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 Testament - 새로운 약속 - 2장. Three Augers. 송곳 세 개
| 21.01.13 12:00 | 조회수: 930


가리온이 청기사단장의 자리를 받아들이자, 인카르 교단은 데카론의 지원자들을 모집했다.

디에네 비노쉬의 장례식이 시각적으로 꽤 효과가 있었는지, 많은 사람들이 인카르 신전으로 모여 들었다. 인카르 교단은 성별과 나이에 구분 짓지 않고 모든 지원자를 받아 들였다.

사죄의식이 있던 날, 검은 회오리가 쓸고 간 헬리시타는 엉망이었다.

광장에서 외성까지의 길목마다 시체들이 넘쳐났고, 사람이 살던 건물에는 헬리시타의 외성을 뚫은 이계의 생명체들이 들어 앉았다. 사람들은 두려워 루앙 광장을 벗어나려 하지 않았지만, 비좁은 광장에서 언제까지나 버틸 수는 없었다.

때문에 인카르 측에서는 헬리시타를 재정비할 저렴한 용역이 필요했고, 데카론의 첫 번째 활동은 헬리시타의 복원이 되었다.

헬리시타의 사람들은 데카론에 지원하면 바로 당장 카론을 상대할 것으로 생각했다. 카론을 해치워 영웅이 될 것이라고 의기양양했었다.

그래서 길에 버려진 시체들을 치우는 것을 꺼려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개의치 않았다. 농사를 짓거나 장사를 하기 힘든 상황에서 데카론에 참여하면 약간의 딜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리온도 헬리시타의 사람들과 함께 시체를 날랐다. 비나엘르 파라이는 가리온에게 인카르 신전에 머물면서 곧 떠날 여정을 천천히 준비해도 된다고 했지만, 가리온에게는 가시방석일 뿐이었다.

‘후우. 이 얼굴은 아니야.’

가리온은 시체 한 구, 한 구를 세세하게 관찰했다. 얼굴이 뭉개졌거나, 팔다리가 잘린 시체는 더더욱 물고 늘어졌다.

혹시라도 아버지의 시체가 있을까 해서였다.

비나엘르 파라이가 아버지 슈마트라 초이는 살아 있다고 말했지만, 가리온은 어쩐지 그에게 신뢰가 가지 않았다.

‘이것도 아니야.’

가리온은 시체가 태워질 수 있도록 통과시킬 때마다, 안도와 두려움의 숨을 동시에 내쉬었다.

아직 아버지의 얼굴이 없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었지만, 사실은 그것 때문에 불안했다.

‘정말로 듀스 마블이 카론을 부활시키기 위해….’

시간이 지날수록 두려움과 불안은 가리온을 죄었고, 가리온은 시체들 옆을 한시도 떠날 수가 없었다.

“이것도 보실 건가요? 젊은 여자 시체인데….”

“확인하겠소.”

가리온이 찾는 것은 아버지 슈마트라 초이와 듀스 마블, 그리고 한 명이 더 있었다. 바로 시에나였다.

시에나에 대한 죄책감 역시 날이 갈수록 감당하기 힘들어졌다. 자신을 도와주었던 작고 여린 사람을 저주스러운 알로켄의 검으로 베어 내렸다는 사실을 지울 수가 없었다.

시체를 뒤지고 뒤질수록 가리온에게는 한숨이 늘었고 신경과 눈빛은 날카로워졌다.

가리온은 모든 것을 잊으려 노력해보기도 했다.

그러나 악몽이 날마다 가리온을 괴롭혔다.

꿈에서 아버지는 묶여 있었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까 아버지가 아니라 가리온 자신의 모습이었다. 그 옆에는 시에나가 있었다. 가리온은 온 몸이 송곳으로 찔리는 듯 고통스러웠지만 시에나의 눈은 초점이 없었다. 가리온은 시에나의 이름을 수천 번 불렀지만 시에나는 깨어나지 않았다. 그 순간 카론의 살기가 느껴졌다.

