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io - 의식 - 14장. Malignancy. 적의
| 20.12.30 12:00 | 조회수: 1,052


시에나는 듀스 마블을 올려다보았다.

듀스 마블이 고개를 끄덕임과 동시에 시에나는 인카르의 사제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리고 서둘러 정신력을 끌어 모아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클로비스가 먼저였다.

"아크 브라스!"

클로비스의 마법이 루앙 광장에 넓게 퍼져 나갔다.

다급한 마음의 시에나도 외쳤다.

"에어 멤브라인!"

얇고 견고한 막에 클로비스의 마법이 빗나갔다.

시에나는 클로비스를 노려보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클로비스를 막기 위해 달려 나오려던 인카르의 사제들 대부분이 그대로 정지해 있었다. 몇몇 만이 재빨리 방어막을 쳐 움직이고 있었다. 조디악 쪽의 상황도 비슷했다.

클로비스는 광장에 서 있던 모든 사람들을 마비시켰던 것이다.

"하위 마법사는 아닌가 보군. 제법이야."

클로비스는 주홍색 오클라스를 펄럭이는 시에나에게 말했다.

시에나는 문득 비슷한 상황이 전에도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얼른 머리 속에서 지워버렸다.

지금은 시에나의 앞에 전혀 처음 보는 마법을 쓰는 자가 나타나 의식을 방해하려 했다. 그것을 막는 것이 시에나의 임무였다.

"인카르의 사제단을 우습게 보셨나 보군요."

시에나는 두려워하고 있음을 숨기기 위해 짐짓 큰 소리로 반박했다.

클로비스는 시에나의 말에는 신경 쓰지 않고, 그대로 노려보며 말했다.

"내 놓아라. 디에네 비노쉬를. 풀어주어라."

시에나는 듀스 마블을 올려다보았다. 슈마트라 초이가 아닌 디에네 비노쉬를 요구한 것은 상당히 뜻밖이었다.

듀스 마블은 시에나에게 지시하지 않고 직접 나섰다.

"당신은 누군가?"

클로비스는 그 질문에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디에네 비노쉬를 구해 쉬도록 해주고 싶었다.

"무고한 사람을 모욕하고 죽이려는 상황에서 그런 건 필요 없지."

무고한 사람이라는 말이 듀스 마블의 신경을 건드렸다. 듀스 마블은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길게 내밀었다.

"그래? 그럼 자네가 지금 인카르 교단의 성스러운 의식을 방해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는가?"

듀스 마블은 난데없이 나타난 사내를 향해 무겁게 소리쳤다.

클로비스는 지지 않고 맞섰다.

"의식? 성스러운 의식이라고 했나? 그렇다면 하나만 묻지!"

듀스 마블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 의식을 데비나님께서도 알고 계신가!"

듀스 마블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뭐, 뭣이!"

비나엘르 파라이의 중간 이름을 아는 사람은 트리에스테 대륙에 듀스 마블 자신밖에 없다고 생각해왔었다. 갑자기 나타난 사내가 의식을 방해하고 그 이름을 들먹일 줄은 전혀 상상도 못했던 것이었다.

"네 놈이 어떻게!"

듀스 마블은 뒤통수를 후려 맞은 듯한 어지러움에 잠시 얼굴을 떨어뜨렸다. 저런 사내가 나타났다는 것은 비나엘르 파라이가 자기 모르게 뒤에서 다른 일을 꾸미고 있다는 의심을 더욱 확실하게 해주었다.

"데비나님은 역시 내가 생각했던 대로!"

듀스 마블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다가 슈마트라 초이에게 시선이 멈추었다.

온 몸이 피로 적셔 있었어도 아직 목숨이 붙어 있는 검성이었다.

"지금. 지금뿐이야! ......시에나! 검성부터 없애!"

듀스 마블은 다급히 소리치고 몸을 돌렸다.

시에나의 마법으로는 저 사내를 상대할 수 없을 것이었다. 시에나가 실패하면 자신이 대신 죽여야 했다.

"내가 반드시 숨통을 끊어 놓겠어!"

듀스 마블은 슈마트라 초이에 대한 적의를 한껏 드러냈다.

"듀스 마블님!"

시에나는 안으로 사라지는 듀스 마블을 보며 어리둥절했지만, 곧 자신은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알아챘다. 시에나는 몸을 비스듬히 움직여 클로비스와 검성을 번갈아 보았다. 그 옆에 은검을 내린 채로 굳어버린 사제와 디에네 비노쉬도 보였다.

