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나무는 본래의 색을 잃어버리고 새까맣게 썩어 있었다.
그런 나무들을 다섯, 열씩 묶은 것이 요새의 벽이었고 바닥이었다.
“허술하기 짝이 없군.”
헤이치 페드론은 방을 살폈다.
칸과 시리엘은 파그노를 돌보았다.
파그노는 살아 있었지만 열이 많았다. 식은 땀이 침대를 적셨다.
침대는 이계에서 온 생명체의 가죽으로 덧씌워 놓았다.
“우리를 도와줄까?”
헤이치 페드론은 방을 뜯어 볼수록 요새의 사람들에게 믿음이 가지 않았다.
“나쁜 사람들 같지는 않았어요.”
시리엘은 헤이치 페드론이 흥분을 가라앉히고 좀 앉았으면 했다.
“그렇지. 우리는 좋은 사람들이오.”
앤드류는 뜨거운 물을 가지고 왔다.
“이걸로 상처를 닦으시오.”
“고마워요.”
칸은 흘깃 앤드류의 뒤를 보았다.
검을 겨누었던 잭슨이 뒤따라오지 않았나 궁금했다.
“아, 잭슨은 밖에 있소. 거기 담당이지.”
앤드류는 시선을 눈치채고 대답해 주었다.
칸은 잭슨을 찾았다는 사실이 부끄러워 눈을 내리깔았다.
“이렇게 친절히 해줄 거였으면, 그냥 들여보내 주었어도 됐잖아요?”
그리고는 괜히 부끄러워진 마음을 감추려고 가시를 꽂아 쏘아붙였다.
“사실, 당신네들이 싸우는 것은 아까부터 알고 있었소.”
“아까부터요?”
“뭐, 처음부터 다 봤죠.”
“그래요? 싸움 구경 참 재미있었겠네요?”
칸은 또 쏘아붙였다.
“그런 뜻이 아니라, 정찰한 겁니다. 여기 요새에까지 피해가 오면 안되니까.”
“뭐라고?”
“그렇다면, 지금은 왜 친절히 대해주는 건가?”
싸울 태세로 달려드는 칸을 가라앉히며 헤이치 페드론이 질문했다.
“그 이유는 나도 모릅니다.”
앤드류는 손을 내저었다. 정말 모르는 모양이었다.
“나야말로 궁금합니다. 당신들을 받아주면 괜히 소란스러워질 텐데.”
“말 다했어?”
“요란스럽군. 잭슨에게는 검을 들이대더니, 거 소란 떨지 마시오.”
“말이 심하군요.”
칸은 앤드류의 말에 몹시 기분이 나빴다. 마침 시리엘이 나서지 않았다면, 검을 휘두를 뻔 할 정도였다. 앤드류는 헤이치 페드론이 말을 걸 때까지 시리엘과 칸을 번갈아 쳐다봤다.
“그건 그렇고, 우리는 어떻게 되나?”
“아, 도와주기로 했습니다.”
앤드류는 그렇게 말하고서 잔뜩 찡그리며 칸과 시리엘을 번갈아 보다 혀를 끌끌 찼다.
하늘은 어두웠다.
그런 것쯤은 상관없었다. 그리폰은 전투에 흥을 불러일으켰다.
가리온과 캄비라 바투가 싸우는 소리는 마치 신나는 음악 같았다.
검이 창, 창, 부딪히는 소리와 도끼가 바람을 가르는 약간 둔탁한 소리는 썩 잘 어울린데다가 경쾌했다.
두 사람에게 좋은 일은 또 있었다.
빙곡의 눈바람 속에 무지개가 떴다.
그리폰이 그린 낮은 하늘 바로 아래 뜬 무지개였다.
무지개는 동그랗고 진하게, 가리온과 캄비라 바투를 감쌌다. 그리고 날아오던 화살과 불덩이들, 얼음덩이들 적들을 막아주었다.
전투에 집중했던 눈이 저절로 하늘을 향했다.
자세히 보니 무지개가 아니었다. 마법으로 만들어진 방어막이었다.
가리온과 캄비라 바투는 그 방어막을 누가 만들었는지 알 것 같았다.
그 반가움에 가리온은 한 마디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역시. 그녀는 강하지?”
캄비라 바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블레세세.”
매혹적인 목소리에 온 몸이 뜨거워졌다.
가리온은 예전에 이 기분을 느낀 것 같았는데 그것과는 조금 틀렸다.
아레스 숲에서 시에나가 치료해주었던 때를 기억하는 것이었지만, 시에나의 따스함과는 틀린 조금은 더 강렬한 것이었다.
한 가지는 확실했다.
‘나의 전우들이 돌아왔다…!’
뒤를 돌아보니 역시나 타마라와 시에나가 있었다.
타마라는 지친 가리온 일행들의 체력을 회복시켜 주는 중이었다.
타마라 옆에 서 있던 시에나의 얼굴은 약간 상기되어 있었지만, 눈빛은 강했다.
시에나는 가리온을 보는 순간 다시는 예전에 노라크 동굴에서처럼 도망치지 않겠다고 마음 먹었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다시 돌아왔다.
