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의 종말이 온 것 같은 헬리시타는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바기족에게는 정복하고 싶은 땅이자 권력이었고, 세지타족과 에바에게는 감추고 싶은 치부를 들킨 치욕적인 곳이었다. 예전부터 헬리시타에 살아오던 사람들에게는 더 이상 고향이 아니었고, 룸바르트와 헤이치 페드론에게는 속물적인 인간들을 마음껏 구경하고 조롱하는 기회의 땅이었다. 비나엘르 파라이에게는 너무 다른 두 아들의 비극을 목격한 현장이었다.
그리고 검은 회오리 속의 가리온에게는 벗어나고픈 현실이었다.
가리온은 원래 시에나를 찾아 마법을 멈추게 하려 했다. 그리고 나서 아버지를 구하고, 할 수 있다면 듀스 마블에게 복수도 할 생각이었다. 모든 것을 평화로운 상태로 돌릴 수 있기를 바랬다.
그러나 눈앞의 괴물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무엇이든지 꿰뚫을 것 같은 붉은 눈들은 가리온을 노려 보았다. 그 눈들은 한 번 깜빡이지도 않고 눈알을 굴렸다. 구석구석을 날카롭게 찌르며 가리온을 탐할 곳을 찾았다.
붉은 눈알 주위에는 작은 입 같은 구멍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고 그 입에서는 검은 연기들이 뿜어져 나왔다.
“네 피를 지배하겠다.”
그것들은 꼭 이렇게 속삭이는 것 같았다. 그 검은 연기들은 가리온 주위에 채워지고 있었다.
가리온은 모골이 송연했다. 가리온도 밖에서 허우적대는 사람들처럼 죽음이 가까워지고 있는 것을 느낀 것이었다.
괴물이 먼저 공격을 시작했다.
샤아아.
‘누군가 뒤에 있다!’
가리온은 크루어를 세우고 뒤돌았다.
휙.
바로 눈 앞이었다. 빨갛고 짙은 눈이 독사처럼 가리온을 쏘아보고 있었다.
“으윽.”
검은 연기가 달라붙는 냄새와 살갗이 곪아가는 뜨거운 고통이 일었다.
가리온은 팔꿈치를 올려 보았다. 누렇게 부은 팔꿈치에서 유황 냄새가 피르르 올라 왔다.
“이건 뭐지?”
가리온은 검이나 둔기로 맞은 자국이 남아 있지 않고, 퉁퉁 부어 오르는 것을 보며 의아해했다.
그러나 가리온은 오래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투명하게 반사되는 빨간 눈동자에서 침을 쏘듯, 독바늘이 가리온의 얼굴을 향해 달려들었기 때문이었다.
"이야아!"
서둘러 검을 휘둘렀지만 독바늘을 피하지 못했다. 각각의 바늘이 가리온의 얼굴에 박혔다.
가리온은 얼굴에까지 방어구를 착용한 것을 다행으로 여겼지만, 곧 철이 녹는 소리와 열기가 귀를 멍하게 울렸다.
츠으으.
“젠장!”
가리온은 얼른 바늘을 손으로 잡아 당겼다. 철로 된 장갑이 녹아 들 정도로 뜨거웠지만 가리온은 멈추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녹은 철이 얼굴에 달라붙거나, 바늘의 고열이 가리온의 볼을 해골처럼 뻥 뚫을 것이었다.
샤아아.
다시 뒤에서 같은 소리가 들렸다.
휙.
가리온은 마지막 바늘을 빼며 얼른 뒤를 돌아 보았다.
‘이번에는 당하지 않겠다!’
빨간 눈들이 여러 개로 나뉘어 꼬리를 흔들며 위협하는 뱀처럼 가리온을 노리고 있었다. 그 중앙에는 여체의 형상을 한 숙주가 있었다. 숙주와 뱀은 잔가지가 많은 뿌리처럼 보이기도 했고, 가지가 많은 아직 어린 나무처럼 보이기도 했다. 혹은 사방으로 흩날리는 시에나의 긴 머리칼 같기도 했다.
