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ellow Yesterday - 역사의 시간 - 1장. Worst. 비통한
| 21.01.06 12:00 | 조회수: 951


가리온은 루앙 광장이 그렇게 넓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었다.

노라크 동굴의 원정을 나서며 청기사들은 12신상 사이로 행진을 했었다. 가리온은 청기사단을 구경하기 위해 우르르 줄지은 사람들 틈에서 아버지의 모습이 혹시나 있을까 찾아보았었다. 하지만 익숙한 얼굴을 채 찾기도 전에 청기사단은 루앙 광장을 벗어나 있었다. 몇몇 아이들이 청기사단을 따라 뛰어나왔지만 아버지는 없었다. 그 때 가리온은 루앙 광장이 너무도 좁다고 느꼈다.

하지만 다시 온 헬리시타와 루앙 광장은 너무도 컸다. 헬리시타에서 루앙 광장까지가 너무 멀었고, 루앙 광장에서 단상까지가 또 멀리 있었다.

“저기…… 인가.”

가리온은 천천히 걸었다. 처음에는 피를 뒤집어쓰고 나무에 매달려 있는 사람의 얼굴이 또렷하게 들어오지 않았다. 더듬고 훑어볼수록 가리온의 눈에 눈물이 스며 올랐다.

“하아.”

붉은 피 아래로 광대뼈가 수척하게 드러난 아버지의 모습에 가리온은 원통한 한숨을 뱉었다.

그런 가리온의 눈앞에 사람 하나가 나타나 시야를 방해했다. 가리온이 청기사단이 원정을 떠나던 날 봤던 사람이었다.

그때, 그는 권위적인 몸짓으로 청기사들을 독려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곁에 서기 위해 자리싸움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지금은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얇은 입술을 번쩍 벌리고 있는 것이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고 있는 듯 했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듯 보였지만 누구도 그의 곁으로 가지 않았다. 그러자 가리온을 등지고 서서 갑자기 은검을 휘둘렀다.

“안돼.”

가리온은 좀 더 빨리 걸었다. 몸은 점점 심하게 앞뒤로 흔들렸지만 눈만은 고정되어 있었다. 눈에 은검이 잘려 공중으로 튀는 것이 비치자 가리온은 뛰기 시작했다.

“안돼.”

검이 잘린 사람은 당황했는지 어쩔 줄 모르며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그러더니 몸을 확 돌렸다.

항상 얇게 반짝거리던 그 사람의 눈은 무언가에 홀린 듯이 흐릿해 있었다. 그는 또 다시 무엇이라고 외치는 것 같았다. 그는 동강 잘라진 검 자루를 들고 있었다.

저 검으로 아버지를 죽이려 했다는 생각에 미치자 가리온은 그를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듀스 마블! 가만두지 않겠다!"

그는 그제서야 가리온의 존재를 의식한 듯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눈물샘이 다시금 차오르자 가리온은 내내 뱉고 싶었던 그 말을 외쳤다.

"아버지!"

뜨거운 바람이 가리온의 온몸을 휘감아 크루어까지 달구었다. 그 어떤 것도 가리온을 막을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나의 아버지를! 나의 검성을! 더 이상 건드리지 말아라!"

가리온은 그렇게 멀어 보이던 작은 나무 단상을 한숨에 뛰어 올랐다. 크루어와 함께 가리온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비나엘르 파라이는 꼼짝하지 않고 달려가는 가리온을 바라보았다. 아버지를 뒤쫓는 아들이 항상 저런 모습일까 궁금해졌다.

“우리도 가야 해요.”

“….”

비나엘르 파라이는 에바를 돌아보지도, 에바의 말에 대답하지도 않았다. “또 가만히 계실 건가요?”

에바는 데비나가 어떤 속셈으로 멈춰 서버렸는지 알 수가 없었다. 가리온에게 아버지가 곤경에 빠졌다는 것을 알려 준 것은 데비나였고, 이곳까지 이끌고 온 사람도 데비나였다. 때문에 에바의 생각으로는 데비나가 가리온을 돕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데비나는 가만히 있었다. 여기까지 오기 전, 다크 홀에서는 절벽에서 괴물을 만들어 내서 가리온과 파르카 신전의 일행들을 위험에 빠뜨렸고, 헬리시타까지 오는 내내 이계의 생명체들과 싸우는 가리온을 돕지도 않았다. 에바는 점점 더 데비나를 이해할 수가 없어졌다. 에바는 혼자서라도 가리온을 도우리라 마음 먹었다.

