“그래. 그래.”

사람들은 둘 셋씩 모여 루앙 광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상해….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려는 거지?”

아이언 테라클은 만만해 보이는 사람 몇을 잡아끌어 세우고 물었다.

“거, 뭐 좋은 구경 있소?”

“아니, 모르시오?”

“오늘 그 사죄의식인가가 있는 날이지 않소.”

“사죄의식이 오늘? 오늘이라구?”

“몰랐소? 이런, 이런. 이 양반, 그 중요한 구경거리를 놓칠 뻔 했군. 당신 헬리시타 사람 맞소? 거, 여기서 방황 말고, 당신도 우리랑 같이 갑시다.”

“그래. 이런 건 꼭 가줘야지!”

아이언 테라클은 인카르 신전으로 꾸역꾸역 향하는 사람들 틈바구니에 끼어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결전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아이언 테라클은 아직 잔바크 그레이를 만나지 못했다.

인카르 신전 앞의 넓은 원형 광장에는 점차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들었다. 듀스 마블은 신전 높은 곳에서 조디악들과 함께 사죄의식을 집행하기를 기다렸고, 시에나는 막바지 준비를 하고 있었다.

“시에나님, 장작은 다 준비했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주위에 우선 불을 좀 켜두세요. 정숙한 분위기를 유지해야 합니다. 경비병들은 제대로 배치했나요?”

“네. 확실히 전달해 두었습니다.”

“죄수들이 나올 길도 확보하세요.”

“예.”

“듀스 마블님은 성스러운 의식임을 강조하고 싶어 하십니다.”

“예. 알겠습니다.”

시에나는 고개를 끄덕인 후, 곧 슈마트라 초이와 디에네 비노쉬가 나올 문을 응시하였다.

고문관은 창을 연신 기웃거렸다. 빛을 볼 때마다 그의 얼굴은 조잡하게 찡그려졌지만 목소리는 들떠 있었다.

“차차 모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너무 적게 모였네요. 더 모여야 하는데. 왜 이렇게 더디지?”

고문관은 창에서 떨어져 슈마트라 초이와 디에네 비노쉬의 결박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이 놈들아. 네가 너희 년 놈들 때문에 체면이 말이 아니었어. 감히 도망을 쳐? 그러면 너희들이 살아날 수 있을 것 같았어? 응? 그래?”

고문관은 주머니에 숨겨 두었던 바늘을 꺼내 몰래 몰래 두 사람의 등짝을 바짝 긁어 내렸다. 시에나는 성스러운 의식을 만들기 위해 될 수 있는 한 두 사람은 건드리지 않을 것을 당부했지만, 고문관은 슈마트라 초이와 디에네 비노쉬를 괴롭히지 않고는 도저히 성질이 풀리지 않았다. 게다가 감시자로 함께 있는 젊은이도 두 사람이 그렇게 당하는 것에 관심을 두고 있지 않는 것 같았다. 도망치는 슈마트라 초이와 디에네 비노쉬를 발견했다는 젊은이는 앉아서 술만 벌컥벌컥 마셔 댈 뿐이었다.

“이 뼈까지 긁어낼 놈들!”

고문관은 굵은 바늘을 더욱 세게 쥐며 흥분을 참지 못했다.

“술 좀 더 갖다 줘!”

“예에?”

“술 좀 더 갖다 달라고!”

“아이고. 네. 네.”

고문관은 슈마트라 초이와 디에네 비노쉬의 등에 바늘을 꽂아둔 채 룸바르트가 내민 술병을 받아 나갔다. 룸바르트는 충혈 된 눈을 슈마트라 초이에게 고정시켰다.

“당신이 말한 정의는 참 편리하군.”

슈마트라 초이와 디에네 비노쉬는 너무 많은 피를 흘려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바늘이 꽂힌 등에서는 아직도 피가 불룩불룩 흘러나왔다.

“그런데 말이야. 그 때문에 내 아버지는 죽었어. 죽었다구! 그럼, 그 빌어먹을 결과는! 어떻게, 어떻게 책임질 거지?”

룸바르트의 눈시울이 점점 뜨거워졌다.

시에나를 지나 친 헤이치 페드론은 애써 태연하게 룸바르트를 인카르 신전 지하로 안내했다. 축축하고 어두운 계단을 얼마나 내려갔을까, 룸바르트가 불쑥 말을 꺼냈다.

“복수할건가요?”

“무, 무슨 소린가?”

룸바르트의 예리한 질문에 헤이치 페드론은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아까 그 조디악의 개가 아니었다면 친구를 구할 수 있었잖아요.”

“흐흠.”

헤이치 페드론은 잠시 생각하더니, 변명처럼 둘러댔다.

“생명을 살리는데 선택 같은 건 할 수 없는 거야.”

“네? 뭐라구요?”

“난 의사네. 시에나를 치료한 건 당연한 일이었지.”

“푸하하하.”

룸바르트는 실성한 듯이 웃어댔다. 너무 웃어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는 하지 마시죠.”

“마음에도 없다니!”

“사실은 증오하잖아요? 크크.”

“자네!”

