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세이클리드 클로 나왔을 때 쯤에 이런 소설이 홈페이지에 게시되었던 적이 있었다가 홈페이지 개편하면서 사라졌습니다.
나중에 읽어보려고 블로그에 복사해뒀다가 오랜만에 끄집어내서 가져왔습니다. 설마 공홈에서 찾지 못하게 될 줄은...
요 이후에 일어나는 일이 플레이어파티가 보스방 문앞에서 자동재생으로 볼 수 있는, 비나엘르 파라이가 칼에 찔리는 장면입니다
카론의 화로 하드에서 자신이 한 일을 후회하는 느낌이 나는 대사를 하는데, 아래 소설을 읽어보면 ㄹㅇ 얼마나 칼리지오 밧슈를 좋아했는 지 알 수 있음...
칼리지오 밧슈는 이미 카론이 되어버렸다고 그렇게 얘기하는데 '응~ 그래도 나 기억해~ 잘 살거야' 라는 태도 보면 ㅋㅋㅋㅋ
공홈에 있는 소설에서는 정말 (자신만을 위해)현명한 왕처럼 느껴지는데, 여기서는 그저 (자신만을 위해)가 처절하게 느껴지네요
중간에 나오는 레벨리오는 드라비스 비밀통로에서 매뉴버한테 팬던트를 건네줬다가 다시 뺏어가는 드라비스족입니다
Second GrandFall
Prologue
“어머니시여.. 이게 무슨……”
열 두 조디악의 눈빛에는 하나도 빠짐없이 당혹감이 어렸고, 떨리는 손을 애써 감추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비나엘르 파라이는 열두 조디악의 눈을 하나씩 마주치며 몸을 돌렸고, 그에 따라 그녀의 새하얀 옷자락이 사락거리며 나풀거렸다.
“나는 너희의 어머니가 아니다. 나 역시 한 때 누군가의 어미였으나…… 나에게 누군가의 어미라는 이름을 떼어 간 것은 너희들이 아니더냐?”
“하오나 그것은 듀…….”
“닥치거라.”
비나엘르의 목소리는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부드러워, 마치 자애로운 목소리로 들리기 까지 했다. 거의 정신을 잃을 것 같아 보이는 열 두 조디악을 바라보며, 비나엘르 파라이는 나지막한 목소리를 이어나갔다.
“나는 너희를 멸할 것이다.”
조용히 불던 바람마저 멈췄다. 그저 바람이 멈췄을 뿐인데, 조디악들은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은 감정을 느꼈다.
“우, 우리 인간을 사랑하시던 자애로우시던 분께서 어찌……”
누군가가 입을 열었으나, 그게 누구인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싸늘한 냉기가 감돌았고, 비나엘르 파라이는 그 사내, 아니 그 사내였던 물체를 차갑게 내려 쏘아보았다.
“나는 내가 사랑했던 이와의 마지막 약속을 지켜왔을 뿐이다. 나는 단 1분, 단 1초도 너희를 사랑하지 않았다.”
무표정하던 비나엘르 파라이의 얼굴에 조금씩 표정 비슷한 것이 떠오르기 시작했고, 이내 붉은 눈물방울이 떨어져 내려, 새하얀 옷자락을 붉게 물들이기 시작했다.
“나는, 두 번째의 그랜드폴을 바란다.”
말을 마친 비나엘르 파라이의 몸이 점점 흐려지고, 망연자실한 표정의 열두 조디악만이 남았다.
희미한 흔적만을 남기고 비나엘르 파라이는 떠났지만, 나지막하게 뱉은 비나엘르 파라이의 마지막 말을 들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나는 다시 그를 만날 것이다.”
- 인카르 167년, 비나엘르 파라이. 드라비스 영지로 떠나며,
1. 잃어버린 사람들 Immortals
약간의 당혹감. 그리고 연민.
자신의 키의 3배 가량 되어 보이는 푸른 피부의 이종족 둘에게 둘러싸여 안내되어 오면서 생각했던 이미지와는 너무도 다른 인상을 가진 이들의 지도자를 마주한 비나엘르 파라이의 감정이 그랬다.
거대한 나무아래에 서 있는 그녀는 너무나 약하고 작아 보였다.
마치 자신처럼.
지켜야 할 약속을 위해 뒤집어 쓴 철갑은 너무나 차갑고 단단해 보였다.
마치 자신처럼.
● ● ●
“비나엘르 파라이.”
맑은 음색의 목소리가 울리자, 비나엘르 파라이는 눈빛으로 부름에 응했다.
도대체 언제 들어 본 것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 짧은 호칭에 비나엘르 파라이는 혼란스러운 감정을 느꼈다. 화를 내야 하는 것일까?
