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mbivalence - 타인과 적 - 13장. The prophetess of doom. 가리온이 만난 예언자
| 21.01.20 12:00 | 조회수: 1,189


파그노는 왜 자신이 나설 때마다, 이런 상황이 닥치게 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복수의 빙곡에서 있었던 일은, 파그노에게는 소중한 경험이었다.

가리온, 타마라, 칸, 헤이치 페드론, 시리엘 아즈, 모두에게 고마웠다.

자신을 지켜준 사람들이 있다는 것에 감동했다.

그것은 또한 겸연쩍은 일이기도 했다.

고마운 마음의 부끄러움. 그런 것이었다.

그래서 앞에 나섰다. 고마운 감정이 오히려 어색한 것만 같아서 누구보다도 서둘러 크레스포로 들어갔다.

그런데 크레스포의 캡틴 페러사이트가 나타난 것이다.

파그노는 뒤를 돌아보았다.

일행들이 파그노를 향해 우르르 달려오고 있었다.

몰려드는 일행을 보면서 생각했다.

‘더는 도망치면 안돼.’

이제는 전력으로 싸우기 위해 달려가는 사람들 중 하나가 되어야 했다.

파그노는 다시 앞을 보았다.

그리고 검을 들었다. 두려웠지만 저절로 기합소리가 터졌다.

“으아아아!”

검을 쥔 손이 떨리지 않게 힘을 주고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털썩.

믿을 수가 없었다.

캡틴 페러사이트가 파그노의 검에 뒤로 쓰러졌다. 괴물의 머리에서는 피가 흘러 눈에 고이고 있었다.

“내… 내가….”

파그노는 울며 웃으며 뒤 돌아보았다.

“내가!”

“파그노! 앞을 봐!”

또 한 마리의 괴물이 달려오고 있었다. 그러나 파그노는 또 다시 검을 들었다.

“문제없어!”:

파그노는 위기의 순간에 스스로를 구했다.

그것은 파그노에게 두 배의 자신감을 가지게 했다.

파그노는 신바람이 나서 검을 휘둘렀다.

그 신바람은 가리온에게도 붙었다.

드디어 크레스포에 도착했다는 성취감이 가리온을 들뜨게 만들었다.

때문에 지금까지 겪어왔던 어떤 적들보다도 강한 크레스포의 괴물들을 신나게 쓰러뜨리며 마을까지 올라갔다.

마을 어귀에는 화려하게 치장한 여자가 서있었다.

어울리지도 않는 장신구를 여기저기 달랑거리는 여자였다.

가리온의 일행은, 가리온은 별 신경 쓰지 않고 여자를 지나쳐 갔다.

그런데 여자가 가리온을 보며 울기 시작했다.

“가리온. 너를 기다렸다.”

목소리를 듣는 순간 가리온은 멈춰버렸다.

뒤에 있던 에바도 굳어 버렸다.

여자는 순식간에 가리온의 손을 확 잡아채더니 성큼 걸었다.

가리온은 손을 뿌리쳐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여자의 완력은 굉장했다.

고운 외모와 달리 거친 손은 그 사람을 생각나게 했다.

“바루나의 집으로 가자.”

아니, 손보다도 여자의 목소리가 그 사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사죄의식의 날 이후 듣지 못할 거라 생각했던 그 목소리.

“뭐야, 당신. 왜 데려가는 거야?”

“그 손 놓지 못해?”

“여자라고 봐줄 줄 알아?”

가리온의 일행들이 나섰지만 여자는 완강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큼성큼 걸었다. 그러더니 급기야 한 건물 안으로 쏙 들어가버렸다.

어이없게 가리온을 놓쳐버린 일행이 건물의 문을 열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문 열어!”

“무슨 짓이야!”

“여기 처음인가?”

한 남자가 일행을 향해 다가왔다.

“바루나가 예언을 할 때가 되면 누구도 말릴 수가 없지.”

“그게 무슨 말이오?”

“지난 번에는 저기에 들어갔던 바기족까지 끌어내 기필코 전언을 하더군. 살아나오기가 죽기보다 힘든 곳인데 말이야.”

오염의 근원지 크레스포에 사는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단정하고 깔끔한 차림의 남자는 뒤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남자가 가리킨 곳은 오묘한 빛이 감돌고 있었다.

모두 직감으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카론의 힘!’

남자는 다시 일행들에게로 향했다.

자세히 살펴보니, 유난히 하얀 얼굴이 마치 죽은 사람의 피부처럼 보였다.

“자, 일행은 저 안에서 전언을 받고 있을 테니, 자네들은 나를 좀 돕겠는가?”

모두들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앞의 남자 때문이 아니라, 오묘한 빛이 감돌고 있는 그곳의 기운에 휩쓸렸기 때문이었다.

“다들 눈을 못 떼는군. 그래. 저기 저곳이 바로 오염이 시작되는 곳이지. 난 진저리 나도록 저 곳만 보고 있지. 그렇지만 천일 밤낮을 저기 저 구멍을 들여다 봐도 통 모르겠다네. 아무나 크레스포의 진실에 다가갈 수는 없는 것인지….”

남자는 말 끝을 흐리며 일행들의 눈을 막고 섰다.

“그러니까. 자네들은 여기 주변 생명체들이나 좀 처리해주게. 뭐, 자네들 정도면 며칠은 버틸 수 있을 거야. 몇 마리 잡다가 못 견딜 것 같으면 떠나도 좋으네. 물론 다시 돌아오는 것도 자네들 마음이지.”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일행들은 우물쭈물했다.

