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io - 의식 - 13장. Incar’s Hunt. 사냥
| 20.12.30 12:00 | 조회수: 957


카시미르 산맥과 헬리시타 성 사이에 놓여진 들판을 힘차게 달려간 제노아의 기사들은 첫 번째 난관에 부딪혔다. 은빛 벽돌이 요요한 헬리시타의 성벽 아래였다.

“문을! 우선 문부터 뚫어!”

잔바크 그레이가 고래고래 소리를 치는 사이, 성벽 위에 있던 인카르 교단의 수련자들도 행동에 나섰다.

“늑대들의 왕 테라에게 바람의 힘을 빌리니, 엘리멘터들이여 우리와 함께 뿔과 같은 송곳니로 침범한 자를 벌하는 그대들의 놀라운 힘을 지금 이곳에 집중케 하라! 딤 윈드!”

성벽을 타고 강한 돌풍이 타고 내려와 기사들을 덮쳤다.

열 댓 명씩 짝을 지어 한꺼번에 외쳐대는 그들의 마법은 듀스 마블이나 시에나 같은 고위 술사와는 비교하지 못할 정도로 초라하고 한정적이었지만 효과가 있었다. 바람이 모여 돌풍을 이루어 성문을 파고들던 기사들을 향해 덮쳐 내렸다.

“크하!”

도끼를 찍어 성벽을 타던 기사들이 후드득 떨어지면서 기사들은 우왕좌왕 갈 곳을 잃었다. 그러자 수련자들은 두 번째 방어에 돌입했다.

“달빛의 여신 큔에게 발화의 힘을 빌리니, 엘리멘터들이여 우리와 함께 꽃처럼 아름답고 칼날보다 날카로운 그대들의 놀라운 힘을 지금 이곳에 집중케 하라! 플레어 비트!”

바람이 그치고 수 백 개의 불덩이가 기사들이 서 있는 땅을 향해 돌진했다.

“이런! 큰일 나겠어요!”

칸이 소리쳤다. 잔바크 그레이도 같이 소리쳤다.

“어떻게 좀 해 봐!”

파그노가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그래! 칸! 어떻게 좀 해! 이러다 타 죽겠어!”

“알았어요!”

칸은 불덩이를 이리저리 피하며 성문으로 달려갔다. 큼직한 덩치와 어울리는 빠르기로 성 문 앞에 도착한 칸은 불덩이를 피해 숨어 있던 기사들을 모아 쇠문을 내려찍었다.

“좋아! 이번에 기합을 넣어요!”

칸과 기사들은 자신들의 검이 부러지는 데도 계속 내려찍었다. 하지만 쇠문은 뚫리지 않고, 헤진 북 마냥 움푹 꺼질 뿐이었다.

“저리 비켜 봐요!”

칸은 기사들을 물리치고, 문틈에 섰다. 그리고 무뎌질 대로 무뎌진 얇은 칼날을 똑바로 세워 갈랐다. 움푹 꺼진 부분 때문에 쇠문을 이어주던 틈새가 벌어졌고, 칸은 그 틈을 노린 것이었다.

“오! 괜찮은 방법인데!”

기사들은 너도 나도 칸이 했던 것처럼 벌어진 틈새를 가르고 또 갈랐다. 끼잉 철 소리가 나자 칸은 모두를 불러 모았다.

“이리로! 곧 문이 쓰러질 거예요!”

그리고는 칸은 구령을 외치더니 기사들과 함께 오른쪽 어깨로 문을 밀었다.

“여, 열렸다!”

“문이 열렸어!”

기사들은 열린 문으로 속속 들어갔다. 파그노는 눈이 동그래진 잔바크 그레이에게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칸이 원래 힘이 세잖아.”

잔바크 그레이는 씨익 웃었다.

“그러게! 좋았어! 우리도 어서 가세!”

잔바크 그레이는 성문을 향해 달려 나갔다.

“그래! 가세! 뭐? 들어 간다구? 하지만! 잔바크! 하지만 말이야!”

파그노는 눈을 크게 뜨고 두리번거리며 잔바크를 뒤따랐다.

듀스 마블의 뒤로 앉아 있는 조디악들과 그 뒤를 지키고 있는 호위병들도 사뭇 긴장하고 섰다.