그러나 그런 감정은 일순간이 채 지나기 전에, 놀라움과 함께 사라졌다.
“마테르, 당신도…… 시간에 순응하지 않고 있군.”
마테르라고 불린 여성, 드라비스족의 지도자는 비나엘르 파라이의 말에 가볍게 웃음을 지었다.
“그저 흘러가기에는, 너무 무거운 짐을 지고 있습니다.”
애잔한 감정이 떠오르려는 얼굴을, 비나엘르 파라이는 애써 칼같이 유지했다. 그러나 상대방 역시 무수한 세월을 보내온 존재, 놓쳤을 리가 없다.
“비나엘르 파라이. 당신이 짊어진 짐이 무엇인지 나는 알 수 없습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알고 싶지도, 그럴만한 여유도 없어요.”
마테르의 눈이 비나엘르 파라이의 눈을 응시했다.
따뜻하고 곧은 눈이다. 비나엘르 파라이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묻지 않을 수 없네요. 이곳에 왜 오셨나요?”
비나엘르 파라이의 눈동자가 조금 흔들렸다.
무엇이라 대답해야 할까? 눈앞의 여성과 자신이 바라는 것은, 분명히 충돌하는 가치일 것이다.
저희 인카르의 기사들과 함께 드라비스족을 도와 카론을 물리치기 위해 왔습니다?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이다.
비나엘르 파라이가 고민하는 찰나의 사이, 마테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것은 카론입니다. 칼리지오 밧슈가 아니에요.”
“그것은 모르는 일이오!”
자신도 모르게 외친 일갈에 비나엘르 파라이는 당황했고, 마테르는 가볍게 미소 지었다.
“그를 찾아 이곳에 오셨다면, 원하는 것을 찾지는 못할 것입니다.”
말을 마친 마테르는 비나엘르 파라이에게서 몸을 돌렸다.
비나엘르 파라이는 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움켜쥘 뻔한 것을 겨우 참아냈다.
모든 것을 되찾기 위해 이곳에 왔다.
카론의 흔적과, 그 수하의 발견.
트리에스테 대륙의 모든 생명체에게 절망을 가져다 줄 그 소식이,
오직 그 소식만이,
그녀에게는 한 줄기 빛이었기에────.
“그 정보를 들려주지 않는다고 해도 상관 없소. 나는 그를 찾아 낼 테니까.”
거구의 호위병과 함께 벌써 꽤 멀어진 마테르가 살짝 고개를 돌려 미소 지었다.
“얼마든지 이곳에 머무르셔도 좋습니다. 꽤 따스하고 평화로운 곳이거든요. ……아직은.”
말을 마친 마테르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Immortals – fin -
2. 발톱 자국 Scars
분명한 것은, 이 땅에 넓게 펼쳐져 있는 기운들이 비나엘르 파라이에게 있어 그렇게 낯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칼…….”
비나엘르 파라이는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많이 흐트러져 있고,
조각 조각난 기운들을 하나하나 이어가야만 느껴지는 것이었지만,
그것은 분명 그의 기운이었다.
그것은 분명, 크루어를 쥐고 내달리던 남자의 것이었다.
그것은 분명, 칼리지오 밧슈의 것이었다.
● ● ●
“늦으셨네요. 트리에스테 대륙의 어머니…… 아니, 이제 ‘어머니였던 여자’라고 불러드릴까요?”
푸른 피부를 가진 거구의 남자가 장난스러운 말투로 농을 던지자 비나엘르 파라이의 눈썹이 미세하게 올라갔다.
하지만 남자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갔다.
“둘 다 싫으시면 이 이름은 어떨까요. ‘엘’?’
순간 비나엘르 파라이의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덮고 있던 새하얀 로브가 하늘로 날았고, 박차고 뛰어오른 비나엘르 파라이의 몸이 우아하게 원을 그렸다.
푸른 피부의 남자의 어깨를 밟고 선 비나엘르 파라이의 손에 쥐어진 순백의 칼 두 자루가 교차되는 모양새로 그의 목 앞에 멈춰 서 있었다.
“레벨리오. 네가 어떻게 그 이름을 알고 있지?”
예리한 칼날에 스친 목덜미에서 슬며시 피가 흘러 나오고 있었지만, 레벨리오는 장난스러운 태도를 거두지 않았다.
“진정하세요. 단지 ‘증거’를 제시해 드린 것뿐입니다. 당신이 원하는 것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요.”
비나엘르 파라이가 쥔 칼 끝이 파르르 떨렸지만, 칼 끝이 더 이상 움직이지는 않았다.
