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ellow Yesterday - 역사의 시간 - 9장. Tragedy. 세지타족의 비극
| 21.01.06 12:00 | 조회수: 987


차가운 바다가 몸을 감싸 안았을 때, 에바는 모든 것이 끝나는 줄 알았다.

‘나는. 이렇게 가는 건가.’

호흡이 곤란해졌다.

‘어쩌면, 그래. 가슴 아파할 사람도 없잖아? …잘됐어.’

눈이 짜릿해왔다.

‘차라리. 잘 된 거야.’

약한 심장이 가슴을 조이도록 뛰어 올랐다.

하악. 하악.

고통스러웠다. 에바의 몸에서 스르르 힘이 빠져나갔다.

찰싹. 찰싹.

뺨이 얼얼했다.

“에바! 일어나! 눈을 떠!”

에바는 희미하게 눈을 떴다.

“바보야! 왜 그랬어? 왜 뛰어 들었어?”

펑펑 눈물을 흘리며 에바를 깨우는 네디앙의 모습에 에바는 할 말을 잃었다. 네디앙은 에바보다 조금 어렸는데, 고운 심성으로 세지타족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몹시 부러운 공주님이었다.

‘질긴 목숨. 죽지도 않았어…. 내가 자살했다고 둘러댄 건가?’

네디앙은 아직 에바가 깨어난 줄 모르고 계속해서 따귀를 때리고 어깨를 흔들었다.

“이제.”

에바는 벌떡 일어났다.

“이제 그만해.”

네디앙의 눈이 번뜩 뜨였다. 에바의 뺨을 쓰다듬고 몸을 감싸 안았다.

“그냥 죽게 두지 그랬어.”

에바가 아무렇지 않은 듯이 이야기하자, 네디앙이 에바의 따귀를 세게 올려 붙였다.

“너 따위 구해줄 필요도 없었어!”

그리고 엉엉 울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네디앙을 달래기에 바빴고, 에바는 그 틈을 타서 방으로 돌아왔다.

아이리스 비노쉬는 이 일을 곧 알게 되었다.

“북쪽으로 가거라.”

아이리스 비노쉬는 에바의 눈 한번 마주치지 않았다.

“모이라이가 제일 갈만할 거다.”

에바는 저항하지도 기뻐하지도 않았다. 이곳에 있는 자신이 괴로웠고, 또 괴로울 수밖에 없는 자신이 미웠다.

“너도 알겠지만.”

아이리스 비노쉬는 질 좋은 포도주를 삼켰다.

“넌 세지타족이 아니다.”

에바는 똑바로 아이리스 비노쉬를 바라보았다.

‘그럼 난 뭐지?’

“북쪽으로 가면, 파르카 신전이라는 곳이 있다.”

아이리스 비노쉬는 또 한번 포도주를 삼켰다.

“그곳은 어중이떠중이들을 모두 받아준다고 들었다.”

아이리스 비노쉬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더 이상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들지 말거라.”

에바의 눈에서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고통? 내가 더 고통스러워!’

에바는 서둘러 짐을 꾸렸다. 짐이라고 해 봤자, 활과 화살이 전부였다.

“정말 가려고? 가지마!”

네디앙은 에바의 짐을 끌어내 풀려고 했다.

“상관하지마.”

에바는 네디앙을 밀쳤다.

바닥에 나동그라진 네디앙을 두고 에바는 서둘러 나와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다른 누구에게도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마구 달렸다.

그래도 마지막으로 네오스의 성을 뒤돌아 봤을 때, 뒤쫓아 온 네디앙이 외쳤다.

“꼭 돌아와! 다시 만날 거야! 우리는 가족이니까!”

에바는 눈물을 훔치며 다시 돌아보지 않았다.

‘두 번 다시 만나지 않아. 두 번 다시 아파하지 않을 거야.’

아이리스 비노쉬는 도망치듯 뛰어가는 에바를 창가에서 낮게 지켜보았다.

성벽 한쪽이 내려앉은 헬리시타 하늘 위로 우중충한 구름 기둥이 흔들렸다. 전사자들을 갉아 먹으려는 야생 그리폰이 떠돌아다닐 만도 하건만 성벽은 싸늘하게 조용했다. 아마도 성벽으로 다가오고 있는 오염체들 때문인 듯 했다.

세지타족은 오염체들을 뚫고 조심스레 헬리시타로 들어섰다. 군데군데 성벽을 지키던 인카르 교단 사제들의 얇은 오클라스가 돌에 깔려 부석거리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벽돌에 짓이겨 퍼렇게 멍들은 몸뚱이와 찢겨진 얼굴은 차마 보지 못할 광경이었다.