시에나가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사이 클로비스가 먼저 나섰다.

"너희들은 결코 그를 건드리지 못할 것이다!"

클로비스는 그대로 디에네 비노쉬를 향해 돌진했다. 시에나는 서둘러 무언가 해야만 했다.

"내, 냉혈한 여신 파르카에게, 복수의 힘을 빌리니. 엘리멘터들이여! 나와 함께 피보다도 뜨거운 냉기로 그대들의 놀라운 힘을. 지금 이 곳에 집중케 하라! 아이스 스프레드!"

시에나는 생각나는 대로 주문을 외웠지만, 고통스러운 얼굴로 정지된 채 서 있는 슈마트라 초이와 디에네 비노쉬의 얼굴을 보자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얼음 덩어리는 부지직거리며 피식 잦아들었다.

"쓸모없는 것! 정신 차려라!"

쏜살같이 달려 온 듀스 마블이 시에나의 뺨을 힘껏 내려쳤다. 시에나는 너무도 놀라 더 이상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듀스 마블은 단상을 노려보며 주문에 들어갔다.

"불행의 쾌락을 선사하는 세라피에게 비극을 청하노니! 엘리멘터들이여! 나와 함께 진홍빛 나락을! 지금 이곳에 집중케 하라! 브 브라이머!"

듀스 마블의 입이 다물어지기도 전에 이십여 명 정도의 스켈리톤이 땅을 뚫고 불쑥 튀어 올랐다.

스켈리톤을 본 시에나는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흑마법!"

시에나는 든든히 기대왔던 듀스 마블의 등을 어색하게 바라보았다. 듀스 마블이 흑마법을 한다는 소문이 암암리에 돌기는 했지만 설마 했던 시에나였다. 듀스 마블이 오로지 인카르 교단을 위해 바른 일만 해왔다고 믿으려 했었다. 하지만 눈앞의 광경은 시에나의 믿음을 송두리째 짓이겨 놓았다.

스켈리톤들은 단상을 파헤치며 클로비스를 향해 삐거덕 다가갔다. 그들이 숨 쉬듯 가슴을 들먹거릴 때마다 사악한 검은 연기가 한 무더기씩 뿜어져 나왔다.

클로비스는 디에네 비노쉬 앞에 서며 듀스 마블을 노려보았다.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는군."

"목적이 옳다면 방법은 상관없지."

듀스 마블은 스켈리톤을 보내놓고 천천히 단상 위로 올라섰다.

"에어 멤브레인!"

클로비스는 시에나처럼 보호막부터 쳤다. 사악한 연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클로비스는 잘 알고 있었다.

"걱정 말게. 이 자가 먼저니까."

듀스 마블은 넓은 얼굴로 배시시 웃더니 슈마트라 초이를 툭툭 쳐보았다.

"너무나 잘 계획된 일이었어. 틀림없이 진행되어야만 하는 일이기도 했지. 빈틈을 주지도 않았어.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몰라."

듀스 마블의 얼굴에 잔인함이 그대로 배어 나왔다. 그것은 적의를 넘어서 일종의 결의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니, 네가 어디서 어떻게 나타난 놈인지는 몰라도! 이 의식을 방해해서는 안 되는 것이고! 막게 두지도 않겠다!"

듀스 마블이 토해내는 말에 시에나는 놀라움을 감추기 위해 얼른 입을 손으로 막았다.

'듀스 마블님이 이 일을 계획했다고?'

클로비스는 듀스 마블을 노려보았다.

"모든 사건을 네가 조작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슈마트라 초이가 데비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안 이상, 네 자리를 잃지 않기 위해서 조치가 필요했겠지."

"크흐흐흐. 나는 조디악이다! 그리고 대변인이다! 그 누가? 그 누가? 나를 막을 수 있겠는가!"

듀스 마블은 미친 듯이 웃어댔다. 정지해버린 루앙 광장과는 너무나 극명하게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 차근차근 명성을 쌓아 바싹 쫓아오는 게 싫었어. 애써 잡아들인 후에, 진실을 알게 되었네."

듀스 마블의 어깨가 잔뜩 움츠러드는 것 같더니, 뻘겋게 충혈 된 눈으로 클로비스를 노려보았다.

"나는 데비나 따위에게 이용당하지 않아! 그 여자가 무얼 꿈꾸고 있는지 알아! 그래서! 나는! 나는 오늘 슈마트라 초이를 죽이고 두 번 다시 이 트리에스테 대륙에 그런! 그런 악몽이 생기지 않게 할 것이다!"