그녀가 열 보 정도 멀리 떨어진 곳에서 순백의 로브를 집어 뒤집어 쓰는 동안, 레벨리오는 뻐근하다는 듯, 그녀가 올라 섰던 어깨를 몇 번 돌려보고 있었다.
“그는 어디에 있지?”
“말씀 드릴 수 없습니다. 아직은 당신을 믿을 수 없거든요. 동족들까지 배신한데다가, 트리에스테의 모든 종족들에게는 악마를 부활시키려는 옛 이야기 속 나쁜 마법사 같은 취급을 당하는 입장이라서요. 안전하게 가야죠. 안전하게.”
비나엘르 파라이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칼자루는 이미 빼앗긴 후였다.
“어떻게 증명하면 되겠나? 나와 당신의 목적이 일치한다는 것을.”
“알고 계시겠지요? 우리가 이 영지에서 이루려고 하는 것을?”
“카론의 부활.”
“그리고 그 의식을 방해하는 자들이 데카론이죠. 제가 원하는 것을 아시겠습니까?”
“받아들이지. 충분한 시간은 벌어 주겠다.”
할 이야기는 모두 마쳤다는 듯, 등을 돌려 떠나려던 비나엘르 파라이를 레벨리오가 불러 세웠다.
“한가지 더. 크루어의 주인이 이곳을 향하고 있습니다. 아, 물론 ‘현재’ 주인이요. 한 번 그분을 꺾었던 물건입니다. 위험하겠지요?”
비나엘르 파라이는 즉시 몸을 돌려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레벨리오를 노려보았지만, 레벨리오는 특유의 미소를 지어 보일 뿐이었다.
“농담입니다. 아무리 저라도 귀여운 손자를 죽이고 오라고 하지는 않아요. 킬킬킬.”
킥킥거리는 레벨리오의 표정이 보기 힘들어진 비나엘르 파라이는 한 걸음 더 떼더니 모습을 감추었고, 숫제 미친 사람처럼 웃어대는 레벨리오의 웃음소리만이 드라비스 영지의 하늘을 떠돌았다.
● ● ●
비나엘르 파라이가 팔을 크게 휘둘러 칼날에 묻은 피를 털어냈을 때, 방금 전까지 그녀의 검을 가슴에 품고 있던 남자의 눈에는 경악의 빛이 어려 있었다.
너무도 허무하게 뒤에서 심장을 내어주었다는 사실보다, 자신의 심장을 꿰뚫은 검의 주인을 확인한 충격이 더 컸던 남자는, 차마 입을 열지 못한지 그대로 지면에 고꾸라졌다.
“그 피로, 그의 피 값을 갚아야 할 것이다.
싸늘하게 내뱉은 비나엘르 파라이는, 나타났을 때처럼 소리도 없이 모습을 감췄다.
● ● ●
“그렇다면 그녀가 길잡이가 되겠군요. ……겠습니다. 기꺼이.”
드라비스 영지 중앙에 자리잡은 주술제단에는 레벨리오가 혼자서 한 쪽 무릎을 꿇은 채 중얼거리고 있었다.
한참을 중얼거리던 레벨리오는 자리에서 일어나 뒤쪽 숲 속의 어둠을 바라보았다.
“훔쳐보는 취미가 있으실 줄은 몰랐는데요.”
“밀회는 끝나셨나?”
“그럭저럭요. 당신 덕분입니다.”
“불유쾌한 감사는 받고 싶지 않아. 이제 내가 받아야 할 것을 받아야겠는데.”
비나엘르 파라이의 말을 받은 레벨리오는 비웃음에 가까운 웃음을 머금고 비나엘르 파라이를 향해 걸어갔다.
“그 전에, 당신에게 한 가지만 더 받아야겠어요.”
품 안에서 짧은 단검을 꺼낸 레벨리오는 다시 한 발, 비나엘르 파라이를 향했다.
레벨리오에게는 짧은 단검이었지만, 비나엘르 파라이의 입장에서 볼 때 그것은 거대한 양손검에 가까운 크기였다.
“무의미한 싸움은 하지 않는 주의로 보았는데. 레벨리오.”
빙글, 하고 손목을 돌려 본 레벨리오는 여전히 가벼운 표정이었다.
“잘 보셨네요. 당신과 싸울 생각은 없습니다. 그저, 당신의 피가 필요할 뿐이죠.”
“우리 중 한 명은 굉장히 언어능력이 떨어지는 것 같군. 내 생각에는 그 두 가지의 차이를 찾을 수가 없는데.”