“도대체 여기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네디앙이 두려운 얼굴을 하자 아이리스 비노쉬가 차갑게 대꾸했다.

“계속 꾸물거릴 거냐? 여긴 이미 전멸이야! 서둘러!”

그러나 사수들은 점점 불안해졌다. 지나가는 곳곳이 죽어있었고, 오염체들이 끊임없이 다가왔다. 또 사람들의 비명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게다가 검은 모래가 둥둥 떠다니는 것 같은 하늘이 질끈 걸음을 물러서게 만들었다.

그래도 아이리스 비노쉬는 물러설 수 없었다. 디에네 비노쉬는 한 때 아이리스 비노쉬가 가장 아끼던 제자였다.

“어서 루앙 광장으로 가자!”

아이리스 비노쉬와 디에네 비노쉬의 사이가 틀어진 것은 음유시인이라는 작자가 세지타들의 도시 네오스에 나타난 시점부터였다.

그는 디에네 비노쉬를 빼앗아 갔다. 아이리스 비노쉬는 두 사람을 떼어놓기 위해서 노력했다. 그러나 겨우 두 사람을 갈라놓는 듯하자, 재앙의 열매가 떨어졌다. 아이리스 비노쉬는 그 저주스러운 아이의 이름을 에바 라이아나라고 지었다.

아이리스 비노쉬는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속도를 늦추어 걸었다.

겹겹이 쌓여 있는 한 가족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스멀거리는 연기가 자욱했지만, 곱슬거리는 빨강 머리가 지울 수 없는 과거처럼 또렷했다.

“라큔! 저기에! 늦었을까요?”

네디앙이 외쳤다. 네디앙도 아이리스 비노쉬처럼 곱슬거리는 빨강 머리를 보았던 것이다. 네디앙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어느 집 앞에 곡물을 말리려고 펼쳐 둔 기다란 짚 자락을 들고 툭툭 털었다.

“어서 가봐요!”

아이리스 비노쉬는 네디앙을 말리지 못했다. 검은 연기에 닿게 되면 죽고 싶을 정도의 통증이 생긴다는 것을 이야기하지 못했다. 그리고 저들이 이미 죽음의 경계선에 있다는 것도 말하지 못했다.

“허억!”

네디앙은 머리칼이 빳빳하게 설 만큼의 공포와 두려움을 느껴 잠시 흠칫했지만 고개를 최대한 숙이고 달렸다.

“이런….”

평생 고개 한번 숙이지 않았을 것 같은 아이리스 비노쉬의 눈에서 수정 구슬이 톡 떨어졌다.

눈물은 땅으로 떨어져 헬리시타의 황토색 흙을 네오스의 붉은 흙처럼 물들였다.

“아주 엉망이야.”

아이리스 비노쉬는 검은 연기 속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네디앙은 콜록거리면서도 연신 에바를 불렀다.

“에바! 에바!”

한데 뭉친 세 사람을 흔들고 밀었다. 하지만 점점 그 힘은 미약해졌다. 허술하기 짝이 없는 짚 덩이 사이를 비집고 들어 온 검은 연기들이 네디앙의 몸도 탐하려 했다.

“일어나요! 일어나! 제발!”

“후우……. 후우……. 리커버리…….”

맨 위를 덮은 남자가 숨을 헐떡이며 중얼거렸다. 얇은 막이 세 사람과 네디앙을 감쌌다.

네디앙은 깜짝 놀랐다.

“세상에! 이봐요? 살아 있어요?”

“후우……. 후우…….”

클로비스는 몸을 천천히 움직였다.

“이제 마지막이야…. 나는…… 더 버틸 수 없어……. 후우…….”

네디앙은 클로비스와 에바 밑에 잠든 디에네 비노쉬를 보고 입을 막아 버렸다.

“어떻게 이런 일이!”

“후……. 에바를…… 딸 아이를……. 데리고 가…….”

눈물이 흘러 멈추지 않았다. 네디앙은 간신히 눈을 동그랗게 뜨고 클로비스를 바라보았다.

“디에네는…… 늦었지만…….”

클로비스의 얼굴은 눈물과 검댕투성이였다. 검은 연기가 꿰뚫고 간 온 몸도 고름이 부어 오르고 있었다.

“더 늦기 전에…… 에바를 데려가. 후우…….”