대리석이 반들 하게 미끄러지는 벽 아래 단상 주위에는 인카르의 사제단이 앉아 있었고, 그 중 몇은 일어나 의식의 준비를 돕고 있었다. 시에나도 그 중 한 명이었다.

다른 신전 내의 사제들은 루앙 광장에 집결하지 않았다. 그들은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준비하고 있었다. 듀스 마블은 아이언 테라클이나 아이리스 비노쉬가 쉽게 무릎을 꿇지는 않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루앙 광장의 호위는 지역에 흩어져 있는 사제들이 맡았다. 듀스 마블은 믿음직스러운 사제들을 둘러보았다. 지난 시간 동안 인카르 교단은 몸집이 매우 커졌다. 인카르 교단은 결코 트리에스테 대륙에서 무시할 수 없는 뗄 수도 없는 존재였다.

'그런데도 나를 넘어서려 하다니!'

듀스 마블은 턱을 크게 벌렸다. 이제부터 중요한 말을 시작할 것이었다. "헬리시타 여러분! 저기 살인마 슈마트라 초이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제 시작하는가 보다 하고 단상을 향해 환호성을 질렀다. 듀스 마블은 사람들의 환호성을 잠시 받아들인 후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저 자는 인카르를, 여기 헬리시타를 피로 물들였습니다!"

그 동안 슈마트라 초이는 단상 위로 끌어 올려졌다.

"그 피는 다른 누구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 바로 여러분들의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저 자의 광폭한 칼에 맞아 쓰러진 두 명은 바로 이 자리에 있는 우리 중 다른 누군가가 될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시에나는 나무의 잔향이 싱그럽게 풍기는 단상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검성 슈마트라 초이. 그에게는 노라크 교도들을 처단한 것 말고도, 청기사단으로서 인카르를 수호했다는 것 말고도 어쩐지 드문드문 떠오를 듯 한 영상이 있었다.

희끄무레한 기사의 모습. 슈마트라 초이와 참 많이 닮은 기사. 하지만 어디서 보았는지, 그게 누구인지 도저히 생각이 나지 않았다.

"때문에 우리 헬리시타는 가만히 있을 수 없습니다. 또 가만히 있어서도 안 됩니다. 반인카르적 행위를 용납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듀스 마블은 잠시 말을 마치고 시에나를 바라보았다.

시에나는 누군가 자기를 보고 있는 것을 느끼고 생각에서 깨어나, 눈빛이 쏘아져 오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시에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듀스 마블이 왜 자신을 쳐다보았는지 알고 있었다.

준비가 되었다는 신호를 보낸 후에, 시에나는 다시 단상을 향했다.

건조한 나무 기둥에 손과 발이 묶인 슈마트라 초이가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었다.

시에나의 신호를 받은 듀스 마블은 광장을 쭉 둘러보았다.

"이제부터 인카르와 트리에스테 대륙을 지켜내기 위한 사죄의식을 시작하겠습니다."

듀스 마블의 외침이 끝남과 동시에 인카르의 사제 하나가 두루마리를 검은 접시에 담아 가져왔다.

듀스 마블은 두루마리를 받아 펼쳤다.

모두의 눈길이 두루마리로 쏠린 채, 두루마리를 한번 쭉 내려 읽은 듀스 마블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자신이 직접 작성한 문서가 너무나 흡족하고 마음에 들었다.

"인카르 교단의 조디악들은 헬리시타에서의 불미스러운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트리에스테 대륙의 하나뿐인 정교이자 지도자로서 평화와 안정을 기하고자 하는 신의 단체 인카르는, 미세리아와 리케츠의 주기를 맞추어 악의 신 세라피에 버금가는 슈마트라 초이를 성스러운 의식을 통해 정화하도록 한다."

사람들은 침을 꿀꺽 삼키며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아직 달이 나타나지도 않았는데도 칠흑 같은 밤을 만난 듯 눈을 껌뻑거리기도 했다.

미세리아와 리케츠의 주기는 생성의 달이 파괴의 달에 가려지는 날이었다. 일년에 한번씩 찾아오는 이러한 주기는 사람들에게 공포심을 심어주었다.

그것은 단 한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대멸망, 그랜드 폴이 이 주기의 어느 날에 발생되었다는 사실이 전설처럼 이어지고 있었다.