비나엘르 파라이가 싸늘한 표정을 지으며 검을 꺼내 들자, 레벨리오는 또 한번 손목을 튕기고는 팔짱을 끼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몇 가지 알려 드리죠. 일단, 당신의 추측은 맞아요. 칼리지오 밧슈는 자신의 안에 카론을 봉인했습니다. 그 직후, 이계의 문을 닫기 위해 자신 스스로가 이계의 문을 넘어 갈 수밖에 없었죠. 지금의 카론께서는, 아니, 당신 입장에서는 지금의 칼리지오 밧슈라고 하는 것 더 와 닿을까요? 지금 칼리지오 밧슈라는 그릇 안에는 칼리지오 밧슈, 그리고 카론님의 혼이 함께 혼재하고 있죠. 정확히 그 두 혼이 하나의 그릇 안에서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지는 저도 모릅니다. 제가 접촉하고 있는 분은 카론님이시지, 칼리지오 밧슈가 아니니까요.”
“충분히 예측 가능했던 이야기야. 본론만 이야기 해.”
“뭐, 그 편이 저도 편하긴 합니다. 두 혼이 어떻게 공존하고 있는가? 그런 것은 저도 잘 모르지요. 하지만 그 그릇인 칼리지오 밧슈의 몸에 칼리지오 밧슈의 혼만이 존재 할 때 마지막으로 기억되어 있는 것, 그리고 그 육신의 유일한 목표. 그건 딱 한 마디의 짧은 중얼거림이었어요.”
“……”
비나엘르 파라이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예측하고 있던 일들이 명확해 졌을 뿐인데도, 그녀는 쉽게 혼란을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엘에게 돌아가야만 해”
“뭐?”
레벨리오가 다시 한 발, 비나엘르 파라이에게 다가갔다.
“이것이 칼리지오 밧슈의 육신에 깃든 마지막 기억. 그리고 그 육신의 유일한 목적입니다.”
비나엘르 파라이는 제단의 석재 위에 무너지듯 주저 앉았다.
“칼…….”
어느새 주저 앉아버린 비나엘르 파라이의 등 뒤로 다가온 레벨리오는 아까부터 가지고 놀던 단검으로 그녀의 등을 내리쳤다.
그 흔한 비명소리 한 번 들리지 않았고, 그녀의 흰 옷은 붉게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 칼리지오 밧슈의 육신에 깃들에 계신 카론님께서 트리에스테로 오시기 위한, 가장 확실한 이정표가 당신이겠죠.”
비나엘르 파리이의 등에서 흘러내린 붉은 핏줄기가, 레벨리오가 처음 서 있던 재단을 향해 느리게 흘러가고, 비나엘르 파라이는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레벨리오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재미있다는 듯이 지켜보았다.
그녀의 등에 난 상처는 마치, 거대한 짐승이 할퀴고 간 발톱자국 같았다──────.
Scars – fin -
3. 칼리지오 밧슈 Hero
칼리지오 밧슈는 무거운 바위를 얹어 둔 것 같은 무거운 머리를 흔들며 눈을 떴다.
떠나야 할 아침이다.
당연하게도 밝고 희망찰 리는 없는 아침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칼리지오 밧슈의 얼굴은 심하게 그늘져 있었다.
떠올리기 싫은 시절이 어째서 떠올랐을까?
미간을 찌푸리던 칼리지오 밧슈의 눈에, 문득 선명한 은발의 머리카락이 들어왔다.
‘꼭 아침이면 엎드려 자고 있다니까……’
칼리지오 밧슈는 쓴웃음을 지으며 사랑스러운 은빛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고는 조심스레 자리에서 일어났다.
금빛 무구를 챙기며, 문득 그녀를 깨워 아침인사라도 전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 칼리지오 밧슈였지만, 이내 고개를 흔들고는 마지막으로 크루어를 손에 쥐었다.
가야 할 시간이다.
조금 작다 싶은 문을 열자, 따스한 햇살이 방 안으로 퍼져 들어오기 시작했고, 칼리지오 밧슈는 약간의 높은 문턱을 넘어 중얼거렸다.
“그럼 다녀올게. 엘.”
햇살이 지나치게 눈이 부신 아침이었다.
● ● ●
“칼리지오 밧슈! 나의 친구여.”
백기사단의 단장, 운도 마조키에는 한걸음에 달려나 와 칼리지오 밧슈의 손을 맞잡고는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운도.”
운도 마조키에의 손을 힘있게 맞잡은 칼리지오 밧슈의 눈에는 반가움과 함께 짙은 고민이 어려 있었다.
