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mbivalence - 타인과 적 - Apocrypha. From El. 엘의 편지
| 21.01.20 12:00 | 조회수: 932


모든 가구가 치워진 말끔한 방 안에는 오직 비나엘르 파라이 혼자였다.

듀스 마블과 슈마트라 초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붉은 카펫은 전과 다름 없어 보였지만, 사실 새로 갈아 바꾼 것이었다.

비나엘르 파라이는 치료를 한 흔적이 남는 것을 원치 않았다.

“탁자 위에 놓아두었던가….”

비나엘르 파라이는 편지들을 추려 들었다.

“답장을 써야겠군.”

비나엘르 파라이는 방에서 나와 문을 닫았다.

비나엘르 파라이는 서재로 돌아와 편지를 차례대로 툭툭 던졌다.

“아모르 쥬디어스, 아이리스 비노쉬, 누트 샤인이라….”

호명된 편지들은 엘의 손을 떠나 차례대로 책상에 쌓였다.

비나엘르 파라이는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손가락에서 나오는 우르르 소리가 아이리스 비노쉬의 편지 앞에 한 동안 머물렀다.

“아냐. 분명 짜증을 잔뜩 부렸을 테지”

아이리스 비노쉬의 편지에는 분명 항의하는 내용이 주르륵 나열되었을 것이 뻔했다. 사죄의식과 디에네 비노쉬의 죽음, 바기족에 관련한 일들 때문에 아이리스 비노쉬의 심기가 불편했을 것이다.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북처럼 우르르, 손가락 소리가 이번에는 누트 샤인의 편지 쪽으로 몰려갔다.

우르르. 딱.

비나엘르 파라이는 따닥거리던 손가락을 멈추고 편지를 집어 들었다.

“누트 샤인….”

나직이 이름을 불러 본 비나엘르 파라이는 봉투를 거꾸로 들어 봉투 입을 열었다.

하얀 봉투 안에는 울긋불긋한 양피지가 단단하게 말려 있었다.

누트 샤인이 항상 편지를 보내는 그런 식이었다.

비나엘르 파라이는 그것을 노려보다가 도로 내려놓았다.

“아니야. 이 일은 직접 해결하자.”

누트 샤인의 편지에서 손을 뗀 비나엘르 파라이는 마지막으로 남은 아모르 쥬디어스의 편지를 집었다.

“하나 남았군.”

반쯤 벌어진 아모르 쥬디어스의 편지를 비나엘르 파라이는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인카르 신전을 상쾌한 바람이 휩쓸었다. 비나엘르 파라이의 하얀 옷이 바람결과 같이 흔들렸다. 함께 놀자는 투정같았다.

그러나 바람도 무심하게 비나엘르 파라이의 표정은 그대로였다. 고개조차도 움직이지 않았다. 바람결에 쓸리는 듯 하다가도 눈동자는 다시 돌아왔다.

읽기를 마친 비나엘르 파라이는 편지를 탁자 위에 놓았다.

"…. 쓸데 없는 일이 벌어졌어….”

비나엘르 파라이는 한숨을 내쉬고 또 한참 동안 편지를 응시하다가, 의자에 앉았다. 탁자 모서리에 놓였던 종이를 가슴 앞으로 가져왔다. 그리고 더 망설이지 않고 탁자 모서리에 있던 깃펜을 집었다.

비나엘르 파라이는 아모르 쥬디어스에게 답장을 쓰기 시작했다.

아모르.

편지는 잘 받았어.

걱정하고 있는 것처럼, 대륙은 요새 흉흉한 일들뿐이야.

나의 듀스 마블은 사죄의식을 일으킨 후 도망쳤어.

인카르를 아주 엉망으로 만들었지.

또 바기족은 반란을 일으켜 자덴을 차지했어.

그리고 방금.

당신의 편지로 누트 샤인이 계략을 꾸미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

그래.

누트 샤인의 일도 중요하지.

그 자는 알로켄의 서기관이었으니 감추어둔 비밀을 풀려고 할 거야.

하지만, 난 당신이 이곳으로 돌아왔으면 해.

방위를 밟고 있다고 해도,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당신도 알고 있잖아?

그 일은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이야.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지.

인카르 신전으로 돌아와.

예전의 일은 어쩔 수 없는 거야.

트리에스테 대륙을 위해 한 일이야. 죄책감을 느낄 일이 아닌.

지금을 생각해.

당신의 희생으로 대륙은 예전보다 안정 되었잖아?

그 때 백기사단을 몰아붙이지 않았다면 트리에스테의 미래는 지금보다도 훨씬 어두웠을 거야.

얼마 전 나는 데카론을 세웠어.

그들은 백기사단도, 청기사단도 아니야. 그 어떤 기사단도 아니야.

그들은 데카론, 카론에 저항하는 사람일 뿐이야.

그러니까 이곳에 와서 나를 도와주기를 바래.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누트 샤인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끝내 누트 샤인이 위치를 알아낸다 해도,

끝내 그 날이 다가온다 해도.

알로켄이 그랬듯이.

혼자서는 할 수 없어.

아모르.

당신이라면 데카론의 사람들을 훌륭한 영웅으로 키워낼 수 있을 거야.

난 그 점을 한번도 의심해보지 않았어.

돌아와.

기다릴게.

144. 12

엘.

비나엘르 파라이는 쓴 것을 한 번 더 읽어보았다.

“그래. 당신은 이 정도가 좋아.”

그리고는 편지를 납작하게 접어 봉투에 넣었다.

낮이었지만, 촛불을 켜고 가만히 촛농이 고이기를 기다렸다.

달구어진 촛농을 아주 조금만 떨어뜨렸다.

봉투 끝을 접어 누르며 비나엘르 파라이는 흥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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