‘역시 시에나인가….’
숙주가 시에나일 것이라는 짐작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마법을 완성한 사람이 시에나였다.
가리온은 고민에 빠졌다.
가리온은 시에나에게 검을 들이밀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여린 그대로의 모습을 지켜주고 싶었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해보면 가리온은 시에나를 그냥 싸워서 이겨야 하는 적들처럼 여기면 되었다. 오랜 시간 동안 만나왔거나, 둘만의 애틋한 감정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나는….’
그렇지만 고민과 걱정은 가리온만의 것이었다.
붉은 눈동자를 굴리는 뱀들은 가리온의 고민을 배려할 줄 몰랐다. 그것들은 가리온을 향해 다가왔다.
가리온은 일단 검으로 뱀들의 머리를 베어내며 뒤로 물러섰지만, 뱀들의 속도는 점차 빨라졌고 가리온도 덩달아 빨리 움직여야 했다.
움직임이 격해질수록 가리온은 단 하나의 생각만이 떠올랐다.
‘나는…. 내가 여기에 온 이유는….’
모든 것을 덮어두고, 가리온이 헬리시타에까지 온 단 하나의 이유를 생각해 보라고 하면 그 목적과 방법은 더욱 뚜렷해졌다.
가리온은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왔고, 지금 눈앞의 괴물은 시에나일지도 모르는 숙주를 중심으로 하여 가리온을 위협하고 있었다. 숙주를 죽이고 마법을 멈춘 다음 아버지를 구하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저것이 정말 시에나라면….’
뱀의 머리 하나가 현실을 직시하라는 듯 가리온의 등을 힘껏 내려쳤다. 뜨거운 고통이 등에 넓게 퍼졌다.
“커억!”
휘익.
가리온이 얼굴을 돌리자마자 눈알 하나가 또 번개처럼 날아들었다.
정신을 돌릴 새도 없이, 뱀들은 계속해서 가리온을 노렸다.
가리온의 갑옷은 어느새 금이 그어졌고, 관절 부분은 뻘건 피가 스며 나왔다.
가리온은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내고는 사람의 몸에서 자라난 뱀들을 노려 보았다.
그러나 붉은 눈동자는 그런 가리온의 시선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더 거세게 날아왔다.
그러다가 가리온은 알아챘다. 뱀의 머리가 휘몰아치면서 검은 바람을 만들어 공중으로 보내고 있었다. 뱀은 가리온을 후려치는 동시에 검은 알갱이를 털어냈던 것이다.
가리온은 알갱이가 닿은 부분이 가려웠다. 입을 쓰윽 닦으니 노란 고름과 피가 함께 뭉쳐 나왔다.
“…아까! 저게 파고들었던 것인가?”
가리온은 팔꿈치를 내려다 보았다. 누렇던 팔꿈치가 검게 쪼그라들고 있었다.
“…아버지!”
두 팔이 잘린 채 묶여 있던 아버지의 모습이 절로 떠올랐다.
“제길!”
이제는 피한다고 될 문제가 아니었다.
가리온은 몸체를 향해서 달렸다.
‘이젠 어쩔 수 없어!’
검은 알갱이들이 아버지를 휩싸는 광경이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가리온은 서둘러 크루어를 이리저리 휘둘렀다. 곧 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은 가리온의 완벽한 오판이었다.
가리온은 뱀의 머리를 검으로 베어냈지만 그것들은 베어지지 않았다.
크루어가 머리를 잘라냈지만 바닥에 떨어진 물컹한 흑색 입자들은 끊임없이 다시 뭉쳤다. 그것은 꼭 검에 베어지는 것이 아니라 크루어를 피해서 잠시 떨어지는 것 같았다.
‘빨리 나가야 하는데!’
가리온은 조급해졌다. 자신을 쏘아보는 수백 개의 눈알을 언제, 어떻게 다 쓰러뜨릴 수 있을지 막막해졌다.