가리온의 얼굴은 수척해질 수밖에 없었다.

“저 사람 오늘도 저러는군.”

“아직 젊은데…. 참 안됐어요.”

“아버지를 찾는 거지?”

“잠도 안자고 저렇게나 버티는 게 정말 보기 딱하네.”

“어머니를 보낼 때도 그렇게 힘들어하더니. 쯧쯧….”

사람들은 가리온을 동정했다.

에바는 그런 사람들을 물끄러미 보다 다시 가리온을 바라보았다.

“….”

디에네 비노쉬의 장례식이 있던 날, 에바는 가리온을 부를 수가 없었다. 가리온은 에바만큼이나 슬퍼하고 힘들어했다.

어머니를 잃은 슬픔에 이성을 잃었던 가리온을 에바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에바도 이성을 잃을 만큼 힘든 순간이었다.

어느 새 에바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에바는 눈을 훔쳐내고 가만히 작은 주머니를 만지작거렸다. 갈색의 가죽 주머니는 세지타족들만이 쓰는 것이었다.

“이걸 전해 줘야 해….”

주머니는 에바가 힘들게 얻어낸 것이었다.

인질로 네디앙 비노쉬를 택한 것은 조금 위험한 일이었지만, 어쨌든 효과는 컸다.

“어머니의 재를 제게도 주세요.”

아이리스 비노쉬는 디에네 비노쉬의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하늘로 날아가지 않고 남은 재를 끌어 모아 라큔의 상자에 정성스레 담았다. 그리고는 도망치듯 헬리시타를 떠나려 했다. 가리온이 비나엘르 파라이와 인카르의 사제들에게 이끌려 신전으로 간 상황이었다.

아이리스 비노쉬는 가리온에게 디에네 비노쉬의 그 무엇도 주고 싶지 않았다. 또, 헬리시타에 더 이상 남아있고 싶지도 않았다. 때문에 서둘러 떠나려 한 것이었다.

그러나 한적한 골목에서 에바가 나타나 네디앙 비노쉬를 겨냥했다.

“재를 주시지 않으면 쏘겠어요.”

“너 따위 사생아에게 줄 것은 없다.”

“정말 쏠 거예요.”

“모두 조준해.”

세지타족의 사수들이 일제히 에바를 향해 활을 들었다.

“죽음 따위 두렵지 않아요. 오히려 잘되었네요. 네디앙과 함께 가면 되니까.”

아이리스 비노쉬는 에바의 하늘색 눈을 야멸차게 노려보았다.

“어머니…!”

네디앙이 아이리스 비노쉬를 불렀다.

“독한 것.”

아이리스 비노쉬는 입술을 깨물고 재를 조금 덜어 주머니에 담았다.

“다행인줄 알아라. 만약 네디앙이 아닌 나를 인질로 잡았다면, 넌 이미 죽은 목숨이었다.”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 거예요.”

에바는 아이리스 비노쉬에게서 눈을 떼지 않다가 주머니를 받은 순간 건물 사이로 숨었다. 등뒤에서 폭우처럼 쏟아지는 화살 소리가 귀를 울렸다.

“하아. 하아.”

에바는 손을 등 뒤로 가져갔다.

“아!”

벽에 기대자 어쩐지 눈물이 계속 났다.

아이리스 비노쉬가 자신을 죽일 만큼 증오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화살을 기적적으로 피한 것은 천만 다행이었다.

에바는 디에네 비노쉬, 어머니의 재가 든 주머니를 꼬옥 쥐고 눈물이 멈출 때까지 그대로 있었다.

처음부터 디에네 비노쉬의 재를 가리온에게 줄 생각은 아니었다. 누구의 사랑도 받지 못한 채 자란 에바에게는 가족을 느낄 수 있는 유일한 매개체였다.