듀스 마블은 이 주기를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알고 십분 활용한 것이었다.

차츰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들과 달리, 듀스 마블은 여전히 미소를 띤 채 자신이 미리 준비해둔 글을 또박또박 읽어나갔다.

"첫째, 제노아의 초이는 노라크 교도들을 처벌한 대가로 인카르 교단의 신임과 은총을 얻었으나 이는 모두 거짓이었기에 교리에 따라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게 한다."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슈마트라 초이는 원래 노라크 교도였소."

광장은 더욱 소란스러워졌다. 의문의 탄식이 여기저기서 피어올랐다.

"그는 평화로운 이 땅을 짓밟기 위해, 자신의 야망을 위해서 노라크 교도를 팔아넘기고 인카르 교단에 접근했던 것이오."

듀스 마블의 말이 끝나자마자 놀라움의 탄식이 광장을 가득 메웠다. 의구심은 어느 새 사라져 버렸다.

"역시! 어쩐지! 그랬었군!"

대중은 곧 듀스 마블의 말을 더욱 잘 듣기 위해 웅성거림을 멈추고 조용히 귀 기울였다. 잔인한 미소가 듀스 마블의 얼굴에 감돌았다.

"인카르 교단의 율법에 따라, '거짓'의 대가로 제노아의 초이의 혀를 자르겠소!"

듀스 마블은 말을 마친 즉시, 의식을 집행할 사제에게 신호를 보냈다.

신호를 받은 사제는 재빨리 슈마트라 초이가 혀를 내밀게 했다. 이런 일은 신속하게 끝내는 것이 좋았다

"자, 어서 혀를 내밀어라."

황홀하게 단상을 올려다보던 고문관은 슈마트라 초이가 꼼짝도 하지 않자, 발을 동동 굴렀다.

"아, 저런 건. 내가 했어야 하는 건데!"

시에나는 고문관이 입을 닫도록 노려본 후, 주위에 있던 사제들에게 고갯짓을 했다. 그들은 단상으로 올라가 슈마트라 초이의 입을 강제로 벌렸다.

은빛 칼날이 허공을 내려치고, 슈마트라 초이의 입에서는 철철 피가 넘쳐흘렀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사제가 은 검을 닦고 신호를 보내자, 듀스 마블은 두 번째 두루마리를 펼쳤다.

“둘째, 제노아의 초이는 자애롭게 거짓에 속아준 인카르 교단을 배신하고 스스로 조디악이 되어 인카르 교단을 능멸하려 했기에 교리에 따라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게 한다. “

듀스 마블은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두루마리를 읽어 내렸다. 피를 줄줄 흘리는 슈마트라 초이의 모습에 넋을 잃은 사람들은 듀스 마블이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잘 들리지도 않았지만, 곧 더욱 놀라게 되었다.

"인카르 교단의 율법에 따라, '배신'의 대가로 제노아의 초이의 양 팔을 자르겠소!"

듀스 마블이 신호를 보내자 사제는 또 다시 은검을 내려 그었다. 향긋한 나무 향은 어느 새 피비린내로 조금씩 바뀌었다.

몇몇 여자들이 자신들의 눈을 가리고, 아이들을 가슴으로 돌려 품었다. 잔인한 그 장면에 모두의 숨이 멈추는 듯 했다.

“엄마, 반짝거리는 마법은 언제 해?”

여자는 품속의 아이를 더욱 꼬옥 안았다.

사람들은 조금씩 웅성거렸지만, 누구도 움직이지는 않았다.

듀스 마블은 슈마트라 초이의 팔이 잘려나간 것을 보고, 바로 세 번째 두루마리를 펼쳤다. 오로지 슈마트라 초이를 제거하는데 집중했다.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머리 속에 들어오지 않는 듀스 마블이었다.

“셋째, 제노아의 초이는 청기사로서 인카르 교단을 수호하겠다는 맹세를 저버렸으므로 인카르 교단과 조디악 앞에서 맹세했던 것들을 다시 바쳐야 한다.”

사람들은 듀스 마블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서로 쳐다보며 웅성거렸다.

신호를 받은 사제의 움직임을 보고서야 사람들은 가냘프게 탄식했다.