타마라가 시에나를 구하러 와주었지만, 동시에 시에나 자신도 살아나려 노력했다. 바기족 전사들이 자신 때문에 쓰러지는 것을 보면서도 냉정하게 견뎌냈다.
가리온이 자신을 찌르기는 했지만, 그 이전에 시에나 자신의 실수가 있었다.
‘다시 돌리겠어.’
가리온과 시에나는 서로 바라보았다.
그것은 신뢰의 눈빛이었다.
아직 싸움을 멈출 시간은 아니었다.
캄비라 바투는 시에나를 보며 기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그래서 자신이 보냈던 바기족 전사들이 돌아오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
그저 가리온과 시에나, 쿠리오와 타마라, 룸바르트, 에바 그리고 쿠리오와 섞여 다시 싸우기 시작했다.
그렇게 팽팽했던 전세는 조금씩 바뀌었고 그들이 나타났다.
어두운 하늘은 좀처럼 개지 않았다.
오히려 더 어두워졌다.
곧 눈바람을 걷어내고 천둥이 쏟아질 것 같아 보였다.
그 하늘 아래서 가리온의 일행들은 데카론들과 싸우고 있었다.
가리온의 일행은 쉬지 않고 싸웠다.
모두들 같은 편과 싸우게 되었다는 점 때문에 주춤했던 것은 잊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전투력의 밀도는 상승할 뿐이었다.
아무리 악하지 않은 사람이라도 타인을 위해 죽음까지 내어 줄 수는 없는 일이었고, 자신을 죽이려고 자꾸만 다가오는 상대에게 관대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가리온은 몸을 회전해 다가오는 적들을 한 번에 공격했고, 캄비라 바투는 땅을 찍어 사방을 흔들었다. 시에나는 가까이 다가오는 적을 얼리고 불태웠다. 에바는 속도전이었다. 눈 위를 가볍고 쏜살같이 날아 사정거리를 벌어 활을 쏘고 따라붙는 자들을 단검으로 찔렀다. 화살이 거의 떨어져 가고 있었기 때문에 신중해야 했다. 룸바르트는 에바와 멀지 않은 곳에서 길을 트고 있었다. 에바가 화살을 쏠 수 있도록 검술과 소환술을 함께 쓰던 룸바르트는 에바를 힐끗 보고는 얇은 검 하나를 더 집어 들었다. 쿠리오는 잔바크 그레이와 타마라가 싸우는 뒤에서 긴 창으로 엄호했다. 타마라의 붉은 피가 춤을 추면 데카론들은 넋을 잃었고, 그 사이 잔바크 그레이가 공격했다. 옆에서 오는 이들은 쿠리오가 밀쳐냈다.
그리고 그들이 나타났다.
물론 가리온의 일행들은 그들이 나타났다는 것을 쉽게 알아챌 수가 없었다.
적이 끝없이 달려들고 있었고, 상황은 치열했다. 때문에 살려면 집중해야 했다.
집중력을 깬 것은 천둥소리였다.
그랜드 폴이 시작되기 바로 직전, 땅 위에 천둥이 내려치던 그 때처럼 쾅, 얼음 산이 갈라지는 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가리온은 천둥 소리에 주위가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가리온!”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요새로 들어가는 작은 눈길 위에 몇 명이 서있었다.
숫자는 그리 많아 보이지 않았다.
모르는 얼굴이 네 명, 그리고 아는 얼굴이 둘이었다.
네 사람은 순백의 갑옷과 붉은 검을 들고 있었고, 두 사람은 약간 물러서 있었다.
“도우러 왔어요!”
시리엘이 크게 소리쳤다.
그러나 가리온은 그 사람들이 적인지, 같은 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요새의 사람들…. 복수의 빙곡에 있는 요새에서 나온 사람들….’
가리온의 머리 속이 복잡해졌다.
확실했다. 저들이, 검을 들고 나타난 저 네 명의 사람들이 비나엘르 파라이가 말했던 백기사단이었다.
“백기사단….”
“뭐라고?”
잘 들리지 않아 룸바르트가 되물었다.
“백기사단이야.”
“백기사단?”
가리온은 앞에 적이 있다는 것을 까맣게 잊은 듯 몸을 돌려 반대로 걷기 시작했다.
“어디 가는 거야?”
룸바르트는 가리온을 불렀다.
“뭐 하는 거야? 아직 싸움 안 끝났어! 도망치는 거야?”
“룸바르트.”
룸바르트는 가리온을 잡으려 쫓아갔지만 에바가 룸바르트를 잡았다.
“…?”
“도망치는 게 아니야.”
“….”
룸바르트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냥 에바를 따라 뒤돌아서 다시 싸우기 시작했다.
듀스 마블과 슈마트라 초이에 대한 일이란 것을 눈치 챘기 때문이었다.
“백기사단….”
가리온은 그들을 보며 쭉 걸어갔다.
가리온은 드디어 백기사단을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하나는 확실히 알게 되었다.
“잘 들어라! 우리는 운도 마조키에의 후예들, 백기사단이다! 여기 우리의 영지를 더럽히는 녀석들에게 죽음을 선사하겠다! 천둥과도 같은 전광의 검을 알고 있다면 어서 달아나라!”
그들은 가리온의 적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