그렇지만 시체를 뒤지는 가리온의 모습을 하루, 또 하루 보며 에바는 그 주머니를 가리온에게 주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에바는 가리온에게 힘이 되어 주고 싶었다. 무너져가는 가리온을 보고 싶지 않았다. 에바는 도저히 그런 가리온을 볼 수가 없었다.

자신은 지금까지 어머니란 존재를 지우며 살아왔기 때문에, 손 안에 든 재가 바람에 날아간다 해도 버틸 수 있었다.

그러나 모든 것을 한꺼번에 잃어버린 가리온에게는 한 줌의 재가 큰 힘이 될 것이었다.

에바는 결심하고, 가리온에게로 발걸음을 하나씩 옮겼다.

“가리온!”

마침내 가리온의 이름을 불렀을 때, 가리온이 고독해진 눈을 들어 에바를 바라봐주었을 때, 에바는 굵은 가시에 찔린 듯 가슴이 시렸다.

에바는 자신의 모든 인생이 가리온에게 걸려 있음을 깨달았다.

삐걱.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누가 왔나? 이상하군.’

루앙 광장 근처로 사람들이 다 몰려갔기 때문에 먼지 소리도 날리 없었다. 아픈 환자들도 헤이치 페드론을 찾아 여기까지 오는 것은 꺼렸다.

룸바르트는 잘못 들은 소리인 줄 알고 하던 일을 계속 하려 했다. 잿더미 속에서 쓸만한 물건을 찾아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룸바르트는 돈이 필요했다.

사죄의식 후, 겐조가의 저택은 폐허가 되어 버렸고 룸바르트는 갈 곳이 없어졌다. 헤이치 페드론은 루앙 광장에서 좀 떨어진 자신의 집으로 룸바르트를 초대했다. 그렇지만 언제까지 헤이치 페드론에게 신세를 지고 있을 수는 없었다.

룸바르트는 폐허가 되어 버린 겐조가의 저택 잔해에서 고급스럽거나, 팔아 넘길 수 있을만한 물건들을 끄집어내왔다. 룸바르트는 그것을 닦고 있던 중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목소리가 들렸다.

"계세요?"

룸바르트는 일어섰다.

확실히 누군가 헤이치 페드론의 저택을 방문한 모양이었다.

룸바르트는 어두운 실내를 걸어갔다.

아래층까지 내려가는 좁은 통로가 몹시도 어두웠다. 사죄의식 때 창에 붙은 검은 먼지들이 끈끈이처럼 달라붙어 빛이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나 말고 다른 사람은 없나?”

룸바르트는 방들을 둘러보았지만 헤이치 페드론이나 시리엘 아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 몸이 가봐야겠군. 쳇.”

룸바르트는 마른 냄새가 가득한 나무 계단을 밟았다.

"계세요?"

여자의 목소리가 몇 번 더 들렸지만 룸바르트는 별로 대답하고 싶지는 않았다.

‘귀찮군.’

2층의 난간에서 내려다보니 붉은 머리채의 여인이 고개를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그 다음으로는 동그란 이마와 아래로 곧게 뻗은 코가 시야에 들어왔다.

스락.

룸바르트의 발소리에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반짝거리는 하늘색 눈과 붉은 입술을 가진 여자였다. 여자는 룸바르트를 보고 웃을 듯 말듯 했다.

“에바. 난 정말 괜찮아요.”

룸바르트는 여자의 이름이 에바라는 것을 알았다.

여자는 고개를 돌려 대답을 하는 듯 했다.

“안돼요. 세지타의 화살을 맞았잖아요. 그냥 두면 큰일나요. 얼른 상처를 치료해야 한다구요.”

룸바르트는 여자가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바로 그 순간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그 때였다. 여자 뒤에 있던, 쓸쓸한 미소를 띄운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룸바르트가 잘 아는 얼굴이었다.

‘가리온 초이!’

아름다운 에바가 다시 고개를 들고 말했다.

“이 분을 좀 치료해주세요.”

룸바르트는 질긴 악연의 비수에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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