그런 칼리지오 밧슈의 눈을 바라보던 운도 마조키에는 조용히 손짓하여 호위들을 물러나게 한 뒤, 긴 한숨과 함께 석조 의자에 앉았다.
“……차 한잔 내 줄 시간조차 없음을 용서하게. 인간들의 공기가 심상치 않네. 어서 결정을 내려야 해.”
“그들의 탓으로 돌리실 셈입니까? 제 앞에서요? 백기사단의 단장이라는 분께서요?
”……하지만 나 역시 알로켄이네. 그리고 자네 역시.”
쾅!
운도 마조키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엄청난 소리와 함께 칼리지오 밧슈의 주먹이 그가 기대 서 있던 뒤쪽 벽에 꽂혔다.
“저는 아닙니다. 아니, 할 수만 있다면 제 몸에 흐르는 피의 절반을 모두 뽑아 내서라도 아닌 길을 갈 겁니다.”
“……실언을 했군. 하지만 분명 먼저 칼을 꺼낸 것은 인간들이야.”
칼리지오 밧슈는 흥분을 가라앉히려는 듯, 긴 호흡을 내 쉰 뒤, 비어있는 의자 하나를 끌어당겼다. 하지만 의자 모서리를 쥔 칼리지오 밧슈의 손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나약한 자들에게 칼을 들게 한 것은 누굽니까! 차라리 마지막까지 속이시지요! 저에게 그 계획을 알려 주실 때, 이런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셨습니까?”
“나는 알로켄의 생존을 선택해야 했네. 그러나 자네이기 때문에 알려 준 것이고, 자네이기 때문에 요구하는 것이네.”
“하, 인간들에 의해 알로켄이 멸절할 것이라고요? 인간들이 그렇게 두렵습니까? 언제부터 인간이 그렇게 강한 생명체였습니까!”
“밧슈.”
“……그래서 내 어머니는 그렇게 비참한 말로를 맞이했던 겁니까? 사랑했다고 착각했던 남자에게는 버림받고, 가족들에게는 화냥년이라고 손가락질 받으면서, 세상 어디에도 기댈 곳 하나 없이?”
“칼리지오 밧슈!”
“……말씀하십시오.”
“자네 어머님이야 말로 알로켄이 인간을 두려워하는 이유일세. 알고 있지 않은가? 분명 인간들은 불완전하고, 나약하지. 하루하루 다툼이 끊이질 않고, 어리석은 행동만 반복하는 종족이야. 그렇기에 알로켄들은 항상 완전한 자신들에 비해 부족한 인간들을 무시해 왔던 것이고.
그렇기에, 불완전하기 때문에 인간들은 조금씩이라도 한 발씩 나아가고 있지. 하지만 애초부터 완전한 존재였던 알로켄은 어떤가?”
“멋지군요. 인간들이 더 나아갈 발걸음이 무서워 트리에스테를 멸망시키고 도망가겠다는 겁니까?”
“그들이 한 걸음 더 내디뎠을 때, 알로켄은 확실하게 멸망하네. 이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야.”
“하! 그런 방법이 있다면 제가 가장 먼저 알고 싶군요!”
“……그렇기에, 자네에게는 더 이상 이야기 해 줄 수는 없네.”
“잘 알고 계시는군요. 그럼 제가 이 계획에 협력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잘 알고 계시겠지요?”
이글이글 타오르는 칼리지오 밧슈의 눈을 한참 동안 바라보던 운도 마조키에는 각오를 한 듯, 입을 떼었다.
“비나엘르 파라이. 그녀 역시 해당한다고 해도?”
“크루어의 주인이 옆에 서 있는 그녀를 해할 존재가 있을 수 있다고 보십니까?”
“그 방법이라는 것은 물리적인 것이 아니야. 알로켄이라는 생명의 멸절이 아니네. 그것은 알로켄이라는 개념 그 자체의 소멸이야.”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녀 역시 마찬가지 라는 뜻이지.”
칼리지오 밧슈는 휘청거리는 무릎을 손에 쥔 의자 모서리를 꽉 쥐는 것으로 간신히 감출 수 있었다.
그랜드 폴.
알로켄들이 준비한 자신들의 생존을 위한 계획의 이름이다.
차원의 문을 열고 알로켄들이 상계로 이주하기 위한 계획.
겉으로 보았을 때는 인간들을 핍박하던 알로켄들이 알아서 떠나주겠다는, 칼리지오 밧슈의 입장에서는 환영 할 만한 계획이었지만 문제는 그 방법에 있었다.
알로켄들이 상계로의 이주를 위해 상계로 향하는 차원의 문을 열게 된다면, 그 반대차원인 이계로의 문 역시 함께 열려야 했다. 그렇지 않는다면 그 반동으로 트리에스테는 차원의 축이 뒤틀려 그야말로 멸망의 길을 걸게 될 수밖에 없었다.