“당장 서북쪽으로 올라가게. 밤이 되면 다시 날 찾아오고. 아, 나는 고레인이라고, 여기 시장이라네.”

일행들은 바루나의 집과 오염이 시작된 곳을 번갈아 보며 서북쪽으로 향했다.

그 중에서도 에바는 끝까지 뒤를 돌아보았다.

‘그 목소리….’

에바는 가리온을 잡아 끌고 간 여자의 목소리를 알고 있었다.

“어머니….”

에바는 자기도 모르게 입으로 중얼거렸다.

“무슨 소리야? 가리온이 눈 앞에 없어서 약해졌어?”

룸바르트는 장난으로 던진 말이었지만, 에바의 그렁그렁한 눈을 보고 가리온이 바루나의 집에 가게 된 것이 예사 일이 아님을 눈치챘다.

여자는 가리온을 그대로 세워두고 구슬 뒤로 앉았다.

가리온은 그걸 지켜 보다가 주위로 시선을 옮겼다.

벽면에는 붉은색 벨벳 휘장이 고깔 모양으로 천장까지 이어졌는데 군데군데 검게 슬어 있었다. 휘장에는 금색 술이 진주 빛 구슬과 함께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가리온은 원형 책상 위에 놓인, 촛불에 둘러싸인 큰 구슬 뒤로 숨은 여자를 빤히 바라보며 생각했다.

‘목소리가 똑같은 사람이 있을 수 있는 걸까?’

분명 같은 사람은 아니었다.

눈 앞의 여자는 상당히 젊어 보였고, 체격이나 피부 색도 달랐다.

그리고 가리온은 어머니의 장례식을 눈으로 직접 보았다.

‘어머니는 아니야.’

여자는 구슬을 살펴 보다 눈을 홱 치켜 뜨더니 가리온을 향해 씨익 웃었다. 소름 끼치는 웃음이었다.

“누구지?”

“예언자.”

가리온은 대답을 듣고 깜짝 놀랐다.

“아까랑 목소리가 틀려.”

“킥. 조금만 기다려. 대단하신 분이 널 찾아.”

“….”

가리온은 구슬을 한번 보고 또 물었다.

“여기가 어디지?”

“바루나의 집.”

“당신이 바루나인가?”

“예언자 바루나의 집.”

“왜 날 끌고 왔지?”

“구슬이 자꾸 시켰어. 좀, 귀찮게 해야지.”

가리온은 다시 구슬을 보았다. 가리온이 보기에 구슬은 그냥 구슬일 뿐, 무엇을 시킬만해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정신이 이상한 여자 같았다. “난 돌아가겠어.”

“가리온.”

가리온은 멍해졌다.

어머니, 디에네 비노쉬의 음성이 가리온의 이름을 불렀다.

믿을 수가 없었다. 다시는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없을 것으로만 생각했었다. 쥐고 있던 주먹이 어머니의 뜨거운 재를 움켜쥐었을 때처럼 따끔거렸다. 조금 비틀거리며 가리온은 구슬 가까이로 다가갔다.

“어떻게… 어떻게….”

가리온의 음성이 흔들렸다. 손이 저절로 구슬을 향했다.

바루나는 구슬 가까이에 얼굴을 가져다 대고 입 꼬리를 올렸다. 얼굴이 반으로 나뉘어 이마와 갈색 눈동자가 얼룩덜룩 했다.

“….”

손이 닿으려는 순간, 구슬이 빛을 발했다.

“아!”

그것은 불꽃이었다. 매끈한 표면을 감싼 순결하고 푸른 불꽃이었다.

가리온은 놀란 나머지 손을 다시 거두었지만, 황홀경을 들여다 보듯 잠시도 구슬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바루나가 곧 말을 시작했다.

“헬리시타에서 태어난 자의 전언.”

가리온은 구슬만 하염없이 바라보며 잠자코 있었다.

구슬 안에는 작은 구슬이 있었고 그 작은 구슬 안에 또 구슬이 있었다.

가리온은 구슬 속으로 빠져들었다.

가장 작은 구슬 안에 누군가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가리온의 느낌에 아는 사람인 것 같았다.

‘왜 그러고 있지….’

가리온은 다시 손으로 구슬을 감싸려 했다.

그 순간이었다.

“이 반 쪽짜리 인간아!”

소리는 너무나 크게 울려서 가리온이 서 있는 땅까지 뒤흔들었다. 놀란 가리온은 몸을 웅크리고 귀를 틀어막았다. 고막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귀를 막고 괴로워하는 가리온 앞에 돌연 은발의 여자가 지나갔다.

“이…. 이런 꿈을 꾼 적이 있어….”

가리온은 드디어 구슬에서 눈을 떼어 바루나를 보았다.

“허엇!”

돌처럼 바싹 굳은 바루나의 얼굴에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가리온은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었다.

이제 바루나가 어떤 말을 전할지 알 것 같았다.

가리온에게 휙 강풍이 불어오더니 느닷없이 바루나의 집에 하얗고 긴 것들이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순간 땅이 흔들리며 굉음이 울렸다.

돌로 굳은 바루나의 눈이 가리온을 주시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가리온은 그 눈길을 경험한 적이 있었다.

“내게 와라!”

바루나의 목소리가 점차 굵게 변했다. 그것은 남자의 목소리였다.

“나에게 와라!”

가리온은 구슬에서 손을 떼려고 했지만, 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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