네디앙은 고개를 끄덕이고 에바를 깨웠다. 오래 전 그날 절벽을 뛰어내려 바다를 헤엄쳐 구했을 때처럼 필사적으로 에바를 붙들었다.

“에바! 에바! 제발 일어나. 가야 해!”

“후…… 어서……. 내가 변하기 전에…….”

“일어나! 어서!”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지만 네디앙은 축 처진 에바를 겨우겨우 질질 끌어 일어섰다.

“에바! 제발! 정신 차려! 제발! 제발!”

짚을 에바에게 씌우고, 잠시 뒤돌아 본 네디앙은 이를 악물고 에바를 끌었다.

“어서 가….”

한 발만 더 옮기면 보호막을 벗어나게 되었다.

“엄마?”

에바의 가는 신음소리가 약하게 울렸다.

“가자. 에바. 우린 살아야 해.”

에바의 귀에 네디앙의 목소리가 마치 디에네 비노쉬의 목소리처럼 들렸다. 에바는 무의식적으로 걸었다.

“엄마…….”

“에바. 어서 가자!”

네디앙은 더 힘을 주어 에바를 끌었다.

길게 줄지어 선 사수들은 아이리스 비노쉬와 네디앙을 최대한 지켜 주었다.

괴물로 변해버린 사람들은 가뿐하게 막아낼 수 있었지만, 회오리에서 뿜어 나오는 검은 연기는 화살의 힘으로는 막을 수가 없었다. 사수들의 기운도 점점 빠져 나가고 있었다. 몇몇은 스켈리톤 같은 괴물로 변했다.

그 사이로 네디앙이 쓰러질 듯 휘청대며 걸어 나왔다.

“하아. 하아.”

아이리스 비노쉬는 눈이 빨개지도록 에바를 노려보았다.

“라큔! 어머니….”

네디앙 비노쉬는 아이리스 비노쉬를 간곡하게 불렀다.

그 음성에는 에바를 받아들이기를 바라는 네디앙의 마음이 가득 담겨 있었다.

“디에네 비노쉬님은 이미 숨을 거두었어요…….”

“못났구나.”

아이리스 비노쉬는 싸늘하게 말하며 다가와 네디앙이 잡은 에바의 옷깃을 끌어 올리더니 다짜고짜 뺨부터 올렸다.

“눈 떠.”

“엄마?”

한 번 더 아이리스 비노쉬의 손이 세게 날았다.

“그 눈 떠!”

“엄마…….”

아이리스 비노쉬는 에바의 입을 손으로 막아버렸다. 얼굴이 뒤로 밀리면서 에바의 눈이 부릅떠졌다. 아이리스 비노쉬와 에바의 눈이 맞닥뜨렸다. 에바의 하늘색 눈이 점점 커졌다.

“닥쳐. 네가 부를 수 있는 엄마란 없어.”

“어머니! 그만 하세요!”

“다시는 내 눈에 띄지 마라. 죽여 버릴 테니까.”

“어머니! 에바는 가족이에요!”

“가족?”

아이리스 비노쉬는 디에네 비노쉬를 잃은 분노로 에바를 밀쳐버렸다.

“어미를 죽이는 딸은 가족이 아니야.”

에바는 땅에 쓰러졌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어머니! 에바가 디에네 비노쉬님을 죽인 것은 아니잖아요!”

아이리스 비노쉬는 드디어 네디앙에게도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

“네가 봤느냐?”

“그건 아니지만. 에바가 아니라는 것은 어머님도 알고 계시잖아요!”

아이리스 비노쉬는 입술을 깨물었다.

“시작부터가, 잘못된 거였어.”

아이리스 비노쉬는 활을 들어 점점 꺼지고 있는 보호막을 향해 정확히 조준했다.

“처음부터 내가.”

클로비스는 디에네 비노쉬를 향해 다가가 차가워진 얼굴을 쓰다듬었다.

“에바가 우리 딸이지? …예쁜 아이를 낳아주다니… 고마워….”

푹.

“으윽!”

클로비스는 디에네 비노쉬의 위에 쓰러졌다. 처음으로 잡았던 곧게 뻗은 팔이 눈앞에 있었다. 클로비스는 디에네 비노쉬의 팔을 가만히 잡았다.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

네디앙이 아이리스 비노쉬를 향해 걸어왔고, 클로비스는 다시 일어서지 않았다.

아이리스 비노쉬는 눈물을 닦아 내었다.

“널 이렇게 쏘아야 했어.”

힘없이 쳐지는 활과 함께 아이리스 비노쉬의 뜨거웠던 눈빛이 싸늘하게 식어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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