듀스 마블이 몸부림치는 것과 동시에 스켈리톤들도 클로비스가 만든 보호막을 향해 몸부림쳤다.

헤이치 페드론은 실성한 사람처럼 보이는 듀스 마블을 바라보다 다시 창 아래로 숨었다.

"...... 자네. 어떻게 생각해?"

"크크...... 여기. 트리에스테 대륙은 불바다가 될 겁니다. 크크. 미친놈들이 너무 많거든요. 그러니까 반드시 불바다가 될 겁니다."

"룸바르트!"

헤이치 페드론은 룸바르트를 걱정스럽게 보았다.

"난. 괜찮습니다. 괜찮아요. 괜찮다구요. 하지만 트리에스테 대륙은 불바다가 될 겁니다. 크흐."

"쉿! 누가 와!"

헤이치 페드론은 멀리부터 들려오는 인기척 소리에 룸바르트의 입을 막았다.

시에나도 루앙 광장으로 들어오는 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먼지가 자욱하게 일었다. 쿵쿵 걸어오는 소리가 루앙 광장에 가득 퍼졌다.

"저건 뭐야?"

듀스 마블의 눈주름이 새롭게 꿈틀거렸다.

"저 자가, 듀스 마블이네."

"그래, 그런데 여기 좀 이상해. 사람들이 움직이질 않아."

"맞아요. 정지된 것 같아요."

잔바크 그레이는 칸과 파그노의 말은 귀담지 않고 듀스 마블을 향해 걸었다. 얼른 조디악 회의에서 느꼈던 수치심을 씻고, 검성 슈마트라 초이를 구한 영웅이 되고 싶었다.

잔바크 그레이는 듀스 마블에게 크게 외쳤다.

"나를 기억하지 못하겠소?"

듀스 마블은 과장되게 얼굴을 이리저리 살피더니 고개를 갸우뚱했다.

"글쎄. 버르장머리 없는 놈들이 워낙 많아 놓아서 말이지. 크흐흐흐흐!"

듀스 마블은 잔바크 그레이를 조롱하며 비웃었다. 잔바크 그레이는 턱을 굳게 물어 보이고는 큰 소리로 다시 외쳤다.

"제노아의 기사들이 검성 슈마트라 초이님을 모시러 왔소! 어서 그 분을 풀어 주시오!"

듀스 마블은 루앙 광장을 들어서는 기사들의 무리를 한번 훑어보고는 말했다.

"싫다면?"

잔바크 그레이는 잠시 멈칫하다가 서슴없이 외쳤다.

"힘으로라도 모셔 갈 것이오!"

"뭐? 크하하하하!"

듀스 마블은 실컷 웃고서는 신전을 올려다보았다.

"이보시오! 조디악 여러분! 저 조그마한 제노아 놈들이 도전을 했소! 얼른 내려와 장단을 좀 맞춰 주겠소? 나는 웃음이 나서 싸우질 못하겠소!"

클로비스의 마법을 피한 조디악들은 얼굴을 굳히며 머뭇거렸다. 그래도 아직은 듀스 마블의 힘이 두려웠는지 몸을 슬금슬금 움직이는 척 했다.

"우습지도 않은 것들."

듀스 마블은 곧바로 제노아의 기사들을 향해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불행의 쾌락을 선사하는 세라피에게 비극을 청하노니!"

파그노가 잔바크 그레이를 재촉했다.

"어, 어쩌지? 마법을 쓰는군!"

"어쩌죠? 어쩌죠?"

안달이 난 파그노와 칸을 향해 잔바크 그레이는 달릴 태세를 갖추고 말했다.

"칸, 이번에도 잘 부탁하네!"

"네? 뭐라구요?"

잔바크 그레이는 루앙 광장의 초입을 가득 매운 오십여 명의 기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자! 가자! 슈마트라 초이님을 구하고 듀스 마블을 처단하자!"

잔바크 그레이가 쏜살같이 달려 나가자 뒤에 있던 기사들도 발을 쿵쿵거리며 뒤따랐다.

"잔바크! 저 자는 지금 마법을 하는데!"

파그노가 우는 소리를 하며 발을 떼려 하지 않았다.

"걱정 마세요! 제가 지켜줄게요!"

"칸! 그래도 저기서 마법을 쓰는데, 하지만 마법을 쓰는데!"

칸은 파그노를 이끌고 루앙 광장을 향해 뛰어들었다.

정지한 사람 조각 사이로 제노아의 기사들이 회색 물결을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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