운도 마조키에는 다른 알로켄들이 알아채지 못하게 이 계획의 전말을 칼리지오 밧슈에게 전하고 그의 어떤 협력을 요구하고 있었다.
칼리지오 밧슈가 충격에 빠져 입을 닫고 있자, 운도 마조키에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옆에 서서 입을 열었다.
“우리가 상계로의 차원의 문을 열었을 때, 자네는 이계로의 문을 열게. 그리고 알로켄이 모두 상계로 떠나고 차원의 문을 닫을 때까지, 이계의 힘이 넘어오지 못하도록 그 문을 지켜 내 주게.”
“……”
“그것을 막아 낼 수 있다면, 자네가 바라던 세상을 만들 수 있네. 알로켄에게 핍박 받는 자들이 없는, 인간들만의 세상을 말일세.”
칼리지오 밧슈는 깊은 고뇌에 빠진 듯한 얼굴이었다.
그런 그를 뒤로하고, 운도 마조키에는 어두운 방 안을 빠져나갔다.
“우리에겐 시간이 별로 없네. 어차피 이 요구는 알로켄이 아니라 나 운도 마조키에가 하는 것이고, 자네가 응하지 않아도 이 계획은 진행 될 거야. 옳은 판단을 하길 바라네.”
● ● ●
3일 전의 일이었지만, 바로 어제의 일처럼 생생히 떠오르는 기억의 끝자락에 도달할 무렵, 칼리지오 밧슈는 어느새 약속한 장소에 도달 하였음을 깨달았다.
보기보다 훨씬 무겁게 느껴지는 석재 문을 열고 들어가자, 운도 마조키에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음은 굳혔나 보군.”
칼리지오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운도 마조키에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니쉬 엘라를 비롯해 인간에게 우호적이던 그녀의 파벌은 이 계획에 끝까지 반대했고, 상계로의 이주하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당신께서는 어떻게 하실 것입니까?”
칼리지오 밧슈의 물음에 운도 마조키에는 강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 보았다.
“나는 이 계획에 찬성했던 쪽일세. 하지만 나의 이유는 그들과 다르며, 또한 나는 백기사단의 단장일세. 게다가…… 이계의 힘을 막는데 애송이 하나 보내기엔 걱정도 태산이고 말이지.”
칼리지오 밧슈와 운도 마조키에는 서로의 얼굴을 보며 살며시 미소를 지었지만,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그녀를, 엘을 도와주십시오.”
“비나엘르? 그건 무슨 의미인가?”
“아르카나를 사용해 인간들을 대피시킬 겁니다. 모든 것을 걸고 막아 보일 테지만, 이계의 힘이 퍼져나가 위험한 상황이 될 수도 있습니다. 엘에게는 모든 것을 이야기 해 주었고, 아르카나로 대피하기 위한 모든 준비는 그녀에게 부탁해 두었습니다.”
“자네……”
“당신께서는 그녀를 도와주십시오.”
똑바로 운도 마조키에를 바라보던 칼리지오 밧슈는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등을 돌렸고 운도 마조키에는 미동도 하지 않고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반드시 돌아오게.’
운도 마조키에가 그 등에 전하려던 마지막 말은, 그 단호한 등에 미처 전해지지 못했고, 결국은 영원히 전할 수 없는 말이 되어 허공을 맴돌았다.
트리에스테 대륙의 영웅은, 그렇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갔다─────.
Hero – fin –
4. 방주 아르카나 History
용의 계곡 입구에 위치한 거대한 방주 아르카나는 이미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이계의 문을 통해 흘러 나오는 기운들과 엄청난 수의 생명체들, 그리고 그 기운에 오염되어버린 동물들까지 무작정 인간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비나엘르 파라이는 모든 힘을 다해 그것들을 막아내며, 인간들을 아르카나로 유도하고 있었지만, 이미 역부족이었다.
알로켄에게 반기를 들고 싸웠던 자들이 그녀를 도와 이생명체들과의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으나, 멀리서 피난 온 자들에 의해 이계의 문을 열어 이 사태를 만든 장본인이 그들이 따르던 칼리지오 밧슈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상당수가 패닉에 빠져있었다.
비나엘르 파라이는 칼리지오 밧슈의 당부를 어기고 이계의 문을 열게 된 진실에 대해 설명하며 그들을 다잡으려 노력했지만 이미 패닉상태에 빠져버린 자들을 다잡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대로는 안돼…….”
비나엘르 파라이는 절망에 찬 탄식을 내뱉었다.