“난 말이죠. 한 순간도 복수라는 생각을 놓칠 수가 없습니다. 아니 좀, 놓고 싶은데 그렇게 되지가 않아요. 계속해서 대리석 바닥에 피가 흐르는 장면이 떠돌아요. 그 피가 누구 피인지 알아요? 나의. 아버지의. 피죠.”

헤이치 페드론은 룸바르트의 살기에 놀라 흠칫했다.

“제일 후회스러운 건. 내가 아무 것도 한 게 없다는 겁니다. 난. 아버지를 죽인 그 놈을 끌어다가 아버지한테 했던 것처럼 칼로 쑤셔야 했다구요! 이 빌어먹을!”

룸바르트는 멈춰 서버렸고, 헤이치 페드론도 따라 섰다.

“자신을 너무 엄하게 다스리지 말게.”

“아뇨. 나란 놈은 원래가 그렇게 생겨먹었으니까. 벌 받을 만 합니다.”

룸바르트는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다시 걸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아. 자네의 아버지는.”

헤이치는 입을 딱 벌렸고, 슈마트라 초이는 얼른 디에네 비노쉬를 등 뒤로 감추었다.

“길을 좀 터주시오.”

“당신은!”

슈마트라 초이는 간곡히 말했다.

“나는 다시 돌아올 것이오. 잠시만 길을 터주시오.”

“저를 여기까지 데려 온 분들이에요!”

“이 여자는 죄가 없으니, 풀어줘야겠소.”

헤이치 페드론은 디에네 비노쉬를 보고 치를 떨었다. 두 사람의 얼굴은 눈과 코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퉁퉁 불었고, 간신히 걸쳐지는 옷 쪼가리 사이로 덕지덕지 엉긴 피들이 울룩불룩했다. 듀스 마블이 괜히 네오스에서 여기까지 디에네 비노쉬를 데려 오도록 한 것은 아닐 테지만, 이 정도로 가혹하게 대할 줄은 차마 생각도 못해 본 것이었다.

“그, 그러죠.”

“죄인이. 죄인이 무슨 요구 사항이 그렇게 많아?”

“응?”

헤이치 페드론은 갑자기 나서는 룸바르트를 눈을 크게 뜨고 쳐다보았다. 룸바르트는 쏜살같이 계단을 내려갔다.

“이, 이봐! 룸바르트!”

룸바르트는 헤이치 페드론이 부르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자신이 계단을 제대로 내려가고 있는지 느낌도 오지 않았다. 정신과 육체가 붕 떠버린 것만 같았지만, 몽롱한 정신을 놓지 않기 위해 룸바르트는 슈마트라 초이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대답해! 죄인이 언제부터 요구할 수 있었지?”

슈마트라 초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살인자가 언제부터! 그렇게 자유로울 수 있었냐구!”

룸바르트는 몸속을 흐르던 울분을 토하며 슈마트라 초이의 헤지고 터진 죄수복을 꽉 움켜쥐었다.

“룸바르트!”

헤이치 페드론이 소리 쳐 부르는 것과 동시에 룸바르트는 슈마트라 초이에게 주먹을 날렸다.

“으아아!”

퍽 소리와 함께 슈마트라 초이의 턱이 꺾였다. 룸바르트는 슈마트라 초이의 멱살을 다시 잡아 올렸다.

“당신!”

룸바르트는 슈마트라 초이를 흔들며 어깨를 들먹였다.

“도대체 왜! 왜 죽인 거야!”

“룸바르트! 룸바르트!”

헤이치는 허겁지겁 계단을 뛰어 내려와 룸바르트를 잡았다.

“이봐. 일단 말로 하게!”

하지만 룸바르트는 슈마트라 초이의 가슴을 내리치고 또 내려쳤다.

“왜 그랬어! 왜!”

슈마트라 초이의 몸이 기우뚱했다. 몸에 힘을 주지 않고 그대로 맞고 있으려니 흔들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슈마트라 초이는 룸바르트가 죽은 서기관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아보고 그대로 맞아 준 것이었다.

"가만두지 않을 거야!"

룸바르트는 슈마트라 초이를 치고 때리고 밀어냈다. 슈마트라 초이는 중심을 잃고 크게 휘청거렸다. 가파른 계단을 구르는 슈마트라 초이를 보고도 룸바르트의 분은 풀리지 않았다.

“룬 배니쉬 비 가스가이아 보이드 디스팽 슈마트라 스핀!”

놀란 헤이치가 룸바르트에게서 얼른 떨어졌다.

“자, 자네! 뭐 하는 거야!”

“사스콰치!”

시뻘건 빛이 나는 것 같은 룸바르트의 눈이 슈마트라 초이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슈마트라 초이의 그림자에 어두운 빛이 감돌더니 거대한 몸집의 사스콰치가 고개를 불쑥 내밀었다. 모두가 놀라는 것과 동시에 축축하고 비좁은 계단이 심하게 흔들렸다. 좁고 기다란 통로를 꽉 채운 사스콰치가 슈마트라 초이의 그림자에서 빠져 나오려고 발버둥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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