“전 가겠어요.”

루앙 광장을 향해 나가는 에바를 비나엘르 파라이는 붙잡지 않았다.

‘듀스. 왜?’

비나엘르 파라이는 힘들게 단상으로 눈을 옮겼다.

단상 위에는 비나엘르 파라이가 믿고 싶지 않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아아.”

피범벅이 되어 버린 칼의 아들과, 자신이 친아들처럼 기른 아들이 나란히 서 있었다. 비나엘르 파라이는 꽉 막혀 오는 가슴에 눈살을 찌푸렸다.

“이게 아닌데.”

고개를 젓던 비나엘르 파라이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칼. 이게 아니에요. 난 당신을 원했을 뿐이에요.”

그리고는 다짐하듯 자신에게 속삭였다.

“내가 원하는 건 나의 칼이야. 그래. 그것만 생각하자. 난 다시 만날 거야. 만날 수 있어. 그렇게 할 거야.”

비나엘르 파라이는 루앙 광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에바는 중앙에서 싸우는 자덴의 기사들과 사제들 사이로 진입하고 있었고, 가리온은 크루어를 들고 단상을 향해 뛰어 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한 명이 가리온과 듀스 마블을 향해 달려 가고 있었다.

놀란 듀스 마블은 허둥대다 슈마트라 초이의 뒤로 몸을 숨겼다. 단도만하게 남은 잘린 검이 듀스 마블이 가진 유일한 무기였다. 듀스 마블은 검을 슈마트라 초이의 목에다 들이댔다.

“오지마! 이 자를 죽일 거야!”

가리온은 멈추지 않고 오히려 듀스 마블에게 소리쳤다.

“죽어라! 내 검에!”

분노와 비통한 슬픔이 가슴을 아릿하게 만들었고, 가리온의 시야를 듀스 마블의 노랗고 넓은 얼굴에 고정시켰다. 가리온은 그대로 듀스 마블을 향해 크루어를 찍어 내렸다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어!’

말은 필요 없었다. 그저 검을 꽂아 비틀어 뽑아내면 끝나는 것이다.

“에어 멤브레인!”

갑작스레 투명한 막이 가리온의 크루어를 받쳐 올렸다. 크루어는 보호막 때문에 더 이상 듀스 마블 가까이 갈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가리온은 멈추지 않았다. 여전히 가리온의 시야는 듀스 마블의 인중에 겨누어져 있었다. 크루어는 흰 빛으로 불타기 시작했다. 가리온은 누르던 힘을 거두고, 다시 한 번 크루어를 들어 올렸다.

시에나는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것을 예감하고 서둘러 듀스 마블에게 말했다.

“오래 버틸 수 없겠어요. 어서 가세요.”

듀스 마블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시에나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어서 가시라구요!”

“그, 그래. 그래!”

듀스 마블은 몇 걸음을 가는 듯 하다 다시 돌아왔다.

“이 자를 죽이고 가야 해.”

시에나는 하얗게 빛나는 검이 곧 닥쳐올 판에 슈마트라 초이를 죽이겠다고 돌아 온 듀스 마블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서 가세요! 곧 방어막이 깨질 거예요!”

그러나 듀스 마블은 포기하지 않았다. 아니,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듀스 마블은 지금의 상황보다 더한 공포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물림 된 피는 과거를 돌릴 수 있는 재료야. 그 여자는 알고 있어. 그러니까 반드시 죽여야 해.”

듀스 마블은 끝까지 가지고 있던 검을 들어 올렸다. 잘려나간 칼 끝이 슈마트라 초이의 목을 향해 예리하게 빛났다.

“제발 우선은 피하세요!”

시에나의 간곡한 외침과 함께 유리조각에 금이 가듯이 쩍 갈라지는 소리가 울렸다.

“아아!”

보호막은 깨져 사라졌고, 시에나의 왼쪽 귀를 아찔하게 스쳐간 크루어는 듀스 마블의 검을 꿰뚫었다.

“아…. 아아….”