아르카나 내부로 대피해 거대한 마법장벽을 가동시키기만 한다면, 아르카나는 절대방위의 요새로써 기능할 테지만 아직도 몰려오고 있는 피난민들이 너무나 많았다.
그리고 그보다 더 많은 이생명체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여기서 더 버티며 더 많은 피난민들을 받아 들여야 할까?
아니면 이만 아르카나로 돌아가 마법장벽을 발동시켜야 할까?
비나엘르 파라이는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 판단을 하지 못하고 있는 사이, 무수히 몰려오는 이생명체들의 뒤로 또 다시 한 무리의 집단이 몰려오고 있었다.
그녀는 결국 검을 고쳐 쥐고 몰려드는 이생명체들을 노려보았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이생명체들의 뒤쪽에서, 무리를 반으로 갈라내며 달려오는 무리의 선두에 익숙한 얼굴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저 멀리에서 운도 마조키에와 백기사단이 이생명체들의 무리를 도륙하며 아르카나로 달려오고 있었다────.
● ● ●
“오랜만이구나. 파라이.”
전투가 어느 정도 소강상태에 접어들자, 비나엘르 파라이의 곁으로 다가온 운도 마조키에가 거대한 군마에서 뛰어내렸다.
“오랜만이네요, 운도. 지금 가장 보고 싶지 않은 친구가, 가장 필요할 때 와 주는군요.”
“변명하지 않겠다. 내가 그를 사지로 몰아넣은 것은 부정 할 수 없는 사실이니까.”
담담히 인정하는 운도 마조키에를 노려보던 비나엘르 파라이는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꼭 그가 해야만 하는 일이었나요?”
“내 판단은 그러했다.”
“당신을 원망할 수도 없게 만드는군요, 운도.”
잠시 비나엘르 파라이의 얼굴을 바라보던 운도 마조키에는, 그녀의 얼굴에서 시선을 돌렸다. 담담하게 말하고 있지만, 이 젊은 이들에게 책임을 뒤집어씌운 것 같은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나저나 얄궂은 일이다. 알로켄이 만들어낸 지옥에서, 인간들을 구하기 위해 싸우고 있는 자들은 알로켄인 너와 나라니.”
“전 이미 그 이름을 버렸어요.”
“……밧슈와 같은 이야기를 하는군. 그렇다면 그걸로 되었다. 아르카나는 언제 폐쇄할 생각인가?”
비나엘르 파라이는 검을 쥔 손에 잔뜩 힘을 주었다.
사실 그녀 역시 이 지옥 같은 상황에 견딜 수 없는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버텨내야 했다.
“그와 약속을 했어요. 그를 대신해, 인간들을 지켜 주겠다고. 그도 저에게 약속을 했죠. 반드시 돌아오겠다고.”
비나엘르 파라이의 대답에 운도 마조키에의 주먹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사지로 보낸 것은 자신이고, 쉽게 돌아올 수 있는 길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기에,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비나엘르 파라이는 그 손을 보았지만, 애써 모른척하며 말을 이었다.
“당신의 얼굴을 보니 더 확신이 드네요. 그가 더 어려운 약속을 나에게 했어요. 그렇기에 나는 그와의 약속을 지켜 낼 거에요.”
“그렇다면 어디 한번, 버텨 낼 수 있을 때까지 버텨보도록 하지.”
● ● ●
비나엘르 파라이는 검붉은 피에 잔뜩 엉겨 붙은 긴 머리카락을 잘라냈다.
팔다리는 이미 제대로 말을 듣지 않았고, 손가락 하나 제대로 움직이기도 힘든 지경이었다.
곁에서 싸우는 운도 마조키에가 아니었다면 벌써 열 번은 저 세상으로 떠났을 것이다.
전황은 점차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고, 백기사단은 이미 반 수 이상이 쓰러져있었다.
“파라이.”
운도 마조키에가 지친 목소리로 비나엘르 파라이를 불렀지만, 이젠 대답할 힘 조차 남아있지 않던 그녀는 눈짓으로만 그를 쳐다보았고, 그 틈새에 운도 마조키에와 비나엘르 파라이는 각각 몇 마리씩의 이생명체를 베어 내야만했다.
“끝도 없이 쏟아져 나오는군. 이제 한계다. 아르카나로 돌아가야 해.”
“지금 그럴 여유가 있는 걸로 보여요? 아르카나로 돌아가긴커녕 잠깐 이라도 검을 놓으면 끝이에요!”
“그 정도 시간 벌 힘은 남아있다. 돌아가서 마법장벽을 가동시키도록 해.”