시에나는 단상 아래 있던 디에네 비노쉬를 부축해 올려주고는 멀리 골목으로 이어지는 길로 눈을 돌려 버렸다. 멍할 만큼 조용한 광장의 분위기는 시에나를 거북하게 만들었다. 아니, 단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 때문에, 그리고 이제 벌어질 일 때문에 거북했다.

‘무엇에 홀리신 걸까?’

시에나가 노라크 동굴에서 소환된 후, 듀스 마블은 시에나를 자덴으로 보내었다. 자덴에서 실패하고 돌아왔음에도 불구하고 듀스 마블은 그 문제를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먼저 선점해야만 한다던 노라크 동굴에 관해서도 까맣게 잊은 듯 했다. 듀스 마블은 오로지 사죄의식에 매달려 있었다.

‘이상해…….’

서기관 티몬 겐조와, 다이몽 루세를 죽인 슈마트라 초이는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그의 부인 디에네 비노쉬까지 단상에 세우는 것은 전혀 이성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같은 혈족을 끔찍하게 여기는 세지타족에서도 분명 반발할 만한 구실거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듀스 마블은 모두가 걱정스럽게 생각하는 일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시에나는 알 수 없는 듀스 마블의 속내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고운 이마도 어느새 잔뜩 찌푸려졌다.

얼굴을 찌푸린 것은 시에나뿐만이 아니었다. 비위 좋게 생긴, 턱이 몇 겹으로 축 늘어진 사내들도 이맛살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창백한 얼굴을 한 이들은 피범벅이 된 단상을 보다가 그 자리에서 속을 게워내기도 했다.

사제들이 디에네 비노쉬를 슈마트라 초이의 옆에 매달기 시작하자, 디에네 비노쉬는 슈마트라 초이를 향해 말하기 시작했다. 지쳐버린 디에네 비노쉬는 약한 숨을 끈질기게 버티며 간신히 입을 떼고 있었다.

“어쩐지. 마지막인 것 같군요.”

얼굴이 온통 피로 번진 슈마트라 초이는 대꾸를 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함께 할 날들이. 앞으로 더 많았으면 했는데…….”

디에네 비노쉬의 눈이 흔들렸다. 슈마트라 초이는 몸을 흔들었다.

“으어어!”

고인 피를 삼키지 못해 나는 쉰 소리는 광장에 모여 있던 사람들을 깜짝 움찔하게 만들었다.

“가만히 있어!”

사제들은 슈마트라 초이를 노려보고는 디에네 비노쉬를 매달은 끈을 마저 확인했다.

“하지 못했던 말을 할게요.”

디에네 비노쉬의 음성이 점차 낮아지며 소리가 갈라졌지만, 별 수 없었다. 디에네 비노쉬는 남은 기력으로 최선을 다해 말하고 있었다.

“당신이 생각한 비극은. 없었어요.”

끈을 확인한 사제는 은검을 들고 디에네 비노쉬를 향해 걸어왔다. 디에네 비노쉬의 예리한 감각이 사제가 가까워짐을 알리자 디에네 비노쉬는 조금 빠르게 말했다.

“가리온은. 당신의 아들이에요. 가리온의 친모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았지만, 당신을 배반하는 행동은 하지 않았어요.”

“우어어어!”

슈마트라 초이는 어떻게든 몸을 떼어내 디에네 비노쉬를 구하고 싶었지만, 두 팔이 없어진 그는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사제는 은검을 번쩍 들어올리고 듀스 마블을 쳐다보았다. 듀스 마블은 얼른 손짓을 했다. 디에네 비노쉬의 목소리가 워낙 작아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곧 죽을 죄인이 계속 중얼거리는 것이 불쾌하기 그지없었다.

“거짓이 아니에요. 유모에게 들었어요. 조금 더 일찍. 말했어야 했는데…….”

단상 위로 동그란 눈물 자국이 꾹꾹 생겼다.

“그래서 이렇게 되나 봐요.”

사제는 그대로 검을 내렸고, 모두들 눈을 질끈 감는 사이로 바람이 불었다.

“안돼!”

사람들은 목소리의 정체가 누구인지 궁금했지만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단상 위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려는지 눈을 뜨지 않고도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몇몇 사람들이 울음을 터트리는 가운데 시에나는 단상을 등지고 침입자를 막아섰다.

아직 의식이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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