희게 빛나는 검광이 코앞까지 스치자 듀스 마블은 할 말을 잃은 채로 검에서 손을 떼고 주춤주춤 물러섰다. 어안이 벙벙해진 듀스 마블은 작은 코를 타고 흘러내리는 피를 손으로 훔쳐냈다.

“아아….”

“넌, 내 아버지를 죽일 수 없어.”

가리온은 듀스 마블을 노려보았다.

듀스 마블은 체념한 듯 두 팔로 무릎을 짚으며 고개를 숙였다. 듀스 마블에게는 그 어떤 힘도 남아있지 않은 듯 했다.

“잠깐만요!”

시에나는 한번 더 시간을 끌어 듀스 마블을 탈출시키고 싶었다. 시에나에게는 듀스 마블이 아버지와 같았다.

“내 얘기를 들어봐요.”

“비켜.”

가리온은 마법사를 쳐다보지도 않고, 여전히 듀스 마블만을 두 눈 가득 채우고 있었다. 다른 그 무엇도 끼어들 틈이 없을 것처럼 가리온의 목소리는 싸늘했다.

시에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크루어를 든 기사에게 말했다.

“당신, 크루어를 들고 있군요.”

시에나는 눈을 최대한 돌려 크루어의 무늬를 확인했다.

“죽기 싫으면 비켜.”

가리온은 검은 거두지 않고 마법사를 밀쳐내려 했다.

“청기사죠? 당신은 청기사죠?”

시에나는 꼿꼿이 버티려 애를 썼지만 곧 가리온의 압도적인 힘에 밀려났다. 그래도 시에나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크루어에 맹세한 청기사라면 인카르를 수호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가리온은 가만히 아버지의 숨결을 찾아보려 했다. 아직 살아계시다고 확신하고 싶었다.

때 묻은 피는 전혀 선명하지 않았지만, 핏물이 얼룩진 얼굴에서 미약한 사람의 숨이 조금씩 전해져 왔다. 가리온은 심장이 땅 끝까지 꺼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아직, 아직은 살아 계시다!’

기사가 멈칫하는 듯 하자 시에나는 다시 말했다.

“조디악은 곧 인카르예요. 저분은 조디악이구요! 조디악 듀스 마블님이라구요!”

가리온은 가만히 크루어를 바라보았다.

스파이더 퀸을 전멸시키고 살아남은 후, 크루어를 높이 치솟았던 때가 떠올랐다. 가리온은 그 일을 자랑스레 아버지에게 말할 생각이었다. 그 일을 말하고 나면 아버지도 자신을 당당하고 영예로운 기사로서 인정해 주실 거라고 믿고 있었다. 그런 포부와 희망을 가리온은 불과 사흘 전까지 품고 있었다.

가리온은 웃을 수 밖에 없었다.

“웃기는 소리.”

가리온은 시선을 크루어 끝으로 옮겼다. 잘린 검이 시야를 방해했지만 듀스 마블의 윤곽은 정확히 들어왔다. 충분히 없앨 수 있는 거리였다.

"나는 아직 크루어에 맹세하지 않았을 뿐더러."

가리온은 크루어를 빙글 돌려보았다. 반짝거리는 날에 자신의 얼굴이 비쳐 들었다.

"지금은 아버지를 찾아야 할 때다."

시에나는 눈 앞의 기사가 자비를 베풀 마음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기사는 시에나의 말을 귀담기는커녕 눈조차 마주치지 않고 있었다. 그의 마음은 오로지 듀스 마블과 슈마트라 초이로 향해 있는 것이 분명했다. '어쩌지?'

기사는 검을 아래로 기울여 듀스 마블의 정수리를 노리고 있었다.

시에나는 듀스 마블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인카르의 사제들은 여전히 제노아군과 씨름하고 있었고 조디악들은 두려웠는지 몸을 피했다. 비나엘르 파라이의 모습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질 않았다.

시에나는 마른 입술을 적셨다.

'어쩔 수 없어.'

시에나는 기사를 향해 힘껏 외쳤다.

"가장 불행한 자 세라피여! 암흑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의 빛을 소멸하여 허기를 채우기를! 블라인드니스!"

시에나는 감추었던 흑마법의 주술을 외쳤지만 표정은 전혀 밝지 않았다. 여전히 시에나와 듀스 마블에게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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