“미안하지만 무서우시면 먼저 가시죠. 전 지켜야 할 약속이 있어서요.”
비나엘르 파라이의 말에 운도 마조키에는 이생명체 하나를 또 베어내고는 그녀를 향해 씩 웃어 보였다.
“굉장한 우연이군. 실은 나도 그렇거든. 내가 지켜야 하는 약속은 비나엘르 파라이, 자네의 안전이네. 아마도 네가 지켜야 할 약속은 저들을 지켜 내는 것이겠지?”
비나엘르 파라이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운도 마조키에를 쳐다보았다.
“원래 알로켄이 만들어 둔 아르카나의 마법장벽을 인간이 가동시키기에는 무리가 있지. 그리고 여기에 알로켄이라고는 자네와 나, 둘 뿐이네.”
“하지만 운도.”
비나엘르 파라이가 말을 자르려고 했지만, 운도 마조키에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가게. 가서 자네의 약속을 지키게.”
잠시 고개를 떨궜던 비나엘르 파라이는, 이내 결심을 한 듯 등을 돌렸다.
무엇이 우선인지, 판단하지 못 할 그녀가 아니었기에, 조용히 아르카나를 향해 발걸음을 돌렸다.
● ● ●
훗날, 아르카나에서 나온 인간들은 두 가지 역사를 기억했다.
마지막에 와서는 결국 인간에게 등을 돌리고 트리에스테에 지옥을 가져온 반쪽 짜리 인간, 배신자 칼리지오 밧슈.
아르카나의 빛나는 마법장벽이 펼쳐지기 직전까지, 그 자신은 알로켄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생명의 불꽃을 태우며 그들을 지켜낸 트리에스테의 영웅, 운도 마조키에.
트리에스테의 역사에는, 그렇게 두 남자가 남았다────
History – fin -
5. 재회 Persona
“내일, 그분을 모실 겁니다.”
비나엘르 파라이의 기척을 느낀 레벨리오가 지나가는 말투로 말했다.
마치, 그들 보다 더 이 날만을 기다리던 비나엘르 파라이를 놀리려는 듯한 투였지만, 그녀는 딱히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미세리아가 리케츠를 가리는 날인가? 어울리는 날이라고 해 줘야 하나? 그런 건 나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어디서 이계의 문을 열 생각이지?”
“……원래 칼리지오 밧슈가 열었던 이계의 문의 위치는 알고 계시겠죠?”
“……로아성인가. 그곳에서 문을 열기엔 무리가 있을 텐데.”
“그런 문제도 있죠. 상계로의 문도 함께 열어야 한다는 문제도 있고요. 차원의 축이 뒤틀려 트리에스테가 무너져 버리면 그분을 모셔오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잖아요?”
“지루해 지기 시작하는군. 요점만 말하는……큭.”
레벨리오를 노려보던 비나엘르 파라이가 갑자기 말을 멈추고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등에 그어진, 레벨리오에게 당했던 상처에서 다시 피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피가 멈추지 않는 것을 보니, 그분께서는 이정표를 잘 잡으신 모양이군요. 여하튼 이계의 문의 이야기로 돌아간다면, 그 문은 열지 않습니다. 이계의 문은 열지 않은 채, 그 분만을 모셔 올 겁니다. 강력한 용의 힘이 깃든 곳 중 하나에서, 당신의 피를 등대 삼아서요.”
“……”
“세이크리드 클로. 그곳에서 그분을 모실 것입니다.”
말을 마친 레벨리오는 빠른 걸음으로 숲 속을 향해 사라져갔고, 비나엘르 파라이는 이를 악물고 자리에서 일어나, 그가 사라진 숲 속을 노려보았다.
● ● ●
비나엘르 파라이가 자신의 검을 들어 손 끝을 베자, 그녀의 손 끝을 따라 한 방울씩의 피가 미리 그려져 있던 마법진에 젖어 들어갔다.
레벨리오는 흥미진진한 눈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고, 세이크리드 클로의 최상층에는 적막감만이 맴돌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바닥에 떨어진 몇 방울 피가 끓어 오르듯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고, 곧 검붉은 연기가 방안을 채웠다.
레벨리오도, 비나엘르 파라이도, 아무런 미동도 하지 않고 그 검붉은 연기 속에 서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검붉은 연기가 걷힌 뒤에도, 비나엘르 파라이가 첫 마디를 떼기까지에는 너무도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너무나 익숙한 얼굴이 눈 앞에 있었다.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잊어버릴 리 없는 얼굴이 눈 앞에 있었다.
칼리지오 밧슈가, 비나엘르 파라이의 눈 앞에 서 있었다─────.