“이야아!”
그래도 가리온은 검을 치켜 들고 다가오는 뱀들을 피해 중앙으로 뛰었다.
“조금만!”
가리온에게 다른 뾰족한 방법은 없었다. 얼른 숙주를 제거해야 했다.
“조금만 더!”
거리는 가리온의 크루어가 닿을 만한 정도로 좁혀졌다. 가리온의 굳은 의지 덕분이었다.
그 순간이었다.
검기만 하던 괴물의 모습이 투명하게 변했다. 마치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묽은 진흙 같았다. 그 진흙 아래에 미끈하게 드러나는 무언가가 가리온의 시선을 잡았다.
“…!”
가리온의 크루어는 투명해진 입자들을 뚫고 뼈에 금을 내고 튕겼다.
“어떻게 이럴 수가!”
가리온은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붉고 푸른 핏줄이 드러난 시에나 때문이 아니었다.
가리온이 당황한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어떻게 알고 있지?”
검은 입자가 갑자기 투명하게 바뀌어 버린 것이 바로 가리온이 당황한 이유였다.
저 입자는 어떻게 알았는지는 몰라도, 시에나의 모습을 보여주면 가리온이 검을 쓰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하고 형태를 바꾸었다. 그것에 가리온이 놀란 것이었다.
보다 강한 정신력을 가진, 생각하는 괴물.
가리온이 쓰러뜨려야 하는 괴물은 그런 괴물이었다.
“…이계의 생명체인가?”
입자들은 다시 모여서 붙어 나갔고, 그 속으로 시에나의 피가 아지랑이처럼 피어났다.
그리고 천천히 다시 입자는 검게 변했다. 오히려 시에나가 상처를 입기 전보다 더 흙빛이 된 듯 했다.
‘아버지를 구할 수 있을까….’
시에나를 죽여서라도 얼른 나가려던 가리온의 의지는 꺾였고, 이제 저 이계의 괴물을 없애고 나갈 수나 있을지 걱정해야 했다.
크루어는 저들에게 통하지 않았다. 크루어는 저 괴물을 완전히 파괴하지 못했다.
이곳에서 나가려면 다른 방법을 생각해야 했다. 가리온을 감싸고 있는 회오리처럼 강력한 것이 필요했다.
하지만 가리온은 마법을 몰랐다. 오로지 가리온에게 있는 것은 검뿐이었다. 검을 부리는 것 말고는 다른 것이 없었다.
“광검이라면….”
가리온은 손을 펼쳐보았다. 아무것도 생기지 않을 것 같은, 장갑이 뜨겁게 타서 벗겨진 손바닥이 처량했다. 보통의 평범한 손과 다를 것이 없어 보였지만, 분명 가리온의 마음이 다급해지면 불쑥 튀어나올 것이었다.
“….”
가리온은 지금껏 그 검을 쓸 자신이 없었다.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가리온은 은검을 사로잡는 빛마저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더 이상 방법이 없었다. 광검이라면 이계의 괴물을 죽일 수 있을 지도 몰랐다.
“…한 번만.”
가리온은 고개를 들었다.
붉은 눈을 달은 뱀이 혀를 날름거리듯 가리온을 조롱했다.
“한 번만이다.”
가리온은 전력으로 뛰었다.
방금 한 결심을 뒤집을 수 있는 시간을 자신에게 주고 싶지 않았다.
휘이.
크루어가 다시 한 번 물컹한 뱀들의 머리를 파고 들었다.
검을 가볍게 휘어 끊어내는 순간, 가리온의 온 몸에도 예리한 신경이 끊어지는 듯한 소름이 돋았다.
“흐읏!”
뱀의 머리가 가리온의 다리를 타고 허리까지 올라와 있었다. 하반신의 신경을 분지르는 고통이 턱까지 빳빳하게 만들었다.
가리온이 주춤거리자 크루어에 갈라졌던 약삭빠른 뱀들이 가리온의 팔을 붙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